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성조 영락제
중국 명나라의 황제 중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는 물론 명태조 주원장 입니다. 그럼 두번째로 유명한 황제가 누구인가 하면, 말할것도 없이 '영락제 주체' 일 겁니다.
아무래도 영락제 이후 명나라 황제들은 일반적인 기준에선 선덕제, 홍치제 정도 빼면 뭔가 좀... 그런 느낌이 강하기도 하고, 그 낫다는 홍치제나 선덕제 등도 그다지 개성이 강렬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락제는 정난의 변이라는 중국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내전을 뒤흔들며 황위를 찬탈하고, 몽골 원정을 시도하고, 정화의 대함대를 주도하는 등 여러가지 굵직굵직한 임팩트 강합니다.
여러모로 '멀쩡하고 강력하던 시절의 명나라' 를 대표하는 느낌의 황제이기도 하고, 현재 물건너 한국에서는 '시대적 배경이 드러나는 무협 소설' 기준으로 가장 많이 찬조출현하는 비공식적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금위위, 동창, 정난의 변 등등만 해도 소재가...
그런 강력하고 위엄 넘치는 이미지에 맞게, 실제로도 영락제는 무투파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황자 시절부터 최전선에서 몽골을 막는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고, 정난의 변에서도 수차례 선봉에 서서 죽을 위기를 직접 겪었습니다. 이후 황제가 된 이후에는 몽골 원정을 직접 주도해서 친정하고 제국의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올려 "황제가, 그리고 황제의 군단이 최전방에서 적을 막겠다." 는 무투파 다운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 인물입니다. 다만 덕분에 명나라 황제의 입김을 남경에 있을때보다 훨씬 코앞에서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 조선에는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辛未,與景隆戰於鄭村壩。王以精騎先破其七營,諸將繼至,景隆大敗,奔還。
신미일, (연왕 주체가) 정촌패에서 이경륭과 교전했다. 먼저 왕이 정예기병을 이끌고 적의 7영을 격파했고, 이윽고 여러 장수들이 속속 도착하니, 이경륭은 대패하여 도망쳐 달아났다.
己未,遇平安兵河側。王以百騎前,佯卻,誘安陣動,乘之,安敗走。遂薄景隆軍,戰不利。暝收軍,王以三騎殿,夜迷失道,下馬伏地視河流,乃辨東西,渡河去。
을미일, (연왕 주체가) 백구하 측면에서 평안의 군대와 조우하였다. 왕은 백여기의 선봉에 섰는데,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하고 평안의 군대를 꾀어냈고, 그 틈을 타 치니 평안이 패주하였다. 이후 이경륭과 교전하였는데 불리하였다. 밤이 되자 군대를 거두어들였고, 왕은 3기와 함께 후미에 있었는데 길을 잃어 헤매니,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서 강의 흐름을 살펴보고, 동서의 방향을 분간하여 강을 건넜다.
王三易馬,矢盡揮劍,劍折走登堤,佯引鞭若招後繼者
왕은 말을 세번을 갈아타고,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휘두르고, 칼 또한 부러지자 제방 위로 달아나, 채찍을 휘두르며 후방의 군대를 불러들이는 척 했다.
當是時,王稱兵三年矣。親戰陣,冒矢石,以身先士卒,常乘勝逐北,然亦屢瀕於危
당시는 왕이 칭병을 한 지 3년 째였다. 직접 군진에서 전투를 벌여, 화살을 돌을 무릎쓰고 몸소 군사들보다 앞장을 섰고, 승세를 타고 패배를 막았으나 죽을 위기에 처해진 것도 여러번이었다.
平安轉戰,遇王於北阪,王幾爲安槊所及
평안이 전쟁터를 돌아다니다 북쪽 평원에서 왕을 발견했는데, 왕에게 평안이 찌른 창이 거의 닿을 뻔했다.
성조본기
成祖以數十騎繞出其後。庸圍之數重,成祖奮擊得出
성조가 수십 기로 그 뒤로 감싸고 나왔다. 성용이 그를 포위한 것이 여러 겹이었는데, 성조가 분격하여 나올 수 있었다.
장옥열전
이 기록들은 정난의 변 당시의 기록들입니다. 당시 정난군 사령관이었던 영락제 주체는 전투를 하면 선봉에 서서 싸웠고, 전투를 하기 전에는 몸소 말에서 내려 땅에 귀를 가져다 대고 형세를 살폈으며, 싸움을 할떄는 적이 내지른 창에 맞을 위기를 수차례 겪으며 사선을 넘나들었습니다.
