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은 막부 말에도 심심하면 나오는 거였습니다. 특히 서양의 침략이 진행되면서 일본의 국력을 길러야 된다는 인식과 함께 했죠. 국학이나 미토학에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존왕양이를 외칠 때도 당연히 끼었구요. 존왕을 하려면 덴노의 위업을 널리 퍼뜨려야 되니 해외로 힘을 뻗어야 했고, 양이를 하려면 맞서기 위해 힘을 모아야 되니 역시 우리가 먼저 다른 데를 먹자... 이런 식이었죠. 이전에 한반도는 우리 속국이었다(임나일본부설)는 명분도 넣었죠. 뭐 저번 편에서 얘기했듯 이들 사이에서도 참 많은 이견이 있었구요. 사람마다도 다릅니다.
가령 사토 노부히로(1769~1850) 같은 경우는 젊었을 때는 견제의 대상을 서양은 물론 중국에도 확대했습니다. 하지만 아편전쟁이 벌어진 말년에는 그래도 영국이 나쁜놈이라면서 중국과 힘을 합쳐야 된다고 생각했죠. 문제의 조선은 거기에 딸린 거일 뿐이었습니다. 중국의 속국이니 중국이 적이라면 우리가 먹어야 되고 (대만, 류큐, 필리핀 등도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중국이 동맹이라면 그냥 깨끗하게 무시 -_-; 이런 식이었습니다.
유신지사들을 길러냈고 지금도 우익의 정신적 지주라 할만한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제대로 주장했죠. 그에게서 배우고 이걸 실현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
료마의 스승인 카츠 카이슈 같은 경우는 아시아 연대를 주장하다가 정한론으로 입장을 바꾸고, 나중엔 다시 청일전쟁 및 조선합병을 반대합니다.
개항 이후로 가면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명하죠. 일본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조선 내의 급진 개화파들을 지원했고, 사상적으로도 큰 영향을 줍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갑신정변이죠. 아예 후쿠자와가 이 모든 걸 계획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는 부정합니다만)
이 때까지는 동양 다른 나라도 일본처럼 근대화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행해진 연좌제에 분노합니다. 조선은 답이 없다, 동양은 답이 없다, 일본은 아시아를 나와 유럽으로 가야 한다, 탈아론이 나온 것이 그 직후입니다. 답이 없는데 조선인들이 불쌍하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일본이 근대화 시켜줘야죠.
일단 표면상으로는 이렇다 합니다. 그냥 흉계인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다 바뀐 건지는 생각해볼 일이죠.
일본의 메이지 유신, 조선과 청에서는 이게 참 크게 다가옵니다. 특히 젊은 개화파들에게 말이죠. (유신지사들도 참 젊죠) 개항 후 두 나라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 가기도 했습니다. 쑨원도 유신을 높게 평가하며 많은 것을 배우려고 했죠. 김옥균처럼 일본에 기댄 이들도 많았구요. 참 위험한 공존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조선과 중국을 먹으려는 움직임과 두 나라를 깨워서 공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두 나라에서도 일본에 기대면서 배우려는 것과 경계하려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계하더라도 그나마 익숙하니 일본에서 배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도 했죠. 그들이 받은 근대 사상은 어지간하면 일본에서 한 차례 가공되거나 만들어진 거였습니다.
이러니 급진개화파가 얼마든지 친일파로 돌변할 수 있었던 것이죠. 부와 명예만이 아니라 정말 조선에 답이 없으니 일본에 맡겨야 된다, 맡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포기하면 되니까요. 민족주의 쪽에서도 이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들구요. 동양에서 근대적인 민족주의를 시작한 게 일본이었으니... 독립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인기있었던 정치인이 히총통이었는데요 뭐. 3.1 운동으로 민중의 힘을 알게 됐지만 엘리트주의는 그 이후에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는 아니지만 이런 엘리트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한국의 유명한 대통령도 있죠.
+)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동맹국으로든 식민지로든 진심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원한 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아니 이런 경우가 더 무섭죠. 이건 침략이 아니라 진심으로 너희들을 위한 거라 생각할 테니까요.
