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가장 난감한 순간 중 하나를 꼽자면 어머니에게 결과가 좋지 않은 성적표를 보여줄 때가 아닐까 싶다. 점수는 별로 좋지 않은데, 그렇다고 숨기자니 나중에 어머니가 발견하면 더 큰 꾸중을 들을것 같았고, 결국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어머니께 성적표를 들이밀곤 했다. 꾸중을 들을 때도 있었고, 더 잘하라고 격려를 듣을 때도 있었지만, 내미는 순간 그 성적표는 슈뢰딩거의 성적표가 된다. 이 성적표는 혼날 만한 성적표도 되고, 안 혼날 만한 성적표도 된다. 다만 그걸 어머니께 내밀기 전에는 그 결과를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내밀고 나면 이미 결론은 내려져서 더이상 원래의 그 '어느 것인지 모를'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까지도 고증이 완벽하다.
난 고등학생 때 부터 게임을 매우 좋아했다. 다만 어머니는 하는 시간을 줄이라고 권유를 하실 뿐, 절대로 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으셨다. 다만 결과는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는 주의셨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게임 이용은 다음 시험까지 봉인되고, 다시 시험 결과가 좋으면 봉인이 해제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고로 난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이 하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내 성적을 책임지도록 배우게 된 것이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성적표 결과는 매우 중요했다. 다음 시험까지의 게임 이용 여부가 달린 중요한 문제였고, 어머니의 만족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게임 시간에 대한 발언권이 제한된다. 다음 시험까지는 자체 셧다운제가 시행되고 매우 갑갑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온라인 상에서는 친구들이 애타게 기다리는데 "성적이 안좋아서 당분간 못들어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만큼 비참한 상황이 또 어디있을까.
"엄마, 요새 너무 신경쓸게 많아서 공부가 잘 안되는것 같아."
(기타등등 이유를 서술했다.) ["그래? 성적표 나왔구나? 어디 한번 봐봐."]
"음, 그게, 이게 내가 많이 놀아서 이런 성적이 나온게 아니라..." ["그러게 한번 줘봐~"]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시더니 의외로 그냥 미소만 지으셨다. 아무 말도 안하고 계시는게 조금 불안해서 다시 되물었다:
"음.. 엄마 실망한거 아니야?" ["글쎄? 네가 이정도로 설명까지 했으면 네가 그럴만 했으니까 그랬겠지? 평소에는 이렇게 설명 안하잖아?"]
"글쎄...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게, 이미 미안해하는 사람 혼내서 뭐하니? 다음엔 꼭 잘해."]
어머니가 의외로 너무 쉽게 넘어가 주셔서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때의 나에겐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걸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 약 몇주동안, 난 딱히 봉인된건 아니였지만 게임을 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딱히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그럴 마음이 아니였다. 어머니도 분명 이걸 알고 계셨던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일이 끝난후 난 더 열심히 공부했고, 가능하면 게임도 줄였다. 그게 딱히 성적에 영향을 주는건 아니였지만, 이렇게라도 어머니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오래 전, 첫사랑에게 차이는 씁쓸함을 처음 맛봤을 무렵의 추억이다.
* * *
요새들어 새삼 너그러운 마음을 먹는게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난 색안경을 끼고 삐딱한 시선으로 그 사람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었다는 듯이 생각하기도 한다. 설령 그 사람이 가져온 좋지 못한 결과가 내가 생각하는 원인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한들,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이 사람이 그걸 잘못해서 그러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전 회사 제휴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해줬는데, 초보 간호사 분이 채혈하는게 아직 미숙하다보니 내 왼팔 혈관을 찾지 못해 주사기를 3번이나 찔렀던 해프닝이 떠오른다. 그날은 왠지 누군가를 용서해주고 싶었을까, 주제 넘은 듯이 그냥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다시 해봐요!"
팔은 이미 몇차례 찔려서 얼얼했지만, 들어보니 이분이 일을 시작한지 고작 3일 되었다고 한다. 3일된 사람을 건강검진에 보내온 제휴 병원이 미웠고, 제휴 병원이 우리를 무시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게 딱히 이 간호사분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유료도 아니고 무료 건강검진인데, 경력 빵빵한 분들로 채워서 오지는 않으셨겠지...
이게 4번째 시도에 성공하면 훈훈하게 마무리되어 그 하루가 좋은 기분이 될 것 같았던 찰나, 옆자리에 숙달된 간호사분이 보기 안쓰러우셨는지 주사기를 뺏어가셔서 한방에 해결하셨다. 결과적으로 내가 바랬던 훈훈한 엔딩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란게 참 이렇다. 하하.
돌아보면 난 참 많이도 용서받았다. 그날 간호사에게 돌연 너그러워 지고 싶었던 것은, 또 한번 인생의 쓴 맛을 보고 난 직후여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전부 나의 실수 때문인걸로 느껴졌는지, 좀처럼 실패의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그때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그럴만 했으니까 그랬겠지?"]
이 말 한마디가 담고 있었던 신뢰의 무게는 엄청났고, 내 자신부터 조금 더 사람들을 믿고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이런 신뢰의 무게가 나를 탈선하지 않고 더 노력하도록 붙잡아 두었듯이,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해줄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이, 어느새 내 자신조차도 여유롭게 바꿔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좀 뜬금없지만, 최근에는 이런 글을 쓸 소재가 생긴다는게 참 기분이 좋다. 조금이나마 여유가 늘어나고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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