자이레 킨샤샤의 특설 링에서 알리가 포먼을 눕혔을 때, 내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것 같더니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무라카미 류, 『교코』
마징가Z랑 태권V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세상 모든 소년들은 비슷한 질문을 하면서 자랍니다. 평화적이라거나 딱히 호승심이 없는 일부 소년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이런 질문에 빠져서 서로 주장하고 내기하고 자존심을 세웁니다. 그리고 어른이지만 아직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질문에 빠
져 사는 어른이(?)들을 위한 가장 보편적인 격투 스포츠, 복싱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복싱은 야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스포츠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다가 재미도 더럽게 없고.
그런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복싱 마니아였던 형님이 정기적으로 구독하던 잡지 '펀치라인'을 보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펀치라인은 선수들의 배경과 전적 인터뷰, 각오같은 것들로 재미있게 구성돼 있었습니다. 당시는 신인왕전이 인기리에 방송
되던 시기였고 저는 여섯살 차이 나는 형님과 어떤 선수가 우승할 것이다 내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신인왕전을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펀치라인에서 곱슬머리에 강인해 보이는 한 선수의 브로마이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전사를 연상케하는 모습에 매료되었고 그에 대해서 열심히 찾아 보았습니다. 그와 관련된 여러 선수들, 그리고 고구마 줄기
처럼 얽혀 있는 이야기들. 90년대 중반에 이 이야기를 엮어서 하이텔 스포츠 게시판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싱야사"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시절 저를 매료시켰던 KO 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이름 옆의 전적은 첫 패배 전까지의 전적입니다.
원조 괴물 KO왕 루벤 올리바레스 (58전 57승 55KO 1무)
멕시코의 원조 KO왕인 루벤 올리바레스는 '신이 빚은 복서'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가 우상으로 생각할 정도로 멕시코 강타자들
의 교본 같은 선수였습니다. 데뷔 후에 파죽의 24연속 KO승. 올리바레스는 카스틸로와 주고받는 라이벌전을 하기 전까지 58전
57승 1무 55KO승의 경이적인 레코드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올리바레스는 타고난 강펀치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천재 스타일로
상대 선수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링에 오르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커리어의 말기에 공산국가 니카라과에서 오직 권투를 위
해 망명한 신성 알렉시스 아르게요에게 장렬히 13라운드 KO패합니다. 링의 귀공자, 링의 백작, 말라깽이 파괴자란 별명을 갖고
있는 전설적인 복서 알렉시스 아르게요는 이 경기 후에 승승장구, 나중에 '신시내티의 폭풍' 아론 프라이어와의 2연전으로 세
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올리바레스는 그 패배 이후에 또다른 강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바로 3패를 안고는 있지만 승리한 27번에 26번을 KO로 승리한
강타자 대니 로페즈였습니다. 올리바레스는 이 경기에서 대니 로페즈를 엄청 때렸지만 덩치 큰 로페즈는 끄떡하지 않고 올리바
레스를 밀어붙여 주저앉게 만듭니다. 흉기같았던 올리바레스의 주먹이 마치 솜주먹처럼 느껴진 경기였습니다. 그리고 올리바레
스는 99전째 페더급 최다방어에 빛나는 링의 여우 에우제비오 페드로사에게 KO패하고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우리나라에
와서 김사왕 선수와 방어전을 한 그 페드로사입니다. 입국하는 날 김사왕 선수를 연구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사왕이 나를 연
구해야지 내가 왜 김사왕 연구하냐'고 거드름을 피웠던 페드로사입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김사왕과 페드로사의 기량 차가 너무
심했습니다. 김사왕은 8라운드 내내 얻어맞다가 링에 드러눕고 맙니다.)