메이지 유신, 자체로만 보면 긍정적인 부분도 많고 배울 점도 많습니다. 일단 어느 쪽이든 서양 문물의 도입 자체를 거부하진 않았고,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적에게 당하지 않게 힘을 기른다... 이 부분에선 모두 의견이 맞은 것이죠. 미국이 남북전쟁 덕분에 일본을 제대로 신경쓸 수 없었다는 운도 따랐구요. 그 사이에 갈등을 해결하고 빠른 근대화를 이룩합니다.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선하는데 수십년간 힘 썼고, 성공합니다. 결정적인 건 전쟁을 통해서였지만요 -_-; 신분제 철폐, 의무교육 및 징병제, 사회간접자본 확충... 뭐 이런 식으로 근대화의 길을 빠르게 걸어갔죠. 문제점은 컸습니다만 이건 다른 열강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구요. 나찌 독일을 깐다고 해서 비스마르크의 개혁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쌓인 힘을 외부로 돌리고, 내부의 모순도 억누르기만 했다는 것. 류큐, 대만, 조선을 먹어가면서 욕심만 커지고 폭주해버린 것, 뭐 이런 것들이겠죠. 거기다 그들이 침략한 곳은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공존할 나라들이었구요.
대한제국이 일본처럼 근대화, 부국강병에 성공했다면 일본과 같은 길을 걸었을까.... 전 그랬을거라 생각합니다. 간단히 간도 문제만 해도 이거 제국주의 방식이죠. 그것도 나라가 망해가는 가운데서도 청나라 힘이 약해지자 한 치라도 더 먹으려고 했던 거죠. 일본과 손 잡고 대륙으로 진출했거나 일본이 약할 경우 일본도 노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러고보면 일제의 조선 강점은 필연인가 싶긴 합니다. 하지만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고, 당한 쪽이 분노하는 것 역시 필연이죠. 아예 관계 안 하고 살 정도로 머나먼 나라도 아니고 바로 옆나라기도 하구요. 거기다 일제의 폭주는 같은 제국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비판하기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조상님들의 고생과 지금 일제를 마음껏 깔 수 있는 명분을 바꾼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되진 않는 상황이지만...
정리가 아니라 잡설이군요. =_=;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주세요. 본론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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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메이지 6년, 정한론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 진행됩니다. 일본에서는 이른바 메이지 6년의 변이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그 이전인 1868년 1월 15일, 일본의 방침이 바뀝니다. 그때까진 조선과의 외교는 쓰시마섬이 맡아 했습니다. 교린이라는 방침 때문에 천황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고 있었죠. 하지만 신정부는 왕정복고 사실을 알리고 황실의 권위 및 조선"왕"에 대한 천황의 서열상 우위를 표현하게 합니다. 왕과 "황"은 다르니까요. 조일 양국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익을 얻던 쓰시마, 하지만 양쪽의 갈등이 생기면 가장 큰 책임을 맡는 것도 거기였죠. -_-; 어쩝니까, 따라야죠.
조선에서 이걸 받아줄 리가 있겠습니까. 지들 맘대로 관직과 호칭을 바꾸고 신정부의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했으며 용어는 황제만 쓸 수 있는 걸 사용했는데요. 거기다 옷도 서양식으로 입고 왔고 타고 온 배도 범선이 아니라 서양식 기선이었습니다.
70년에 신정부는 다시 사절단을 보내지만 역시 쫓겨납니다. 하지만 고집이라면 얘네도 만만치 않죠. 72년에는 대조선 외교를 외무성 관할로 하고 동래 왜관의 명칭을 "대일본국 공관"으로 바꿉니다. 헌데 이에 대한 테러사건이 일어납니다. 野畜國이라는 낙서가 벽에 붙었나 봅니다. 일본에선 항의했고 조선에서는 무시합니다. 조선 관리들이 이를 묵인 혹은 사주한 게 아니냐는 게 정식 보고로 나왔죠.
이 과정에서 70년 조선 토벌 주장이 나옵니다. 이 때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고시마에 있어서 한 발 물러섰지만, 의외로 정한론 나중에 하자고 알려진 죠슈의 기도 다카요시가 편지로 "무력을 동원해 부산을 개항하자"고 주장했다 합니다.
