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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2/28 19:28:21
Name 王天君
File #1 kumiko.jpg (178.8 KB), Download : 58
Subject [일반] [스포]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 보고 왔습니다.


해변을 거닐던 쿠미코는 총총걸음으로 뭔가를 찾습니다. 지도를 살펴보던 쿠미코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돌을 발견하죠. 그 돌을 드니 비디오 테이프가 하나 있습니다. 그 비디오는 코엔 형제의 <파고>였습니다. 쿠미코는 홀린 듯 이 영화를 몇십번이고 봅니다. 저 눈 밭에 정말 돈가방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직장에서, 엄마한테서, 친구한테서 오로지 팍팍한 현실만 느끼는 쿠미코에게 이 비디오는 하나의 경전과도 같습니다.

영화는 맨 처음 화면에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영문 자막을 띄웁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카메라 앞의 쿠미코를 전제한 장면이겠죠. 동시에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라는 영화의 시작을 알리기도 하는 중의적 장면입니다. 이 장면 하나로 영화 속 현실과 허구, 영화를 포함한 바깥 현실과 허구가 섞입니다. 쿠미코는 저 문장 하나 때문에 영화 <파고>가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관객은 “실화”라고 주장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쿠미코와 같은위치에 놓이게 되죠. 영화는 쿠미코가 돈가방을 찾아내는 엔딩을 보여주며 관객 모두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냐고요.

영화를 보다보면 말도 안돼, 라고 단언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뤄질 리가 없는, 실재할 리가 없는 무언가를 바라는 걸 우리는 “꿈”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꿈을 꾸며 살아가야 한다고 세상은 늘 떠들어댑니다. 정작 나이 먹고 현실에 자리잡은 후에는 생활의 유지가 전부가 됩니다. 취직, 애인, 결혼, 승진 등 남들 다 하고, 그래야 할 것 같은 “조건”이 삶의 목적이 되지요. 쿠미코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우리가 쿠미코의 꿈을 부정하는순간 영화 속 지리멸렬한 인간들과 다를 게 없어집니다. 회사는? 애인은? 결혼은? 아이는? 쿠미코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할 수 없다는 걸 영화 바깥의 사람들은 알고 있지요. 중요한 것은 행복입니다. 쿠미코는 행복하고 싶고, 악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행할 뿐입니다. 녹록치 않은 현실에 적응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쿠미코의 꿈에 훈계를 늘어놓아야 할까요? 그게 과연 어른의 지혜일련지요.

그렇다고 영화는 꿈꾸는 사람들을 격려하지 않습니다. 간빳데 구다사이!! 라며 희망을 심어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쿠미코는 한심한 인간입니다. 쿠미코의 현실을 떠나서, 그가 꿈을 쫓는 과정이 딱 그렇죠. 쿠미코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지도를 사면 될것을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다 걸리고, 법인 카드를 훔쳐오고, 미국에서도 경찰관과 택시 기사에게 민폐만 끼칩니다. 절도와 도주의 연속이죠. 심지어 키우던 토끼도 지하철에 내려놓고 버려버립니다. 쿠미코는 무책임하기까지 해요. 쿠미코가 꿈에 다다르는 과정은 옳거나 성실한 게 아닙니다. 쿠미코의 꿈은 소망보다는 망상입니다.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현재도피형에 가깝죠. 쿠미코는 무언가를 추구하는게 아니라 무언가가 싫어서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인, 나약한 사람입니다. 이 영화에는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고전적 메시지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답답해 보일 정도의 고집만 있죠.

그래서 이 영화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선과 악을 떠나 그저 엉뚱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되는 거죠. 중반까지가 쿠미코를 둘러싼 부조리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후부터는 쿠미코의 모험 자체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계속 넘나들어요. 쿠미코는 막무가내로 미국행 티켓을 끊어서 파고가 있는 지역으로 갑니다. 그렇지만 영어도 못하고, 아무 정보도 없는 일본인 여자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영화는 동화처럼 따뜻해집니다. 본 적도 없는 쿠미코를 어느 미국인 아주머니,경찰관이 친절하게 도와주죠.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타인들은 더 친절합니다. 이들은 최소한 쿠미코를 이해하려 애씁니다. 멀면 멀어질수록 더 이해하려고 하는 관계의 역설이 생기는거죠. 동시에 이들은 쿠미코에게 난관이 됩니다. 주인공의 여행을 방해하는 동화 속 인물들처럼 이들은 달콤하게, 때로는 이성적으로 속삭이죠. 이 추운 날에 파고를 왜 가느냐, 나랑 같이 다른 곳이나 가자, 그 영화는 실화가 아니에요 등등. 이들의 말은 사리에 맞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이들은 쿠미코가 겪어야 했던 일본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쿠미코가 파고에 가기 위해 탄 택시의 기사는 하필 귀머거리입니다. 쿠미코는 불친절한 이들, 친절한 이들 모두를 겪지만 이들은 현실을 가르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똑똑한 것도 친절한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거죠. 남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귀머거리 기사는 쿠미코와  닮아있습니다.

