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스펙남의 유쾌발랄한 인생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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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스펙남의 유쾌발랄한 인생사 -2- ( 이건 바로 밑의 하단을 보셔도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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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컨디션이 좋네요. 전날 잠이 안와서 새벽 3시 넘어서 잤던 게 타격이 컸습니다.
어떻게 3편까지 왔는데 4~5편에서 최대한 마무리 해볼려고 합니다. 사실 2편에서 말하고 싶었던 게 많지만 .. 굳이 꼭 안 넣어도
될 부분은 최대한 생략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무리 할 때 말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부분을 양념식으로 추가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다단계에 대한 부분은.. 사실 오래된 경험이라 까먹은 게 너무 많습니다.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적을꼐요... 흑흑
그리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는 pgr러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리며 3편을 시작하겠습니다.
(P.S : 역시 글을 적는 건 아무나 적는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표현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실제로 그걸 적는 건 참... 흐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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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들어간 건물은 제법 큰 건물이었다. 밑엔 교회가 있었고 3층에서 5층까지 다 그 회사 소유였다. 그 당시 회사 이름은 '휴에버' 였다.
지금은 뭘로 바꿨는지... 들어가니 정말 처음 보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각 테이블에서 나같이 끌려온 사람들을 열심히 설득하는 다단계원과 한쪽에서 직접 싸온 도시락을 까먹는 다단계원... 그리고 큰 강당 같은 곳에서 마스터라는 사람이 열심히 강의할 때 양 팔을 벌리며 환호하는
사람들.. 그렇게 별 생각없이 이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거부감도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게 순차적으로 진행됬다. 대출을 했다. 아는 형의 선임되는 사람이랑 같이 갔다. 전라도 사람이었는데 말을 참 잘했던 사람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스타일? 그렇게 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세븐론이라는 대충중개업체에 갔다. 2곳의 저축은행에서 총 800만원을 대출했다.
그리고 잠실에 있는 아울렛에 가서 싸구려 정장을 맞췄다. 역시 싸구려는 싸구려였다.. 그래도 그 땐 나름 좋았다. 정장을 입은 것만으로도
내가 이 사회에서 뭔가 좀 되는 사람이라고 느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질없었지만 말이지.
그렇게 난 승진을 하게 되고 강당에 모여있는 사람들 앞에서 난 성공할 거라고 크게 외쳤다. 사람들이 손이 부서지도록 박수를 쳐줬다.
그 기운을 받아 난 성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닥쳐왔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니. 단체생활에 좁디좁은 방에서
10명이 넘게 살았다. 잘 떄 따닥따닥 붙어서 잤다. 무슨 고시원에서 사는 줄 알았다.
제일 윗사람이 포항 출신 여자 사람이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눈에서 나오는 독기가 보통이 아니었고 나를 특히 싫어해서 내가 뭐만
하면 잔소리 폭풍이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떄 싸이코 선임 중의 한명도 포항 사람이었는데 난 포항이랑은 뭔가 악연이 있는 것 같았다.
뭐.. 그 사람을 떠나선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난 것 같다. 대부분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었지만 간혹 서울 사람도 있었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런 인연만 아니었으면 평생 인연이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다.
그리고 식사는 공통으로 돈을 거둬서 직급이 좀 있는 사람이 장을 본 후 요리해서 먹는다. 심할 땐 옥수수 통조림에 참치를 넣고 밥을 비벼서
사람들이 둘러앉아 먹었던 기억이 났다. 다행인 건 같이 있는 룸메이트 중에 요리 실력이 좋은 사람이 있어서 그 분 덕을 좀 많이 봤다.
덕분에 쫄쫄 굶거나 하진 않았지만 간식 구경이 참 하기 힘들었다. 당연할 수 밖에.. 다들 빛에 시달리는 처지라 100원 1000원이 아까운 상황
인데 누가 간식을 마음껏 사먹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일로 돌아가면.. 아침이 되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내 휴대폰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추려서 전화로 영업하란다.
하루에 10통씩 채우란다. 10통씩 다 채우고 어떤 식으로 전화했는지 보고서 형태로 제출하고 상담도 해야 된다. 죽을 맛이었다.