이건 용어 한두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왕vs천황 논쟁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선 내에서도 "지들이 지들 왕 높여서 부르는 건데 봐주자"는 주장도 있었구요. 중요한 건 일본이 기존의 중화질서를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청나라에선 이걸 받아줍니다. 아편전쟁으로 약해져 일본에 밉보일 필요도 없기도 했고, 근대적인 질서에 순응하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조선은 아직 그걸 바라지 않았죠. 이렇게 양국의 외교는 단절됩니다.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조선에서는 대충 논의하고 시간 끌기에 나섰고, 신정부도 이래저래 바빴으니까요. 외교 문제로 몇 년을 끄는 건 양국 사이에 특이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73년 5월, 부산의 일본공관 담당자에게서 조선에게서 모멸적인 행위를 받았다(위의 야축국)는 보고가 옵니다. 당시 기도 등 중신들은 해외 사절로 나가 있었고 남은 인물 중 가장 발언력이 높은 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였죠.
여기서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이 위협받고 있으니 병력을 파견해 보호하고 조약을 맺어야 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기가 가겠다고 나섭니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통설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그가 이렇게 밀어붙였지만 이와쿠라 토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 사절단에 간 주요 인사들이 와야 된다는 반론으로 회의는 어중간하게 끝납니다. 일단 사이고가 전권대사가 되긴 했지만, 돌아온 이들에 의해 그게 막혔고, 거기에 밀려 사이고 다카모리는 하야하게 됐죠.
사이고 다카모리의 급진론과 다른 이들의 온건(이라기보단 천천히)론의 대립, 혹은 다른 이들이 없는 사이에 사이고가 주도권을 잡으려는 게 막혔다 이렇게 해석됩니다.
헌데 반론이 있습니다.
http://transoxiana.egloos.com/5032409
70년대 말부터 나왔다는 일본 사학자 모리 토시히코의 반론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때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저 평화적으로 조선에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정한론은커녕 무력 사용을 철저히 반대하고 예전의 복식대로 가서 평화적으로 조선을 설득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정한론, 그것도 급진정한론의 주역이 된 이유는 하나, 정한 강경론자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보낸 편지 때문이었죠. 거기서 그는 자기가 가서 죽으면 그걸 명분으로 조선을 공격하라고 보냈죠.
모리 교수는 이건 그저 강경파를 끌어들이려는 사이고의 책략일 뿐이고 그 자신의 태도(평화적인 교섭)는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실각한 건 그의 반대파들이 그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한 것이었고, 내정에 힘쓰고 정한은 천천히 하자는 주장은 이후의 상황을 보면 전혀 아니라는 거죠.
일본에서는 학설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tv에도 나올 정도의 입지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실 정한론부터 일제강점이라는 흐름에 한 명의 의도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긴 하죠. 최근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에 이런 게 실리면서 한국에서도 반론이 나오긴 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 같이 중일의 역사왜곡을 막는 쪽에서 나오는 반론이죠.
그 반론은 간단합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한 말과 사적으로 보낸 편지, 어느 쪽이 더 진심일까 하는 것이죠.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무라이다운 우직한 모습으로 인기가 많지만, 책략도 많이 썼습니다. 전편에 썼던 막부측을 도발한 것 같이 말이죠. 어쨌든 타이밍은 라이벌들이 없었을 때고, 자기가 조선 외교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는 건 다를 바 없을 겁니다.
진실이야 뭐 사이고 자신만 알겠죠. 확실히 결론을 내릴만한 부분은 사이고는 대놓고 그런 말은 한 적 없고 공식적으로는 평화적인 해결을 원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당장 정한을 하기보단 내정에 충실하자고 했던 오쿠보 도시미치나 이와쿠라 토모미 (모리는 이들이 진짜 정한론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이 말한 "나중"은 나중이라 하기엔 정말 짧았다는 것 정도죠. 그냥 사이고 몰아내려고 지금만 아니면 된다 수준?
+) 마지막으로 운요호 사건 -> 강화도 조약 때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를 반대했다는 것 역시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엔하발로 제가 확인 못 했으니 논외로 볼게요.
뭐 어쨌든 모리의 주장대로 사이고가 조선에 갔더라도 조선에서 그걸 받아들였을지, 그대로 양국의 평화가 이어졌을지는 의문입니다. 일본에서 정한론은 대세였으니까요. 뭐 그래도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나마... 라는 생각이 들긴 하죠.
