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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5/27 14:54:28
Name 초모완
Subject [일반] 기연


1.
볼때기를 싸대기치는 칼바람이 가시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따뜻한 미풍이 불던 어느 날이었다.

출근길도 아닌 평일 낮의 지하철이었지만 2호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날도 그곳은 사람들로 복작댔다. 지하철이 사당역에 멈추었고 긴 노선을 뺑뺑이 도는 것이 힘든 것처럼 2025호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듯 출입문을 계속 벌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앞선 열차가 문이 닫히지 않는 버그가 발생하여 열차 출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빠르게 문제 해결 후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출입문 쪽에 서서 멍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휴대폰에 고개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몇몇은 킥킥 웃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내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후자였다. 한국 망해간다는 유튜브를 스피커 쩡쩡 울리도록 보시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앞선 열차가 문이 닫히지 않는 버그가 발생하여 열차 출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빠르게 문제 해결 후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내 옆의 할아버지가 버럭 했다.

"아니. 여기서 몇 분을 서 있는 것이여? 왜 이렇게 안 가?"

할아버지의 벼락같은 호통에 휴대폰으로 몰려 있던 눈들이 할아버지로 향했다. 방금 전에 안내 방송 나왔는데 못 들으셨나? 그러려니 하는데 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앞선 열차가 문이 닫히지 않는 버그가 발생하여 열차 출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빠르게 문제 해결 후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할아버지의 천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 못 가면 못간다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녀. 이게 지금 뭣들 하는 짓 들이야."

'할아부지. 방금 방송 나왔어요. 앞에 간 열차가 문이 닫히지 않고 있어서 못 간대요.'

라고 말을 전할 용기와 오지랖이 생기지 않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대신 주변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몇몇 이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신경 끄고 자신의 휴대폰에 다시 집중하였고, 어떤 이들은 저 할아버지 왜 저렇게 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기도 했다. 할아버지 옆에 앉은 아가씨는 후자였다. 지하철 안을 울리는 정도의 고함을 바로 옆에서 들었으니 기분 나쁠 만도 했다. 기관사 아저씨는 이런 2025호의 열차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차 방송하였다.

"앞선 열차가 문이 닫히지 않는 버그가 발생하여 열차 출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빠르게 문제 해결 후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이번에도 방송이 끝나자마자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었다.

"나 참. 한참 동안 서 있는 거 왜 그런지 말도 안 해주고. 이거 완전히 개판이네. 나라가 완전 개판이야. 개판."

상황이 여기까지 오자 나는 할아버지가 알면서 사람들 재밌게 해주려는 듯 개그를 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게 로버트 드니로급 연기가 아니라면 이건 진심이었다.

이때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무언가 결심한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할아버지 목소리 못지않게 크게 전화를 받는 척했다.

"어. 엄마. 여기 지금 사당인데 앞에 열차가 멈춰서 지금 계속 서 있어. 어. 그래서 조금 늦을 것 같아. 기관사 아저씨가 빨리 고쳐 준댔으니까 곧 가겠지. 어 엄마 걱정하지 마. 그냥 문이 안 닫히는 고장 정도래. 곧 갈 거야. 응. 이따 봐."

누가 봐도 연기하는 투로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연기를 펼쳐 보이며 전화를 받는 척하더니 이내 또 끊는 척했다. 주변 몇몇은 그녀의 연극을 보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할아부지의 말은

"이렇게 말도 안 해주고 멈춰 서 있을 거면 버스 타고 갔지. 왜 서 있는지 말도 안 해주고.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여."



2.
다행히도 지하철은 얼마 안 가 순조롭게 출발했다. 난 목적지에 도착한 뒤 역사 밖으로 나왔다. 원래 대로라면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지만 살랑살랑한 바람에 날려온 벚꽃 잎이 내 마음도 벌렁벌렁하게 만들어 꽃바람 맞으며 걸어가기로 했다.

버스 타고 자주 이동하는 길이었지만 매번 휴대폰에 머리를 파묻고 살아서인지 이렇게 예쁜 길이 있는 줄 미처 몰랐었다. 길가에 서 있는 수많은 나무들이 꽃잎을 내게 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건널목에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그런데 좀처럼 바뀌질 않아 주변에 뭐가 있나 둘러보았다.

내가 왔던 길로 한 여자가 오고 있었다. 꽤 큰 키에 늘씬한 다리를 자랑하는 레깅스를 입었고 상의는 나풀거리는 하늘색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옅은 하늘색 잠바는 그녀의 내면을 살며시 보여주었다. 그녀의 내면은 굴곡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어 올백으로 넘겼고 그녀의 반짝거리지만, 번들거리지 않는 이마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냥 몸매와 얼굴 모두 빼어난 미인이었다.  

