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호는 위조지폐 산업을 주무르는 흑사회의 큰 손입니다. 그에게는 껄렁거리지만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 마크가 있죠. 그리고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동생 아걸이 있습니다. 이 형제는 아직도 볼 때마다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며 우애를 확인하죠. 그러나 송자호(이하 아호로 호칭)에게는 큰 고민이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경찰을 꿈꾸는 아걸의 발목을 붙잡을 것 같아 두려운거죠. 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제는 조직에서 발을 뺄 때라고 아호는 판단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거래 도중 습격을 받고 아호는 경찰에 잡히고 맙니다. 그 사이 내부사정을 알고 있는 아호, 아걸 형제의 아버지는 상대조직에서는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호가 출소하지만, 아걸은 아버지를 죽게 만든 형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전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거의 없었습니다. 주윤발이 슈퍼스타로 발돋움한 영화 정도로 알고 있었죠. 그 외에는 <영웅본색> 하면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들 뿐이었습니다.쌍권총, 썬글라스, 지폐로 담배에 불 붙이기, 바바리 코트…. 그래서인지 영화 시작부터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윤발의 마크는 생각보다 훨씬 까불거리고, 영화 곳곳에는 미소와 따스함이 넘쳐나더군요. 부유해보이던 영화는 초반부가 지나면 불쌍한 인물들이 밑바닥에서 비틀거립니다. 다른 걸 떠나서 이 영화의 주연은 주윤발이 아니라 적룡이잖아요!! <영웅본색>은 어둠의 길에서 방황하던 인간이 빛을 찾아 떠나는 속죄의 이야기고, 크게 본다면 형과 아우가 다시 만나게 되는 혈육드라마입니다. 잘 쳐줘야 주윤발의 마크는 이 둘을 엮어주고 분위기를 돋구는 조연이죠. 지금 봐도 마크의 캐릭터가 매혹적인 건달미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긴 합니다.
낭만을 빼고 본다면 <영웅본색>은 고전적 주제를 그리고 있습니다. 가족, 용서, 우정, 신념 등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강호의 도의”쯤 될 것입니다. 이는 인물들이 가장 크게 화를 내고, 상대캐릭터가 악역으로 묘사되는 부분을 통해 드러납니다. 아호를 습격한 조직, 아성, 그리고 아걸의 눈으로 본 아호까지 이들은 모두 상대방의 믿음을 배반했지요. 이들은 배신을 했기 때문에 악인이고 결국 응분의 처단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지로 나아가려던 아호가 끝내 마지막에 마크와 일을 벌이는 선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걸이 속 좁은 인간으로 그려지는 것도 형을 “믿어주지” 못하는 부분 때문이구요.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마크가 가장 미성숙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선과 악, 용서와 증오라는 갈림길에서 형제는 헤매고 있는 와중에도 마크는 개인의 영달과 자존심이라는 가치에 더 매달리고 있으니까요.
때문에 이 영화의 모든 낭만은 마크의 몫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을 건드리고 있지요. 한번 태어났으면 폼도 딱 잡고, 적당히 으시대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저 꼭대기에서 추락했다면 그리고 한때 자신이 아끼던 아랫사람이 이제는 자신을 깔보고 욕보인다면, 본 때를 보여주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핵심적인 액션도 마크가 도맡아하고 있지요. 그러나 마크는 세속적일지언정 저속하지 않습니다. 잘 나갈 때의 욕망은 장난기로 표출되고, 영락한 이후의 욕망은 약자의 울분을 업고 있으니까요. 철 없어 보이지만 그럴 수 있고, 그럴 만 한 선택들인거죠. 그렇기에 이 영화의 함의는 마크가 보트를 되돌려 아호와 아걸을 구하러 가는 그 순간 완성됩니다. 영화가 추구하는 윤리와 미의식(힘의 논리)이 마크라는 인물 안에서 합쳐져 숭고한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죠. (이 영화의 메인 테마곡을 다시 들어보시길!! 당년정이 아니라 마크의 테마곡입니다.)