아무튼 이 일로 사이고 다카모리는 실각합니다. 그러면서 일본 내의 이권을 차지하려는 죠슈 세력을 공격하던 에토 신페이도 실각, 사쓰마 출신이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들과 연합하면서 주도권을 잡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죠. 에토 신페이 등 정계에서 쫓겨난 이들은 사족들과 손을 잡습니다. 기존의 사무라이는 점차 낙동강 오리알이 돼 가고 있었습니다. 신정부는 국민개병제를 통해 농민들을 훈련하고 있었고, 사족들은 아무 혜택 없이 죽어가게 됐습니다. 윗분들이야 귀족에 편입됐지만 그 정도였죠. 이들이 에토 신페이와 손 잡고 일어난 사건이 사가의 난, 하지만 중앙에서 바로 진압해 버립니다. 세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이들이 찾은 건 사이고 다카모리였습니다. 그 외에도 각지에서 사족들의 난이 일어난 상태였고, 정부 역시 그들의 구심점이 될 사이고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이고는 학교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고, 이들이 전쟁의 주역이 됩니다.
"그대들이 그런 마음이라면 나의 몸을 내어줄 따름"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에 응했고, 1877년 2월 15일에 거병합니다. 이것이 세이난(서남)전쟁, 일본의 중세를 완전히 끝낸 전쟁입니다. 만오천에 달하는 사쓰마군을 이끌고요.
+) 그 시작은 의외로 황당합니다. 당시 암호문으로 전보를 보냈는데, 한자 말고 가타카나를 썼죠. 근데 보오즈(사이고를 뜻하는 암호)를 "시사쓰"하라고 했는데, 이게 시찰하라는 의미로도 척살하라는 의미로도 통했습니다. (...)
이 서남전쟁을 모티프로 한 게 바로 라스트 사무라이입니다. 그리고 토탈워 쇼군 2 확장팩 사무라이의 몰락에서는 이 영화를 완벽하게 고증하죠 (...);; 뭐 이건 농담이고 사무라이의 몰락의 배경은 무진전쟁입니다. 하지만 사이고의 인기는 어디 안 가서 주인공이 그죠.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그의 인기는 여전하고 서양에서도 알아줄 수준입니다.
아무튼, 초반에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큐슈를 쓸고다녔죠. 명분도 그들을 도왔습니다. 천황께 사이고 다카모리의 충심을 알린다는 거였으니까요. 그와 함께 자기들 사무라이들의 가치 역시 알리고요.
하지만 잘 나가다가 거대한 성에 막혀버립니다.
구마모토 성이었습니다. 이 성을 쌓은 것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입니다. 네 그 가등청정입니다. 그는 울산성 전투 때 굶어죽을 뻔한 기억을 되살려 구마모토성을 일본 최강급 성으로 만듭니다. 지금도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로 남아있구요. 재래식으로는 정말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뚫을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포위당할 때를 대비해 다다미를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했고, 다수의 우물을 판 성입니다.
재래식 방법으로 뚫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쓰마군은 총도 대포도 마음대로 갖출 수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견제하고 있었으니까요. 때문에 총도 (당시 상황에서) 구식으로 만족해야 했죠. 이들이 가진 총은 습기에 약했고, 하필 비도 계속 쏟아졌습니다. =_=; 이들이 서양식 전술을 몰랐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막부군과 싸울 때 영국식 화력전으로 이기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유리한 점도 있었습니다. 당시 신정부는 농민들을 막 징집했을 때로 전투력은 물론 전투에 임하는 자세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족들을 끌어들일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방침이 어긋나니까요. 반면 사쓰마의 사족들은 안 그래도 승깔 더럽기로 소문난 이들이었고 (...) 전투라면 이골이 난 이들이었습니다. 사무라이 정신에 맞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구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기를 드는 게 범죄였던 무리와 아무리 공무원화 됐다 해도 무기를 쓰는 게 임무였던 무리, 그 차이는 크죠. 이후 2차대전부터 지금까지, 착검 돌격은 이런 환경에서는 여전히 잘 쓰입니다. 아무리 총이 있어도 칼 들고 달려오는 건 무서우니까요.
구마모토성이야 굳건이 버텼지만 구원군들은 계속 깨집니다. 총이 열악했던 사쓰마군은 발도 돌격(칼 빼들고 돌격)으로 맞섭니다. 이후 반자이 돌격 때문에 무시당하지만 이런 식의 돌격은 의외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시 정부군처럼 훈련이 제대로 안 됐다면 아무리 유리해도 도망가는 상황을 만들어줬죠.