이후 pc방에 가 업무라는 걸 한다. 그 업무는 내 싸이월드 목록에 있는 지인들 연락처를 알아내서 전화하는 것, 그리고 군대를 갓 제대한
사람들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취미 등을 통해서 낯선 사람에게 쪽지를 보내 관계를 트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마스터라는 상위 직급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강연을 한다. 강연이래봤자.. 뭐 일종의 자기개발서 같은 소리를 주구장창
하거나 영업을 어떻게 하는지.. 참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일정이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오후 6시에 퇴근할 때까지 엄청 타이트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퇴근 후 간단히 씻고 저녁에도 일을 한다. 그 떄는 근처 공원에 가서 전화로 영업하는 거지.. 지인들에게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메뉴얼로 나와있었다. 심지어 부모님에게 전화할 때도 말이지.. 그떄는 직급이 있는 사람이 옆에서 같이 들어주다가 특정한
상황이 생길 때 이런 식으로 멘트를 하라고 한다. 순간의 위험을 잘 넘어갈 수 있게.. 하지만 순리에 맞지 않는 건 한계가 오는 법. 이때까지
내가 뭘 해도 아무 터치를 하지 않았던 형이 처음으로 내게 화를 낸다. 너 거기서 뭐 하는 거냐고..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결국 4개월 동안이나 송파에서 버텼다. 부모님의 압박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끌려오는 심정으로 내려왔다. 800만원의 빛만 남긴 채 말이지..
허나 난 겁이 나서 대출 예기를 일체 하지 않고 지넀다. 조금이라도 연체가 되면 전화가 걸려온다.. 차가운 목소리로 돈을 독촉하는 여자
의 목소리가 너무나 소름끼쳤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지만 숨을 곳도 없었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는 예전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지옥이었다. 이럴 거면 내가 왜 서울에 갔을까 하는 후회가 됬다. 눈물이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피 뿐이었다. 피시방에서 거의 살았다. 대출 독촉 전화라는 공포에 시달리며.. 그러다 결국 대출내역서를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를 칼로 찌를려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안 그랬으면 난 차가운 시체가 되서 뉴스에 나왔을 것이다.
그 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냈다. 당신이 대체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냐고.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냐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적반하장이었지만 아버지에게 쌓였던 증오심과 분노, 참고 살아야만 했던 내 인생이 너무 서러워 터진 거였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그 일을 계기로 우리 집안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도 예전보단 술을 좀 줄이셨다. 돈을 일단 부모님이 갚아주기로 하고 내가
차차 갚기로 했다. 마침 근처에 있는 백화점 직원식당에서 사람을 구하길래 3개월 간 일했다. 이후 학교를 2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백화점
알바로 6개월 간 일한다. 이때 내 마음이 많이 안정됬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는 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없이 살았다. 하지만 내 마음이 평안을
되 찾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좋았다.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됬건 말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 중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는 아저씨가 있는데 이 시기에 만나게 됬다.
인생 참 열심히 사는 아저씨다. 낮에는 직원식당에서 밥 짓고 요리를 거들어 주는 쪽으로 일하고 밤에는 신문배달을 하는 아저씨였다.
당시 나이가 38이었는데 아들이 고등학생이었다. 하루에 잠을 4시간 주무신단다. 그래서 휴식시간이 될 때마다 밥을 후다닥 드시고 바로 주무시러 가셨다. 주무실 떄만큼은.. 누가 건드려도 미동이 없었다. 그 아저씨를 볼 때마다 언제나 짠헀다.
그 아저씨가 날 볼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니가 참 착해서 좋다" 고 하신다. 지금도 말이다. 이 떄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느꼈다.
자존감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궁창인 인생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백화점을 그만둔 후 학교도 졸업했다. 학점은 개판인 채로.. 4.5만점 기준으로 2.8이었던가? 학교에서 기억이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긴..
뭘 해야 기억에 남던가 하지.. 그렇게 난 대책없이 농림직 공무원 준비한다고 3개월 간 띵가띵가하며 시간을 보낸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도서관 가는 습관만 생겼지.. 부모님이 좋게 볼 리 없었다. 공부머리라곤 없는 놈이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인가.
결국 이모부가 하는 바둑학원에 날 강제로 밀어넣었다. 마침 이모부가 바둑학원 사업에 성공해서 그 기술을 친척들에게 전수해주고
싶다 하셨다. 우리 부모님이 이모부가 힘들 때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고 싶다 하셨다.
하지만 난 사업의 사자도 몰랐기 때문에 거부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날 강제로 밀어넣었다. 당장 해라면서.
난 힘이 없었다. 형은 대학 졸업하자 마자 반듯하게 대기업에 들어가 일하는데 난 뭐 하나 남은게 하나도 없는 백수에 불과했기 떄문에다.
하지만 머리쓰는 게 안됬던 내가 잘 할리가 없었다. 당연히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거기서 열심히 했던건 바둑 하나뿐? 그렇다고 바둑을
이모부가 가르쳐 준 건 아니었다. 내가 기원을 돌아다니다가 기원 원장을 잘 잡아서 3개월간 타이트하게 배웠다. 그 때 타이젬 4급까지 갔다.
