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신유박해 이후 다산 정약용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게 됩니다. 정약용 본인과 둘째형 약전은 천주교를 배교했지만 유배를 떠날수밖에 없었고 정약용의 셋째형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천주를 버리지 않고 순교를 택하여 오늘날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014년 교황 방문 당시 시복되었죠.(이 집안은 정약종의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 차남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까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쨌거나 정약용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배를 풀어달라고 계속 격쟁하고 청원했지만 그의 유배는 쉽게 풀릴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대 인식으로 봐도 정약용은 굉장히 오랜기간 유배생활을 한 편입니다. 오죽했으면 김조순이 우연히 부채에 쓰인 다산의 시를 보고 "아니 다산이 18년이나 유배를 가 있었던 말인가?" 하고 놀라서 유배를 풀어줬다는 야사가 있겠습니까. 이 분야에서 정약용과 자웅을 다투는 인물로는 송시열과 쌍벽을 다툰 키배러 고산 윤선도과 제주도-북청이라는 험한 곳에 연이어 간 추사 김정희가 있는데 고산의 경우 가면 무조건 못 돌아온다는 삼수갑산으로의 유배를 포함 도합 4번에 걸쳐 무려 25년동안 유배를 당했습니다. 다만 이 양반은 유배 중간중간에 풀려났다 다시 가길 반복했지만 정약용은 18년 세월 대부분을 강진쪽에서 생활한게 다르죠.
보통은 이런 상황을 정순왕후나 김조순이 조장했다는 인식이 있는데 사실 정약용이 장기간 귀양을 가게 된 까닭은 당시 좌의정인 서용보 탓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정조 시절인 1794년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를 탐관오리로 지목하고 파면하였고, 이후 정약용과 서용보는 철천지 원수가 됩니다. 실제 김조순이나 정순왕후는 정약용과 사이가 나쁘지 않아 신유박해 당시 정약용을 웬만하면 살려주려고 했고 귀양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였으나 정조와 정순왕후의 신임이 깊었던 서용보가 극렬히 반대하였고(서용보는 정조 실록의 편찬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는 기약없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작 정약용이 귀양에서 풀려난 이후에 서용보가 1819년 영의정에 오르는데 이때 서용보가 정약용에게 안부인사를 몇번 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이후 정약용을 승지로 부르자고 할때 또 반대한 양반도 서용보 이 양반...막상 정약용을 귀양에서 풀어준 것은 또 김조순이니 세간의 인식과는 약간 다르죠. 이후 효명세자의 병환에 유의(유학자로서 의술에 능통한 의사이기도 한 사람)이기도 했던 정약용을 부르자는 의견이 있기도 했었고요. 어쨌거나 결국 암행어사로 나가 잘잘못을 제대로 가렸다는 이유로 미움을 사 보복을 당한 셈입니다.
위에서 추사 김정희를 언급했는데 사실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것도 암행어사 시절 때문입니다. 김정희는 1826년 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 공주목 비인 현감인 김우명을 봉고 파직한 일이 있었는데, 1830년 김우명은 윤상도의 옥사라는 사건으로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을 유배보내고 추사 본인을 파직시킵니다. 근데 1840년에 김우명이 또 10년전 일을 꺼내들어선 김정희를 탄핵했고 결국 이에 따라 김정희는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었습니다. 암행어사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이유로 몇십년간 정치적 보복을 당했던 것이죠.
보통 암행어사로 가면 암행중에 몰래 살해당하거나 도적을 만난다거나...뭐 이런 식으로 매우 위험한 직책이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암행어사는 각 역의 역졸들을 동원할 수 있었고(어사의 상징 마패가 바로 이걸 위한 물건입니다.) 호위로 붙일수 있었기에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암행어사가 역졸 동원하는 게 사전에 알려져서 지역 목민관이 마치 사단장 오는 부대마냥 부랴부랴 준비를 해놓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다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중앙정계로 돌아왔을때 자신이 파면한 인사가 고위직에 올랐을 경우, 다산이나 추사의 예처럼 정치적 보복을 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지방 목민관으로 부임해서도 문제인게 순조시절 전라우도 무안현감으로 부임한 성수묵이라는 관리는 주막에서 괴한들에게 살해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 괴한들의 정체는 바로 2년 전 성수묵이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왔을 시절 곤장을 쳐서 죽인 부패한 아전들의 자식들로, 괴한들이야 극형을 받았지만 성수묵 역시 일을 잘못했다고 바로 파직행...(...)
어쩌면 암행어사들이 진짜로 걱정해야 했던것은 암행 중 신변의 안전보다는 이런 것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이런 일에 굴하지 않은 기개를 가진 신하들을 주로 암행어사에 임명하려 했던 것이고요.
p.s 암행어사가 포졸을 만난 이야기
어떤 고개에 도달하여 말과 마부, 수행원을 먼저 보내고 나무 아래에서 홀로 쉬노라니 추적하는 자가 다가왔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먼저 엉뚱한 일을 말하면서 내 모습을 살폈다. 나는 얼굴색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묻는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또 가짜 어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남몰래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내 행동거지가 수상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더니 민간에서 붉은 실(紅絲, 관아에 소속된 진짜 포졸이 사용하는 포승줄로 공권력의 상징)이라고들 부르는 쇠줄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길손은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이 지경에 이르러 재앙의 징조가 곧 머리에 닥치는 터라 나도 대답없이 가슴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며 말할 따름이었다. "너는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순간 그 사람은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면서 쳐다보더니 곧 자빠졌는데 언덕을 따라 판자 위의 구슬처럼 몸이 굴러가다가 평평한 곳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나는 마패를 들어 다시 가슴 속에 넣은 후 밑으로 내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위로했다. "너나 나나 모두 각자 나라일을 하는 사람이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니 힘을 내서 일을 해 가자." 이어서 먼저 자리를 떠서 고개를 넘어갔다.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4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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