+) 이런 게 훗날의 반자이 돌격과 이어지지 않았나 싶지만, 사상적 배경으로 이용했을진 몰라도 이어지진 않았다고 봅니다. 더 큰 영향을 준 건 바로 프랑스군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상대가 아무리 약했어도, 구마모토성은 너무 강력했습니다. 무려 50일이나 걸린 공성전을 버틴 것이죠. 이 때 천수각에 의문의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기도 했지만 이건 배수진을 치려는 정부군의 계획으로 보기도 한다는군요. 사이고는 정부군에 진 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에게 진 거라고 한탄합니다. 임진왜란 때보다 더 일본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마모토성이 버티면서 삼만오천에 달하는 정부군이 옵니다. (이 때 대군이 이동하면서 이들을 먹이는 과정에서 일본의 벤또가 시작됐다고 하네요) 아무리 사무라이들이 용감해도 수에서 상대가 안 됐죠. 거기다 저 쪽에도 사무라이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정부군 내의 사족들을 긁어모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었죠.
바로 경찰이었습니다. =_=; 이해하기 쉬운 타협입니다. 국민개병을 위해 사족들을 이전처럼 전문 군인으로 대하면 안 됐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여전히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군인만 아니면 되는 거죠 (...) 이들을 경찰로 등용해 투입한 겁니다. 거기다 이들은 구막부 출신들, 사쓰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던 이들이었습니다.
평민들로 구성됐던 이들이야 여전히 못 싸웠지만 사족 출신 경찰들은 사쓰마군의 총격에도 발도 돌격을 했고, 저격수들은 이들을 호위합니다. 거기다 비는 심심하면 내려서 사쓰마군의 구식 소총들은 영 효과를 못 봤죠. 4월 15일, 사쓰마군은 완전히 철수합니다.
이후 정부군은 5월부터 차근차근 공격을 개시했고, 8월쯤 가면 사쓰마군은 겨우 삼천정도만이 남습니다. 대포는 겨우 3문이었죠. 이들은 최후의 발도 돌격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죠. 나름대로 뚫긴 했지만 붕괴됩니다. 이게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이 마지막 돌격의 모티프일 겁니다.
정부군은 계속 늘어나고 사쓰마군은 수백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정부군은 최후통첩을 날렸고 9월 24일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언을 남기고 할복합니다. 서남전쟁의 끝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중세는 완전히 끝납니다. 사족들은 더 이상 저항할 엄두를 못 냈죠.
그래도 일본 군부는 놀라긴 했습니다. 구식 소총과 발도 돌격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되는 걸 봤으니까요. 때문에 민간인의 총기 소지에 간섭합니다. 그래도 발도 돌격보단 화력전이 낫다고 생각해서 1차대전까지는 화력전에 집중하게 됩니다. 의외로 이걸 깨뜨린 건 러일전쟁 때 러시아군의 총검 돌격과 프랑스군의 엘랑 비탈 사상이었습니다. 이걸 사무라이까지 연결하는 건 그냥 군대에서 정신교육하는 것, 혹은 한국 무술을 삼국시대까지 소급하는 거랑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일본군의 정신교육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강화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아무리 육군 대장 출신이라 해도 사이고의 카리스마에 넘어간 이들이 많았으니까요. 일본군은 천황에 충성하고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렇게 정신력을 강조하는 건 이 때부터로 봐도 되긴 하겠습니다.
아무튼 사무라이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평민들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를 만든다는 건 성공합니다. 전쟁만을 위해 사는 계층, 그걸로 특권을 차지하는 계층은 근대에는 필요없으니까요. 이 때는 이제 막 시작된 터라 전투력이 별로여서 온갖 문제가 터졌지만요.
추가로... 바람의 검심의 여주인공 카미야 카오루의 아버지가 정부측에서 경찰로 참전해 전사했죠. 만화의 배경이 이 서남전쟁 직후입니다.