애들 가르칠 정도는 됬다. 하지만 이모부가 뭘 가르쳐 준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나보고 열심히 책 읽으랜다. 그래서 읽었다. 하지만 엉뚱한 책만 열심히 읽었다. 사회문제에 관련한 책들로 말이다. 결국 이모부가 날
호되게 혼냈다. 난 그앞에서 주저앉아 울었다. 강철같았던 이모부는 당연히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여기서도 난 쓰레기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 곳에서 1년 7개월이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일도 재미가 없었다.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다행인 건 이모부가 내가 학원에 나오는 수만큼 차비를 챙겨줘서 부모님에게 따로 용돈을 받지 않
아도 된다는 것 뿐? 부산-남마산까지 왔다갔다 했기 떄문에 차비가 제법 많이 나왔다. 그걸 내 자비로 부담하지 않는 것이니.. 지금 생각하면
이모부에게 참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 은혜를 배신으로 갚았다.
결국 이모부에게 나오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모부가 우리 집까지 쫒아와서 나를 호통치고 넌 그러면 실패한다.. 쓰레기 된다.. 다시 와라
하셨다. 하지만 내 결심은 이미 굳어있었다. 온 몸으로 거부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로 바둑학원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내 혼자서 어떻게 해보겠다고.. 국비지원으로 캐드를 배워서 캐드회사에 취직했지만 2개월만에 권고사직으로 짤렸다. 사수였던
대리가 넌 이 일이랑은 좀 안 맞는 것 같다고 다른 일을 알아보라 했다. 뭐.. 별생각 없었던 나는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마침 롯데마트에서
드림사원을 뽑길래 지원했다. 그리고 창원 부근에 지점에서 조리식품담당으로 3개월 간 일했다.
그런데 ... 다른 건 다 버틸 수 있었지만.. 선임들과 기숙생활을 하는 것, 15~17시간씩 일 하는 것 ( 점장이 매출 안 나온다고 퇴근을 안 시켜
주더라.. ) , 특히 직속 선임이었던 사림이 너무나 무책임 했던 게 날 버틸수가 없게 만들었다. 자기 윗선임이었던 사람이
일을 안 가르쳐 주는 스타일이라 그걸 그대로 닮은 거라고 주변 선임들이 말해주더라. ( 다른 부서 선배들도 그 직속 선임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깐... ) 점점 내 능력 밖의 일이 많이 터졌다. 부족한 수면시간에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으니 피부는 썩을 대로 썩어가고 멘탈도
붕괴되고 있었다. (가뜩이나 아토피가 있는데 말이지.. ) 손도 빠르지 않던 난 일을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 그리고 한달 월급이 140 정도였다... )
주변에서 난 센스없는 놈으로 찍혀있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퇴사하게 된 계기는... 전체 회의 중 실장급 이상 회의가 있었는데
내 사수가 나오지 않아서 내가 나왔다. 주변 선임들이 날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뭘 어떻게 말하라 말인가. 지금 하는 일도 벅차 죽겠는데..
점장이 비웃듯이 내보고 무슨 말이든지 말해보란다.. 그때 난 무슨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그냥 어찌어찌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창원을 떠났다. 아버지는 날 한심한 새끼라고 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나에게 남은 건 전문대 졸업/운전면허 1종보통/
정보기기운용기능사/ 정보처리기능사/ 종자기능사/워드프로세서 2급 자격증. 이게 끝이었다. ( 지금 현재도 똑같습니다... 크크 )
그외의 스펙이란 스펙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게으르고 의지박약인 걸 누구한테 탓하겠는가.. 하지만 서러운 마음은..떠나질 않았다. 평생
시달리기만 했던 운명에서 결국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그저 아무 조건없이 사랑을 받고 싶었는데 사랑을 받는다는 게 나에겐
사치에 불과했었던 걸 뿐이었을까. 내가 전생에 친일파로 태어나서 그 죗값을 치르는건지. 난 남들에게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난 왜이렇게
멸시받고 고통받으며 살아야 될 운명일까 생각했다. 결국 내게 남은 건 결국 자살뿐이라 생각했다.
이 시기에 형이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마침 형수 아는 사람이 호주에서 일을 하는데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 번 가보라고. 난 거부했다.
how are you 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내가 가서 뭘 어떻게 해라는 말인가 하고. 하지만 형이 거의 반 강제로 밀어붙였다. 가서 바로 돌아오든지 버티던지 일단 가보라고.당연히 내겐 거부할 권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집안의 쓰레기에 불과한 존재가 무슨 힘이 있어서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 뭐 거기다 거긴 한인식당이라 영어가 크게 필요없다나? )
아참. 그러고보니 그 때 형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 난 집안의 장남이여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지 못했다. 너만이라도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한다" 고.. 사실 강압보단 그 말이 날 결정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결국 난 워킹비자를 발급받아 호주에 있는 퍼스라는 동네로 가게 된다. 그리고 이 퍼스라는 동네에서 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