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열자마자 참지못하고 한숨이 터져나온다.
오 주여, 신이시여. 정녕 이것이 내가 입고다녔던 옷들이란 말입니까?
어떻게 쥐눈꼽만큼도 패션 센스가 없었는지 궁금하다.
내 옷장, 그것은 컬러풀란 레인보우의 향연.
도대체 이딴 옷들을 사는데 그렇게 돈은 왜 썼던 걸까.
고심끝에 나는 무난하게 청바지에 흰색 맨투맨을 집어들었다.
이 기본적인 조합을 뛰어넘는, 입을만한 옷의 조합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으아 바지통은 또 왜이렇게 커?]
츄리닝 못지 않게 아주 넉넉하고 편하다.
갑자기 십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버리니 과거의 패션에 적응을 못하겠다.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에 모습을 비춰 꼼꼼히 스스로를 점검한다.
[키득키득]
한 없이 우스꽝스러운 차림이었지만, 왠지 싫지 않다.
뭔가 조금은 그리웠고, 직접 다시 보니 유쾌했다.
후우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번드르르한 겉차림이 아니다.
내가 오늘 다시 만날 그녀에겐 이런 촌스럽고, 우스꽝스런 모습은 중요하지 않을테니까.
2.
[후우우웁. 하]
다시금 이 공기를 맡게 될 줄이야.
물론 타임슬립하게 된 것 자체가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분위기, 공기를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감동적이다.
마치 마음까지 20살로 돌아간 것 처럼 두근거리고 기대로 가슴이 벅처오른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역동적인 젊음이 이 캠퍼스 안에 느껴지고 있다.
신입생들은 각 자의 부푼 기대를 안고,
또 어떤 선배는 새로 들어올 신입생들을 기대하며.
물론 아직 정식 개강이 아닌 입학식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건 신입생들 쪽이 압도적이다.
한껏 다시금 캠퍼스의 낭만(뭐 쥐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을 느끼며 브리딩!
[후우우웁. 하!]
- 저... 저기
응? 이 목소리는 설마?
맑고 고운 목소리.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그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윽고 그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에, 올망졸망 크지만 쌍꺼풀없는 눈을 가진 그녀가 시야에 들어온다.
진짜 저 크지만, 쌍꺼풀 없는 눈은 다시봐도 치명적이다. 심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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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깃 감지
이름 : 현은하
타입 : 순수함, 사랑스러움
감정 상태 : 기대, 걱정
좋아하는 남성 타입 : ???
호감도 : ???
뭐? 이, 이게 뭐야?
은하. 내 과거의 기억 한 켠에 단단히 자리잡은 그녀와 다시 마주하자마자
요란한 홀로그램 같은 것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 저어..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셨으면 사과드릴게요! [아... 네?]
순간 당황해버려서 굳어버린 내 모습을 오해했는지 은하는 울듯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푹 숙였다.
고대하던 첫만남의 순간이 이래서야. (야레야
[아니에요. 기분 하나도 안 나빴어요.]
이렇게 예쁜 사람이 말걸길래 다단곈줄 알았잖아요. 라는 말도 안 되는 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20살이라는 걸 명심하자.
게다가 내 기억을 되짚어보면 분명 은하는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에 웃기보다는 굉장히 당황할 것이다.
사실 그 당황해서 정신 없어진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인 아이라서, 일부러 놀려보고도 싶었지만 일단은 꾹 참는다.
[그리고 저도 신입생이거든요? 아마... 신입생 맞죠?]
- 아... 예. 근데 제가 신입생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은하야. 티나 임마.
설령 내가 은하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은하의 어리벙벙한 분위기라던가 차림새를 보면
누구라도 그녀가 신입생인 것을 눈치챌 것이다.
[음.. 글쎄요. 그냥 느낌이랄까? 느낌이 딱! 왔어요. 키득키득]
- 우와. 대단해요.
뭘 대단한 걸 했다고 저렇게 눈을 반짝반짝 빛낼까.
순수하고 순진했던 20살의 은하.