이렇게 일본의 중세는 끝납니다. 메이지 유신의 마지막 단계 역시 끝났죠. 일본은 근대로 진입했고, 犬일본제국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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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류큐, 현재의 오키나와입니다. 이 곳은 임진왜란 직후(1609년)에 일본도 아니고 사쓰마번에게 먹힙니다. 사쓰마번은 이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얻어먹으려 했습니다. 이중조공, 중국과 사쓰마번에 조공을 바치는 식이었죠. 중국 사신이 올 때는 일본의 흔적을 완전히 없앴다 합니다. 에도 막부에서도 이를 이용했으니 이중이 아니라 삼중이려나요 -_-; 다만 조선에서도 이걸 눈치챘고(실록에 나옵니다) 중국 역시 몰랐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이후 류큐의 생명줄인 중개무역이 쇠퇴하면서 일본에서는 인두세를 물렸고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는 계속됩니다. 사람 수대로 세금을 물리니 누굴 죽이고 낙태를 유도하는 식의 상황이 나온 거죠. 이게 폐지된 건 20세기 가서야 됩니다.
메이지 유신 후 류큐는 속국에서 번으로 강등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걸로 중국을 떠봅니다. 마침 1871년에 류큐 소속 어부들 69명이 대만 남쪽에 표착했다가 다수가 죽고 12명만 빠져나옵니다. 아주 좋은 기회죠. 일본은 이를 따졌고, 청에서는 (1873년) 류큐는 지들 속국이니 니들이 신경쓸바 아니며 대만은 화외지민(化外之民)이니 처벌할 수 없다고 나옵니다. 일본으로서는 대만도 먹을 좋은 기회가 생긴 거죠.
1874년, 일본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쓰구미치를 사령관으로 해서 대만을 침공합니다. 여기서 대만 원주민을 굴복시키고 남부를 평정하죠. 서양의 침략에 맞서고 있던 청이나 국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던 일본이나 많은 논란이 나옵니다. 하지만 청에서 한 발 물러서죠. 두 달 동안의 협상으로 청은 앞으론 이런 일을 막겠다고 다짐했고 대신 류큐를 일본 땅이라 인정했으며 일본군이 대만에서 물러나는 대가로 50만냥의 은을 보사하기로 합니다.
+) 일본으로서는 이득 본 장사는 아니었습니다. 대만 출병 비용이 361만엔이나 들었거든요 -_-; 식민지 먹는 게 이득이어야 할텐데 손해보면서도 딱 욕심 내는 건 이 때부터 시작이었죠. 아무튼 이걸로 일본은 대만 침략 야욕을 드러냈음은 물론 류큐를 확실히 자기 땅으로 하게 됩니다.
+) 이건 간도 떡밥 중 하나를 깨뜨리기도 합니다. 간도 협약으로 일본이 청에게 돈 받고 간도는 청 땅이라 하는데, 이 때 대만의 경우처럼 청이 간도를 조선땅이라 여겨서 돈 주고 받은 게 아니라는 거죠. 그만큼 청의 상황은 돈으로 달랠 정도로 안 좋았던 겁니다.
1879년, 일본은 류큐를 확실히 일본땅으로 만들고 왕을 도쿄로 압송합니다. 이른바 류큐 처분입니다. 이렇게 류큐는 오키나와현이 됩니다.
대만에 욕심 내고, 그걸 통해 류큐를 먹고... 다음 목표는 어디겠습니까. 대만과 류큐는 그래도 섬이었습니다. 대륙으로 진출하려면 이걸론 만족 못 하죠.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1875년, 고종 12년, 메이지 8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으로 향합니다. 위의 정한론 문제에서 불과 2년 뒤였습니다. 그나마 그 1년 전에는 대만을 노렸구요. 사이고 다카모리의 진심이 어떠했든 이건 지금 하자 아니다 나중에 하자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한다 아니다 내가 한다 문제일 뿐이었죠.
명분은 조선이 덴노를 무시했다는 것, 그리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위협받고 있으니 무력으로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것, 그리고 조선과의 근대적인 조약을 맺겠다는 거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하던 때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의 문제는 뒤로 미뤄집니다. 두 나라에서 중요한 건 조선이 전근대적인 질서를 고집하느냐, 근대라는 조선인들이 겪지 못한 시대로 나아가느냐의 선택이었습니다.
한국사, 일본사, 동아시아사를 뒤흔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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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이 언제 나올지는 아들내미는 물론 결혼은커녕 여친도 없는 상태에서 며느리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상황...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