불꽃같은 KO왕 알폰소 사모라 (29전 전승 29KO)
이렇듯 페더급에 견고한 아성을 구축하고 19차 방어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페드로사도 이겨내지 못한 KO왕이 있으니 바로 멕
시코의 알폰소 자모라입니다. 알폰소 자모라는 4전 5기 신화의 홍수환을 4라운드 KO로 잡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16전째에
페드로사가 자모라에게 도전했을 때 자모라의 전적은 24전 24승 24ko승. 그야말로 퍼펙트한 전적이었습니다. 페드로사는 2라운드
에 자모라의 전매특허 왼손 훅에 맞고 KO패하여 자모라 KO승 행진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완벽한 KO왕 자모라에게도 호적
수가 있었으니 바로 같은 나라 멕시코의 강타자이자 챔피언 카를로스 사라테였습니다.
자모라 vs 페드로사 경기영상
냉정한 KO머신 '퍼펙트' 카를로스 사라테 (45전 전승 44KO)
한 산에 호랑이가 둘이나 있을 수는 없겠지요. 결국 자모라와 사라테는 최전성기에 승부를 가리게 됩니다.
두 선수가 맞붙었을 때의 전적이 자모라는 29전 전승 29KO, 사라테는 45전 전승에 44KO승 같은 체급, 같은 나라에 이런 괴물이
둘이나 있다니 정말 기가막힐 노릇이지요. 비록 타이틀을 걸지는 않았지만, 이 한번의 경기로 한사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한사
람은 승천을 하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사라테는 시종일관 자모라를 압박하고, 자모라는 안간힘을 쓰며 공격해보지만 신체 조건이 월등한 사라테에게 꽁꽁
틀어막힙니다. 마치 형과 동생의 싸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자모라는 별 힘도 못써보고 사라테에게 허무
하게 4라운드 KO로 패하고 맙니다. 이후로 자모라는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었으니 이 한번의 패배가 얼마나 큰 상심으로 작용했
을지 짐작이 갑니다.
사라테 vs 자모라 경기영상
KO왕의 대명사 윌프레도 고메즈 (32승 32KO 1무)
냉정한 경기운영과 날카로운 테크닉으로 밴텀급에서 적수가 없던 사라테는 드디어 한 체급 올려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인 윌프레
도 고메즈에게 도전합니다. 윌프레도 고메즈 아직까지도 경량급에서 KO머신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선수입니다. 고메즈는 한국의
염동균을 잡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홍수환은 자모라에게 타이틀을 뺏겼으니 이런 KO왕들과 한시대에 챔피언을 한 한국의 두 챔
프는 좀 억울하겠습니다.
고메즈는 멕시코의 복싱 라이벌 국가인 푸에르토리코 출신이었습니다.
1978년 10월 28일 양 국가를 대표하는 KO왕 고메즈와 사라테는 자신과 국가의 명예를 걸고 한판 붙습니다. 고메즈에게 도전할 당
시 사라테는 52전 전승 51KO의 거짓말 같은 전적으로 98%가 넘는 KO율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뚜껑은 열렸습니다. 직선
적으로 뻣뻣하게 들어오는 사라테를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반격하는 고메즈의 모습을 마치 고양이과의 동물과 같이 부드럽고 유연
했습니다. 마침내 운명의 5회. 고메즈의 강타에 무릎을 꿇은 사라테는 5회 KO로 장렬히 패배합니다. KO머신의 믿어지지 않는 KO
패에 멕시코는 망연자실,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 이후 사라테의 권투인생은 내리막이 시작됩니다. 체중조절에 실패했다
고도 하고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고도 했지만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고메즈 vs 사라테 경기영상
이후 고메즈는 승승장구. 슈퍼 밴텀급 타이틀을 8차례나 방어합니다. 더 이상 슈퍼 밴텀급에는 적수가 없었습니다. 월장(체급을
올림)밖에는 답이 없었죠. 당시 한 체급 위인 페더급에는 WBA 타이틀을 장기집권 중인 에우제비오 페드로사가 버티고 있었고,
WBC엔 멕시코 출신의 살바도르 산체스가 6차 방어에 성공한 상태였습니다. 왜 페드로사가 아닌 산체스와 경기가 성사되었는지 기
억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시각으로 보기에도 푸에르토리코-멕시코의 라이벌전 성격, 남미 복싱시장의 규모와 열기, 깔끔한
전적에 스타성을 갖춘 산체스와의 대전이 흥행이 더 되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간혹가다 지지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던 산체스가 여우같은 페드로사보단 수월한 상대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간 아래 체급에서 올라온 도전자임에도 불구하
고 전문가와 도박사들도 고메즈의 우세를 점칠 정도도 고메즈의 존재감은 대단했습니다. 고메즈 역시 상당한 자신감에 차서 산체스
를 무시하는 말을 종종 언론에 흘렸습니다.