본인만 빼고 남들이 다 아는 걸, 이런 식으로 툭 던져주면 저렇게 귀여운 표정을 짓는단 말이지.
[그런데 왜요?]
- 아앗. 맞아. 그게 저 입학식 가려는데, 길을 몰라서요.
은하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은하야! 이렇게 넓은 대학에서, 입학식 장소 쯤은 몰라도 된다고.
사실은 나도 잘 몰라서 헤맸었다.
뭔 놈의 대학교가 쓸데 없이 크기만 한지. 신입생땐 대학이 크다고 좋아했던 내가 아주 철없는 바보였다.
[음. 같은 신입생인데 말 편하게해도 될까요?]
은하같이 은근히 예의를 차리고 중요시하는 타입에게는 지나치게 친한 척 하며 서스럼 없이 다가가기 보다는
정중한 권유로 말을 놓고 서서히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게 중요하다.
- 아. 그래도... 돼요?
[응.]
같은 신입생이라는 동질감이 알게 모르게 그녀와 나의 거리를 좁힌다.
사실 후배에게도 말을 편하게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걸렸던 그녀로서는 만나자마자 말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 어쩌면 내가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같이 가자. 이 학교 내가 꽤 잘 알거든.] 씨익.
3.
곧 봄을 앞둔 시점이지만, 날씨는 쌀쌀한, 그렇지만 또 햇볕은 나름 쨍쨍한 2월의 끝 날.
내 파릇한 청춘기의 시작점에 추억으로 남았던 그녀와 다시금 나란히 학교를 거닐고 있다.
그녀와 함께 학교 거리를 누비니 새록새록 과거의 기억이 수면위로 떠오른다.
사실 어쩌면 은하에게 '원래의 나'는 기억될만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서만 유독 그녀를 기억하고, 마음 한 켠에 담아뒀을 가능성이 꽤 높을지도 모른다.
사실 원래의 내가 은하를 처음 만났던 건, 이렇게 학교 앞이 아니라 입학식이 진행중인 학교 실내 체육관 안에서였다.
그녀는 바로 내 앞. 나는 바로 그녀 뒤.
앞 모습은 제대로 보지 못했었지만, 얼핏 느껴지는 샴푸냄새와 잘 정돈되어 말끔한 머릿결이 아주 조금 날 콩닥이게 했었다.
그때부터 꽤 눈여겨 봤는데, 숫기도 용기도 자신감도 모두 없던 나는 그냥 은하를 지켜보기만 했다.
새터(2박3일 짜리OT)에서 같은 조가 되었어도, 함께 전공과목 팀과제를 했어도.
뭐 한 번 나서서 제대로 말을 걸어보고, 밥 한 번 먹어보자고 말도 해본적 없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은하는 복학생 선배 중 한 명이 낚아채 가버렸고, 그러면서 점차 은하는 내 기억에서
잊혀져 갔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한 그녀의 모습이 한 가지 남아있다.
- 아! 저기... [차현민! 현민이라고 불러 그냥.]
- 아 응. 현민아 저기...
그녀는 날 불러놓고는 둘러맨 백팩을 낑낑거리며 앞으로 가져와 앞주머니를 뒤적였다.
이거다. 조금은 유치하지만, 한 때의 내 기억 속에 천사같던 모습.
- 초콜릿... 먹을래?
은하는 초콜릿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언제는 그녀는 초콜릿을 가지고 다녔다. 물론 자기가 먹는 것보다 나눠주는 게 더 많았었지만.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보지 못한, 친해게 어울려 본 적조차 없는 내게 은하는 항상 웃으며
작은 초콜릿을 몇 개씩 주곤 했다.
은하가 주던 초콜릿은 살면서 먹었던 그 어떤 초콜릿보다 달콤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응. 줘. 나 초콜릿 꽤 좋아하거든]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기는 싫어서 어느 정도 표정을 감추고 싶었는데,
그녀에게 초콜릿을 건네받는 내 표정은 거울을 안 봐도 보이는 것만 같다.
아, 초콜릿 진짜 달다. 진짜 맛있어.
3에 계속...
6편 안에 은하편을 끝내는 게 목표입니다. 방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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