마침내 그 곳에 오자 쿠미코는 택시비를 떼먹고 도망갑니다. 쿠미코는 혼자가 되죠. 쿠미코는 일본에서 소외당하고,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에 왔지만 쿠미코가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관계 속에서 억압당하고, 자유롭지 못하던 인간이 자기 자신과 꿈만을 두고 다른 모든 거추장스러운 걸 치워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쿠미코의 이야기는 외로웠던 인간이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철없고 대책없지만 맹랑하고 의젓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에요. 토끼를 지하철에 버리는 쿠미코처럼, 이야기는 쿠미코를 그렇게 머나먼 곳으로 흘려보냅니다. 관계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외로움의 매혹이 이 영화에는 있습니다. (성장이 아닙니다. 원래 그랬던 인간이 본질을 회복하는 거죠)

망상이건 어쩌건, 쿠미코는 고난을 헤치고 꿈을 찾아가는 구도자가 됩니다.밤이 되자 죽음과도 같은 눈보라가 덮치고 영화는 호러 수준으로 쿠미코의 시련을 끌어올립니다. 매섭고, 사납고, 이상한 소리가 쿠미코를 따라다닙니다. 이대로 가다간 죽을 지도 모릅니다.

아침이 되고 평화로운 햇살이 비치자 동그랗게 쌓인 눈 속에서 쿠미코가 깨어납니다. 쿠미코는 영화 <파고>의 그곳에 정확히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정말로 <파고>의 캐릭터가 표시해놓은 대로 빨간 눈긁개가 꽂혀있습니다. 그곳을 파헤치자 검은 색 돈가방이 나타나고, 그 안에는 달러가 가득합니다. 쿠미코는 활짝 웃습니다. 옆에서는 이전에 버린 토끼가 있습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라는 표정으로 쿠미코는 가방과 토끼를 안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파고에서 눈보라 몰아치던 밤과 이 마지막 장면은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봐도 믿기 어렵고, 일어날 법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영화는 비현실의 증거가 가득합니다. 영화 <파고>의 흔적이 존재할 리도 없고 일본에서 버린 토끼가 미국까지, 그것도 파고까지 와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새하얀 설원 위로 쿠미코가 남기는 발자국을 보면 저 장면은 쿠미코의 현실이라기 보다는 죽고 난 다음 꾸는 꿈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엔딩을 환상이라 속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침내 눈가방을 찾아내는 장면은 서로의 틈새를 침범하던 허구와 현실이 마침내 조우하여 가장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가짜일 수 밖에 없는 공상이, 진실을 압도하고, 보는 이의 의심과 회의를 천진하게 뒤흔드는 승리의 사인을 내밀고 있지요.

얼핏 보면 동정을 바라는 것 같지만 영화 자체에는 전혀 연민이 없습니다. 그저 시시하고 못난 인간이 막무가내로 떠나는 여정이고 보다보면 오히려 깝깝하거나 황당할 거에요. 그렇지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외로움은 가짜가 아닙니다. 쿠미코의 모험은 우리 모두가 한번씩 꿈꿔오던 낭만이기도 하지요. 홧김에라도 저질러버리고 싶은 모험을 저리도 용감하게 해주는 쿠미코를 비웃을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이상해서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이 영화 역시 그런 기묘한 유혹을 담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실화라니 속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빨간 모자를 쓰고, 토끼를 쫓아 이상한 나라를 탐험하는, 소녀는 아니지만 소녀처럼 구는 여자는 결국 행복해졌다고 전 믿겠습니다.

@ 전 <파고>도 보지 않았고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화도 나중에 접했습니다. 그 덕에 이 영화를 더 아름답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혹시 이 영화를 보실 분들도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관련정보들을 찾아보시길.

@ 이 영화가 쓰디쓴 비극이라는 해석 역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 이 영화를 보면서 RPG 게임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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