초반의 명랑한 장면을 지나서도 영화는 계속해서 소년의 감성을 가지고 갑니다. 누아르 영화의 공식대로 어른이 되면서 버리고,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쓸쓸함을 그리지 않아요. 오히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마크가 그렇듯 아호와 아걸 역시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하죠. 심지어 욕망에 가장 솔직한 마크조차도 다시 한번 총을 쥐는 동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고 싶을 뿐이야!” 그것은 자신을 괴롭힌 자에 대한 원한도, 과거의 영달을 되찾고자 하는 물욕이나 지배욕도 아닙니다. 이상의 추구이면서 자아의 회복인, 지극히 본질적인 삶의 이유입니다. 이들은 모두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고 거기에는 아직 길이 있습니다. 종국에는 그 길을 택하며 후회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처럼 <영웅본색>은 어른이 되어가는, 혹은 어른이 되버린 존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고, 언제까지나 소년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이야기죠.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과잉입니다. 러닝타임 도중 사운드트랙이 나오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어요. 인물들은 희노애락을 분명히 얼굴에 띄우고 소리를 지르거나 무거운 톤으로 대사를 던집니다. 선악은 뚜렷하게 나뉘고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악역인 아성은 뻔뻔한 짓으로 차곡차곡 동기를 적립합니다. 오우삼이 설정한 감정의 한계는 평균보다 훨씬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피로감을 거의 주지 않습니다. 감정의 고조가 파도치고 인물들은 울고 웃는데 매 장면이 격한 떨림을 주죠. 각 인물들의 희비가 차례차례 나열되는 구조와, 음악이나 연기가 어떤 설득력을 부여했을 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건 이 영화가 뭔가를 숨기거나 억누르며 감정을 세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우직함이 이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는 어떤 일관성을 만들고 진실성을 갖추게 하죠. 이들의 상황은 너무나 허구적이고 극적입니다. 그런데도 매순간 어쩔 수 없이 눈물과 절규에 감복하게 됩니다. 액션씬들 또한 비장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두에서의 싸움은 그 모든 감정을 완전연소시킬 정도의 화력을 뿜습니다.
독특하게도 이 영화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그 방점은 한 사람으로서의 성장에 찍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물쭈물하는 아걸을 마크는 꾸짖습니다. 여기서 마크는 형제의 도리나 아호의 개심을 이유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너는 왜 형을 용서할 용기가 없지?”라며 아걸의 나약함을 꼬집죠. 이 모든 비극은 상대방이 나빠서, 혹은 자신이 냉정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없어서, 즉 스스로가 비겁하기 때문이지요. 영화는 정에 호소해오다가도 마지막은 내면의 단련을 이야기합니다. 선한 사람, 따뜻한 사람, 의리 있는 사람, 이 모든 도의를 이루는 길은 바로 강해지는 것이죠.
“형제란…” 그 순간 마크의 머리를 총탄이 꿰뚫고 지나갑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형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걸의 얼굴에는 마크에게서 튄 진한 피가 흘러내립니다. 마지막까지도 마크는 총을 놓지 않고 잔당들을 쓰러트리며 최후의 불씨를 태웁니다. 도망치던 아성은 세간의 법도를 초월한 형제의 총에 고꾸라지고 말죠. 아호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의가 죄와 만나고, 벌이 벌을 부르며, 죄로 끊긴 연은 죄로 묶여 다시 도를 좇습니다.
우리는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남을 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죠. 약속은 지켜져야 하고, 그 누구든 존중하며 살아야합니다. 오우삼은 이 작품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멋있으니까!! 그리고 중요한 건, 그 모든 진실과 윤리마저도 아름다움의 재료가 되고 마는 이 영화의 미적 성취에 있습니다. 영화의 알맹이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총탄으로 휘갈기고 핏방울로 화룡점정을 찍는 이 영화의 방법론이야말로 영상예술만이 도달할 수 있는 특별한 지점에 맞닿아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보는 이가 취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독하고 감미로운 영화입니다.
@ 재미난 트리비아가 가득하군요.
@ 이 영화를 주윤발의 영화라 부르는 건 좋습니다. 이 영화는 주윤발의 영화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를 주윤발의 영화라고 하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검지를 세우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적룡입니다!!
@ 영화 초반에 마크가 “그 다음에는 총 네 정을 겨누더군.” 이라고 하는거, 유머 맞죠?
@ 그래도 전 세 번밖에 안 울었습니다. 주차장에서 아호가 마크와 재회할때는 도대체가 참을 수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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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번은 본 것 같습니다.
(3번쯤 보았을때 알았습니다. 오우삼 감독이 배우로 출연했다는 사실을...)
그 스타일리쉬함과 남자들의 의리를 잘 버무려서 저의 마음에 각인을 시켜줬죠. 또한 장국영이 얼굴만 잘생긴게 아니라 연기도 무지 잘한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죠( 마지막에 적룡에게 총을 건낼때 그 눈빛이란...)
영웅본색을 본 후 한참뒤에 말로만 듣던 샘 페킨파 감독의 와일드번치를 보았습니다.(오우삼이 항상 존경한다고 표현하는 감독이죠) 오우삼 감독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준 것에 틀림없고 오히려 표절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마지막 전투 장면은 영화 역사상에 길이 남을 명장면입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진짜 너무 올드하고 감정과잉에 남자의 우정 의리 어쩌구...그리고 미화되는 조폭들...그럼에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됩니다...오우삼의 비장미 넘치는 연출과 윤발따거의 초절정간지...유치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유치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좔좔 흐르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위대한 영화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