넋 놓고 계속 쳐다보면 혼날 것 같아 일 초만 바라보다 주변 둘러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리고 짐짓 아무 일 없는 듯 정면의 신호등 신호만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신호가 바뀌고 나는 건너가면 되는데 이게 도통 바뀔 생각을 안했다. 괜히 조바심 내며 기다리는데 그녀가 내 뒤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녀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운동화는 그녀의 큰 키에 맞지 않게 작고 앙증맞았으며, 가늘게 시작한 그녀의 발목은 곧게 뻗은 종아리로, 탄탄한 허벅지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름다움이 흔들거렸다. 벚꽃 잎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가까이 가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피해 낙화했다. 넋 놓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깜짝 놀란 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내가 훔쳐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았다. 눈알을 최대한 굴려 옆을 바라보니 그녀가 내 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댔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내 멱살을 붙잡고

"지금 제 엉덩이 훔쳐봤죠? 고소할게요."

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안 봤다고 해야 하나? 괘씸죄로 더 처맞을 것 같았다. 봤다고 할까? 개변태 소리 들으며 처맞을 것 같았다. 아냐아냐. 그냥 반대편에 볼일이 있어서 오는 걸 거야. 라며 자위했다.

곁눈질로 그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데 방향이 이상했다. 내 뒤를 향하는 게 아니라 날 향해서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짜 멱살 잡힐 것만 같았다. 어떡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발을 동동 굴리는데 그녀가 내 옆으로 왔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침을 꼴깍 삼키는데 그녀가 내 옆에 있던 버튼을 누르고는 쿨하게 다시 갈 길을 갔다. 이곳은 보행자 작동 신호기가 설치된 건널목이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불로 바뀌었다. 하지만 난 바로 건너지 않고 다시 한번 심성이 아름다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3.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길을 걷다 평소에 가보고 싶었지만 비싸서 가보기 힘들었던 초밥집 앞에 멈춰 섰다. 오늘은 왠지 그냥 과소비하며 먹고 싶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섰다. 기본 메뉴를 시키고 앉아 있으려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 눈썹 위까지 오는 검은 생머리에 입과 눈이 미소를 짓고 있는 이십 대 후반의 미청년이었다. 무슨 메뉴를 주문할 건지 물어보는 주인에게 나와 같은 기본 메뉴 두 개를 주문하였다.

"아. 일행분이 한 분 더 오시나 봐요?"

이에 미청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주인 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남자는 자신의 앞에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하고 간장을 따르더니 허리를 펴고 곧게 앉아 있기만 했다. 다른 누구처럼 휴대폰을 꺼내 보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 내가 본 그 여자를 이 사람도 봤던 건지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 음식과 그 사람의 음식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 그는 정갈하게 간장을 톡 건드려 살짝 찍기만 하고 입 안으로 가져갔다. 내가 초밥 하나 먹을 때 그 사람은 두 개를 먹었지만 게걸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지나치게 소리를 내며 먹는다거나 음식을 흘린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기품이 있어 보였으며 역시나 먹을 때에도 휴대폰은 꺼내 놓지도 않았다. 온전히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서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진짜 내가 본 그 여자를 이 사람도 봤던 건지 예의 그 인자한 미소는 여전히 품고 있었다. 그가 잘생겨서인지, 아니면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인지 그를 바라보는 내 기분도 좋아졌다.

그와 비슷하게 식사를 마친 나는 역시 그와 비슷하게 가게 문을 나섰다. 그는 가게 문을 나설 때도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며 음식점을 나섰고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길을 떠났다. 나 역시 가게를 나서며 주인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네고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벚꽃 잎이 내 눈앞에서 시계추처럼 좌우로 살랑거리며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고 손바닥에 벚꽃 잎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한참을 바라보며 손에 쥐려고 했지만 바람이 불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멀어져가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다 지하철에서 만난 할아버지, 그 옆자리에 앉은 여자, 신호등 눌러준 마음이 예쁜 그녀를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나도 이내 밝은 얼굴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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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7 15: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조율의조유리
25/05/27 16:49
수정 아이콘
곳곳의 묘사에 감탄하면서 너무나 재밌게 읽었는데, 도파민 중독인지 결말 중독인지는 몰라도 모든게 뭔가 찜찜(?)하기도 한 글이네요 ㅠㅠ.. 마치 큰 볼일 이후에 뒤처리를 덜 하고 나온 느낌이랄까 (직접적인 뭐라도 함께 좀 있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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