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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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완은 자(字)가 공염(公琰)이며 형주 영릉군 상향현 출신입니다. 젊어서부터 명성이 있어 형주의 서좌(書佐)가 되었습니다. 서좌는 문서담당 관리인데 딱히 대단한 지위는 아닙니다. 이후 유비를 따라 익주로 들어가 광도현의 현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어느 날, 유비가 새로 얻은 영토를 둘러보며 발길 닫는 데로 거닐다가 광도현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역을 관리하면서 업무에 매진하고 있을 줄 알았던 장완이 놀랍게도 일을 내팽겨 친 채 만취해 있었던 겁니다. 은행 회장이 불시에 영업점을 둘러보는데 지점장이 술에 떡이 되어 엎어져 자고 있었다고 한다면 비슷한 상황일까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몹시 분노한 유비는 당장 장완의 죄를 물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갈량이 극구 유비를 말렸지요.
[장완은 사직의 그릇이니 고작 사방 백 리 되는 고을 정도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는 다스림에 있어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며 겉치레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 다시 한번 살펴 주십시오. [촉서 장완전]]
아무리 화가 나도 제갈량의 말은 존중했던 유비였습니다. 그래서 장완은 처벌받지 않고 그저 관직만 박탈당하는 걸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법에 따른 엄정한 통치를 중요시했던 제갈량 아닙니까. 그토록 아꼈던 마속마저도 군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한 바 있었죠. 그런 그가 업무시간에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던 장완을 용서해 달라고 유비에게 부탁한 겁니다. 더군다나 고위직도 아닌 한낱 현장 나부랭이를 말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제갈량은 의외로 융통성이 있는 인물이었고, 정말로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나 공을 많이 세운 자의 잘못은 관대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법정이지요. 더군다나 제갈량 자신의 입으로 장완을 사직의 그릇(社稷之器)이라 칭했는데, 이는 곧 나라의 제사에 쓰이는 제기(祭器)처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만큼 이 일화는 제갈량이 얼마나 장완의 능력을 높게 보았는지 알려 주는 사례가 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장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십방현이라는 곳의 현령이 됩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중앙으로 불려 들어가서 상서랑(尙書郎)이 되지요. 상서랑은 내정 전반을 관할하는 기관인 상서대에 속해 있는 관리입니다. 상서대의 장관은 상서령이고, 그 아래 여러 명의 상서가 있어 각 분야의 일을 맡아보며, 상서랑은 상서의 휘하에서 실무를 담당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장완의 출세 속도는 그다지 특출하지 않았으며 밑에서부터 꾸준히 실무를 처리해 온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장완은 점차 중용되기 시작합니다. 223년, 유비가 죽은 후 즉위한 유선은 제갈량에게 부(府)를 열어 업무를 처리하도록(開府治事) 명합니다. 부(府)는 막부(幕府)라고도 하는데 특정한 고위 관료의 휘하에 두어 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조직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조직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니만큼 이는 최고위직에 오른 문무 관원들 중에서도 황제의 신임을 받는 일부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제갈량을 현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로 치면 승상부는 국무조정실과 국무총리 비서실을 합친 조직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장사(長史)니 사마(司馬)니 하는 속관들도 모두 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부를 열게 된 제갈량은 장완을 불러들여 동조연(東曹掾)을 맡깁니다. 동조연은 서조연(西曹掾)과 함께 승상부 관원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요직이었습니다. 게다가 제갈량은 그를 무재(茂才)로 천거하기까지 합니다. 제갈량은 익주목으로서 일 년에 한 명을 추천할 수 있었는데 그 권한을 장완에게 쓴 거죠. 그러니 제갈량이 그를 얼마나 높게 여겼는지 알 만합니다.
(참고자료)
https://brunch.co.kr/@gorgom/30
이때 장완은 감격하면서도 놀란 나머지 극구 사양합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죠.
[그대는 마땅히 공업과 덕행을 드러냄으로써 이 천거의 타당함과 중요함을 명백히 밝혀야 합니다. [촉서 장완전]]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능력도 되고 인품도 있음을 안다. 그러니 일을 제대로 해서 내가 널 제대로 보았음을 증명해라. 윗사람으로써 이 이상의 극찬이 있을까요?
227년에 제갈량은 북벌을 위해 한중으로 갑니다. 이때 장예를 장사(長史)로 삼고 장완을 참군(參軍)으로 승진시킨 후 성도에 남겨 승상부의 일을 총괄하도록 하지요. 230년에 장예가 사망하자 대신하여 장사로 승진하였고요. 승상 제갈량이 다섯 차례나 북벌에 나서는 동안 장완은 항상 성도를 지키며 그를 위해 물자와 병력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런 그를 가리켜 이렇게 극찬했습니다.
[공염은 충성스럽고도 고아하여 나와 함께 왕업(王業)을 도울 만한 자다. [촉서 장완전]]
안타깝게도 제갈량은 234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미 장완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정한 뒤였습니다. 장완은 상서령이 되어 내정을 총괄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하며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어 촉한의 신하들 중 명실상부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나 승상이 되지는 못하였지요. 승상은 촉한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제갈량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지위였습니다.
한때 술에 취해 농땡이 치다 걸려서 목이 달아날 뻔했던 한심한 젊은이는 이렇게 하여 지고지상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장완은 이미 과거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촉한은 제갈량을 잃어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만 있었는데, 장완은 슬픔이나 기쁨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차분하게 행동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점차 안심시켰습니다. 또 사사로운 원한을 품지 않고 항상 일을 대범하게 처리하였지요. 그런 장완의 성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회라는 자는 타고난 성격이 간략하여 장완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때도 때때로 대답하지 않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가 이건 까마득한 윗사람을 무시하는 일이니 지나치다고 비난하였지요. 그러나 장완은 고개를 저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마음 또한 다릅니다. 앞에서는 순종하면서 뒤에서 욕하는 건 옛사람들이 경계한 바입니다. 양회는 내 의견에 찬성하자니 자신의 본심과 어긋나고, 반대하자니 내 잘못을 드러내는 격이기에 그저 잠잠히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는 훌륭한 태도입니다.”
또 양민이라는 자가 장완더러 일 처리하는 것이 어리석어 전임자(제갈량)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자가 죄를 물으려 했지만 장완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지요.
“나는 확실히 전임자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죄를 물을 일이 아닙니다.”
대답을 들은 자는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머지 장완에게 뭐가 그리 어리석은지 한번 따져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완은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전임자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바로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뭘 또 따져보겠습니까?”
훗날 양민은 다른 죄를 지어 옥에 갇힙니다. 사람들은 모두 장완이 그를 죽일 거라 짐작했지요. 그러나 장완은 공정한 판단을 내려 중죄를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 장완의 담백하면서도 공평무사한 태도가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장완이 비록 무척 훌륭한 인물이었을망정 제갈량처럼 인간이기를 초월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장군이 된 후에 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상서령으로 삼아 내정을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을 나누어 준 것이지요. 그렇게 상서령이 된 자가 바로 비의입니다.
이쯤 되면 여기서 자르고 갈 거라는 걸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