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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6/07 10:57:17
Name 페리틴크
Subject [일반] [모난 조각] 달을 그리다.
이번에도 같은 것을 수십 번을 고쳤다.
수십 번. 과장이라면 좋을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 원하는 것은 달처럼 선명한데, 나는 색으로 빛을 그리려 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때때로 내가 바라는 바가 달라지는 것도 문제다. 달을 그리면 될 것을, 달의 밝음을 보이기 위해 밤하늘도 그리고는 그 하늘에 별을 얼마나 채울까, 구름은 얼마나 드리울까, 달 위에는 구름을 얼마나 씌울까를 고민하고 만다. 달빛이 내린 나뭇잎이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이는지, 달빛 아래 늘어진 그림자가 얼마나 선명한지 또한 떠올리고 덧칠을 한다.
그쯤 되면 내가 그리고자 한 달은 이미 사라지고 밤 풍경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다시 도화지를 옆으로 걷어내고 다시 공백 위에서 고민한다. 내가 하는 고쳐쓰기란 대개 이러한 형태였다.
그러나 내가 정녕 그리고자 한 것은 달이었다. 생동하는 달 전부를 그리고자 하니 정지한 화폭 위에서 그 바람이 채워질 리가 없는 것을, 나는 기어코 무리를 해 가며 도전하고, 스스로 좌절하며 다시 화선지를 던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피카소와 같이 얇은 종이 위에 두꺼운 형태를 쌓을 수 있지 못하고, 이백과 같이 스무 글자의 절구로 천하의 풍경과 그를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 모두를 그려내지 못하는 것에 한탄할 자격만큼의 재주조차 부려보지 못하고 또다시 붓을 내려놓고 빈 지면을 내려다본다.

달을 본 적이 있다. 밤하늘은 짙고, 별은 선명하고, 어둠 아래에선 구름이 하늘에 흩어져 바람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사위가 고요하고도 소란하여 마음을 적시고, 뭇 살아있는 것들은 달빛으로 젖어 신비로웠으며,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낯설었다. 달은 둥글게 차 있었고, 희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였다가, 구름 뒤에서도 둥글었다가, 아주 가려져 잠시 보이지 않는 대신 구름의 윤곽이 되었다가, 다시 둥글었다.
내가 본 것은 분명 달이었다. 그러나 또한, 달이 만든 세계 전부였다. 그 시간을 잊지 못하고 담아내려 했지만 허망하게도 적히는 것들마다 순간이었다. 최고의 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으니, 숨이 멎은 선마다 마음에 차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덧칠을 반복하여 검어진 그림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빈 종이를 펼친다. 그리고 동그라미 하나를 그린다. 그것으로 찰 리 없지만, 거기서 멈추어 본다. 아쉬움이 상상과 함께 그 선의 안팎을 채우는 것에 족할까, 하고 나면 이내 다른 생각이 든다. 이 그림은 결국 보이기 위함인데, 누가 여기서 달을 보아주겠는가.
그러면 나는 또다시 덧칠의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색은 겹칠수록 탁해지고 검어져, 빛남을 표현하기에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한 장, 두 장의 종이가 접혀 뒤로 밀려나고, 새 종이를 닥치는 대로 꺼내 이것저것을 마구 하는 사이 점차 의식이 흐릿해진다. 재주의 모자람과 탐욕의 넘침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가운데 튀어나간 먹물 몇 방울, 물감 몇 방울이 이지러져 아른거리는 형태를 불러일으키고, 그 요행을 보고 눈을 번쩍 떠서는 홀린 듯이 종이를 채운다.
그러면 한 폭은커녕 반 폭도 채 채우지 못한 기묘한 것이 나온다. 애초에 내 재주로는 색으로 빛을 그릴 수 없고, 선으로 숨을 빚을 수 없다는 것도 잊고 요행이 가져다 준 그것에 기뻐하며 붓을 멈춘다. 지치도록 괴로웠던 탓이 하나, 다시 그리고자 하여 그만한 것을 낼 수 없는 탓이 하나. 어깨마다 그것들이 한 자리씩을 잡고 귓가에서 환호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다시 그것을 바라볼 때면, 내가 아껴두었던 그 시간이 겨우 간직할 형태가 되었는데 다른 사람에게로 떠나간다는 것이 아까워서 또다시 팔러 내놓지 못하고 고이 그늘에 넣어두고 만다. 그렇다고 다른 모자란 것들을 내놓기에는 솜씨가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두려워 꺼내지를 못한다. 이러니 도무지 화가라고 말할 수가 없다. 수백 수천 장씩 그림을 그리면서 대체 무엇을 하느냐 물으면 쓰게 웃으며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지요,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때로 그늘 속에서 꺼내두고 대낮에 달밤을 바라보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것을.
나는 달을 그렸다. 팔지도 못하고 내놓지도 못하는 것이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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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조각] 16주차 주제 "고쳐쓰기"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다만 본래 요구하신 주제와는 아주 다르게 썼습니다. 고쳐쓰기라는 단어 자체가 제게 오래된 울림을 준 탓입니다.
이것은 PGR21에서 쓰는 제 첫 글이기도 합니다.
언제 써도 새벽 중2 감성은 한결같아서 참으로 민망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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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07 11:06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페리틴크
17/06/07 12:2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마스터충달
17/06/07 11:53
수정 아이콘
참여 감사합니다.
"고쳐쓰기"를 주제로 글을 쓸 수도 있었네요.
꼭 그림이 아니라 글이든, 노래든, 내놓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완성된 작품만큼 그 과정도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겠죠.
페리틴크
17/06/07 12:29
수정 아이콘
그리며 수백 수천 번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달은 여전히 찬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졸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7/06/07 12:00
수정 아이콘
지나간 기억일수록 덧칠하게 되기 마련이라고 봅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페리틴크
17/06/07 12:30
수정 아이콘
지나간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데, 저는 지금까지 흘러오며 감상을 쌓아서 그런가 봅니다.
고맙습니다.
제랄드
17/06/07 12:26
수정 아이콘
수백 수천 장씩 그림을 그리면서 대체 무엇을 하느냐 물으면 쓰게 웃으며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지요, 하고 마는 것이다.

막힘 없이 주욱 읽다가 이 부분에서 먹먹해집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페리틴크
17/06/07 12:31
수정 아이콘
덧칠하다 겹쳐진 색 중에 좋은 빛이 났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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