여러모로 포스 넘치게 생긴 영락제
이런 군사적 원정 말고도, 정난의 변 성공 이후 황제가 된 이후에 자신을 반대한 정적을 "수천명" 이나 죽이고 학살하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을 살려두지 않았던 잔혹무도함 등 여러 방면에서 독재군주로서의 위엄과 권위가 넘치던 인물이었습니다. 흡사 좀 더 무투파다운 진시황 같은 이미지라고 할까요.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거대 제국의 정점에 선 절대권력자" 라는 느낌이 매우 강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 위엄 쩐다." 고 하는 그에게도...
흑역사가 있었으니..
세종대왕
영락제는 여러모로 조선 입장에선 성가신 사람이었습니다. 일단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이동시킨것 하나만으로도 조선을 두고두고 성가시게 하는데 충분했고, 그 외에도 이상한 방면에서 조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락제가 조선에 관심을 보인 부분은 '여자' 인데, 영락제는 조선 여자를 꽤 좋아했습니다. 여자도 좋아하고, 조선음식도 꽤 좋아해서 "음식 잘하는 시녀를 보내라" 는 지시를 조선에 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여자를 보내라고 한 것도 성가신 일인데, 하필 영락제가 "11~13살 쯤 되는 어린 여자애들을 보내라." 고 매우 디테일하게 요구한 조선에서도 "야, 이건 좀 아니지 않냐?" 하는 의견이 있었을 정도지만, 분쟁을 피하기 위해 당시 조선의 왕이던 태종, 세종은 여자를 뽑아 보냈습니다.
명나라 한복판에서 펼쳐지게 된 '여인천하'
이때 조선에서 간 여자 중에는 여씨呂氏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여씨는 명나라에서는 미인美人의 자리를 얻어 '여미인' 으로 불렸는데, 같은 조선 출신 여자인 '권비' 를 독살했습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여미인은 영락제에 의해서 처참하기 짝이 없는 '능지처참' 형에 처해져 죽고 맙니다.
이렇게만 끝나면 궁녀들의 투기로 일어난 사건으로 끝났을것 같았는데...
그런데 이 일은 훨씬 복잡한 곡절이 있었는데, 그 곡절이라는게 아침 드라마 뺨칠 수준이었습니다.
'조선 출신' 여미인 이 명나라에 오기 전, 이미 명나라의 궁궐에는 '중국인' 궁녀였던 여씨가 있었습니다.
이 '중국인 여씨' 는 조선출신 '여씨' 인 여미인에게 "야, 너도 여씨고 나도 여씨인데 우리 같이 친하게 지내지 않을래?"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미인이 그 말을 무시하자, 그게 그렇게도 화가 났는지 갑자기 큰 원한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권씨가 죽자 그 기회를 노려 "여미인이 권씨를 독살했다." 고 무고를 했던 겁니다! 진범은 '여미인' 이 아니라 '여씨' 였습니다.
여담으로 일이 밝혀지기 전에 여미인 사건이 터지자 조선에서는 "조선에 남아있는 여미인의 가족을 처벌해야 한다." 는 말이 있었지만, 당시 조선 왕이었던 태종은 "먼 곳의 일의 진상을 어떻게 안단 말이냐." 하면서 처벌을 거부했습니다. 진범이 밝혀져 결국 태종의 말처럼 일이 되어버렸으니, 명탐정 태종....
그런데 이런 궁중의 비밀스러운 일의 진상이, 어떻게 밝혀지게 되었단 말인가?
이 중국인 궁녀 '여씨' 에게는 비밀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같은 궁녀 어씨(魚氏)와 함께 젊은 환관과 간통을 했던 겁니다.
환관은...그...그런 사람 아닌가? 어떻게 간통을 한단 말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몸이라는게 신기해서 그렇게 되고도 남성의 기능이 되살아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성관계 라는게 꼭 그런 방식만 있는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건 상상의 영역에 맡기고..
아무튼 '여씨' 와 '어씨' 는 앞서 말한대로 젊은 환관 한 명과 간통을 했습니다. 이게 3P를 말하는건지 그냥 각기 관계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 기준으로도 꽤 입방아에 오를 일이고 하물며 그들은 황제의 여자인 궁녀들이었기에 밝혀지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일이었지만..
사실 영락제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어쩌겠냐..."
평소 영락제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아니 영락제가 아니라 다른 황제라도 알게 되면 길길히 날뛰며 목을 베겠다고 할 일이었지만 늙은 영락제는 이 일을 알면서도 적당히 묵인했습니다.