비운의 천재 살바도르 산체스 (44전 42승 32KO 1무 1패)
그렇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브로마이드를 갖고 있던 선수의 이름은 바로 살바도로 산체스였습니다.
저는 산체스가 60킬로가 넘지 않는 페더급 선수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브로마이드의 산체스는 마치 미들급
선수처럼 우람해보였거든요. 산체스는 원조 KO왕 올리바레스가 말년에 만나 고생한, 인디언 KO왕 대니 로페즈를 잡고 챔피언이 되었
습니다. 대니 로페즈를 2번 모두 KO로 잡은 경기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산체스는 3박자를 갖춘 선수였습니다. 또한 멕시
칸 스타일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본인 특유의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살짝 내린 가드와 업라이트 스타일, 특유의 움직임과 리듬감. 강
타자의 펀치도 견뎌내는 맷집, 강타자에게 카운터를 거는 강심장.
시종일관 챔피언이 된 듯 행동하는 고메즈에게 그는 단 한마디만 합니다. "고메즈여 까불지 말라"
그리고 운명의 1981년 8월 21일. 역시 뚜껑을 열자 경기 양상은 대중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 갑니다. 1라운드 시작하자마자 고메즈
는 호기롭게 들어가다 산체스의 왼손 카운터에 걸려 다운이 됩니다. 그리고 이후 경기 양상은 거의 산체스가 고메즈를 농락하는 모드.
결국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고메즈는 8라운드의 산체스의 집중포화를 맞고 KO됩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산체스는 경기를 일찍 끝낼
수도 있었지만 괘씸해서 경기를 질질 끌었다고 얘기합니다. 산체스의 마지막 경기는 아주마 넬슨과의 경기였습니다. 향후 10년 이상을
페더급과 슈퍼 페더급을 오가며 맹위를 떨친 전설적인 선수 아주마 넬슨을 15라운드 KO로 잡아냅니다. 그러나 1982년 8월 12일 산체스
는 교통사고로 23세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합니다. 권투 팬들이 두고두고 아쉬워하던 에우제비오 페드로사와의 통합전을 뒤로 하고.
산체스 vs 고메즈 경기영상
P.S.
오는 일요일에 공중파에서 게나디 골로프킨(36전 전승 33KO)대 다니엘 제이콥스(32승 29KO 1패)의 경기를 생중계합니다.
외조부가 한국인이라서 더 정이 가는 골로프킨과 골육종이라는 암을 극복하고 선수로 복귀하여 더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인간승리
의 표본 다니엘 제이콥스. 어느 한 선수가 장렬히 패배하면 더 아쉬울 듯합니다만, 복싱의 역사는 냉정합니다. 이 한번의 경기로 승자
와 패자가 극명히 갈리겠죠. 다만 두 선수의 위상으로 보아 골로프킨이 승리할 경우 현 미들급의 체제는 골로프킨 독재로 완고히 굳어
질 것이며 크게 바뀌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제이콥스는 골로프킨의 유일한 대항마에서 미들급의 골로프킨 희생자 그룹 중 하나로 전락
하겠죠. 만일 제이콥스가 이기는 경우 일종의 업셋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야말로 the winner takes it all 이 될겁니다. 골로프킨이 쌓
아온 모든 것을 물려 받을 수가 있습니다. 칼로 흥한자는 칼로 망한다고 합니다. KO왕도 언젠가 KO될 때가 옵니다. 어쨌거나 절대로
질 것 같지 않고, 총알을 맞아도 죽지 않을 것 같은 사나이도 언젠가는 패배하는 날이 옵니다. 그 날이 내일이 될지 아닐지는 지켜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