왜냐하면 영락제가 이 두 명의 여자를 꽤 아꼈고, 특히 여씨는 그렇다치더라도 어씨에 대해서는 상당히 애정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을 공론화시키면 두 사람 모두 죽여야 했는데 영락제는 그러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알면서도 덮어버렸던 겁니다.
그런 이유가 있다쳐도 사실 이런 일을 봐주는건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이 당시 이때 영락제의 나이는 60대 정도 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생기는 노인 특유의 묘한 심리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영락제는 천하의 황제, 대명의 당당한 황제의 위엄을 불사하고 '오쟁이진 남자' 를 감수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락제의 마음도 무색하게, 이번엔 여씨와 어씨가 자살하고 맙니다!
영락제 본인은 봐줄 마음이 있었지만, 간통이 들통났다는 것을 안 여씨와 어씨는 끔찍한 형벌이 무서워 먼저 죽어버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영락제는 당연히 화가 났습니다. 천하의 대명 황제인 자신이 "오쟁이" 지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살려두고 싶었는데, 그 사람들이 죽어버렸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여자도 잃게 된 셈이니 말입니다.
삼국지 우금 "영락제 이야기 하는데 왜 내가 소환되어야 하나;;"
결국 피의 숙청이 시작됩니다. 관련자들은 줄줄히 사탕처럼 엮여져셔 끌려와 처벌을 받고 죽었고, 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여미인 무고 사건' 이 겸사겸사 밝혀졌던 겁니다. 여러가지 일로 화가 단단히 난 영락제는 자비도 없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고, 여씨를 조롱하기 위해 여씨와 젊은 환관이 끌어안고 있는 그림을 그리기까지 했지만, 여씨는 그렇다치고 어씨를 생각하면 그렇게 하기 싫어 망설이다가 결국 그만 뒀습니다. 그리고 어씨의 무덤을 미리 만들어놓은 자기 무덤 옆에 만들었지만, 뒤에 즉위한 홍희제가 어씨의 무덤은 파버리고 맙니다.
오쟁이도 지고, 여자도 잃고, 여러모로 초라한 신세가 된 영락제 였지만, 그런 영락제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씨 - 어씨 사건을 처리하며 연류된 사람을 계속 죽이며 스트레스를 풀던 영락제 앞에 서게 된 한 사람은, 어차피 이리죽으나 저리죽으나 하는 심정에 갑자기 영락제를 향해 일갈합니다.
"야, 주체 이 놈아!"
"??? 저 놈이 미쳤나? 이 대명의 존엄한 군주이신 짐에게 무엇이라고?"
"마음 똑바로 써라 이 놈아!"
"뭐야?"
"이게 다 늙은 네 놈이 꼬X가 안 서서 만족을 못 시키니까 젊은 내시랑 즐겨서 벌어진 건데,
다 네 놈 X추가 안 선 탓이지 그걸 가지고 누굴 허물하고 난리야 이놈아!"
"뭣이!!!!!!!"
"내가...내가 누구냐!!!"
"광활한 몽골의 대지로 50만 천하 대군을 일으켜 오출삼려(五出三犁) 하며 북방 오랑캐를 물리치고!"
"정화의 대함대를 보내 지구의 반바퀴를 원정케 하고!!!"
"전중국을 반으로 갈라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하고!"
"천하사방이 조공하고 인구 6천만이 넘는 대제국 명나라를 지배하는 군주인 내가....이 내가!!!"
"???!!!!"
"!!!!!!"
"아...아앜아앜!!!!!!"
"아아아아아아아아으아앜아아아앜!!!!!!!!! 에엨 따!!"
....이 사건으로 연좌된 2,800명 전원이 도륙 당했고, 영락제는 이 2,800명의 처형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는 집요함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몇년 뒤, 몽골 원정에 나섰다가 사망합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대명천자의 xx가 나이 먹어서 안 섰다" 하는 이야기는 명나라의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럼 이 일화가 어디서 전해지는가 하면, 기가막히게도 바로 '조선왕조실록' 입니다. 명나라에 다녀온 조선 사신이 당시 상황을 면밀히 살핀 뒤 돌아와 세종에게 보고했고, 사관이 이를 기록해서 이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겁니다.
지시를 내려 조선 여자를 자기 곁으로 데려올떄의 영락제는, 그때문에 조선의 실록에 자기가 발기부전이라는 이야기가 실릴 줄이라고 예상이나 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