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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TV 묘사
1. 하얀색 승용차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 옴.
2. 주차되어 있는 내차를 지나쳐 직진 함.
3. 한 바퀴를 돌아 내차 앞에 잠깐 5초 정도 정차 함.
4. 다시 지나쳐 어디엔가 차를 주차 함
5. 저 멀리서 내차 쪽 방향을 바라 보다 CCTV 화면에서 사라짐.
6. 2초 후 후드티를 덮어 쓰고 CCTV 화면으로 다시 나타남.
7. 내차 앞에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양팔을 쭉펴 어깨를 귀까지 올려 붙인 뒤 3초간 주시함
8. 발로 차를 가격함. 본네트 1회, 범퍼 1회.
범죄 현장을 두눈으로 보고자니 속에서 뜨근한 것이 올라와서 코를 통해 마그마가 나오는 느낌이다.
힘차게 밀어차는 폼새를 보니 주캐는 김갑환이 틀림 없다. 당장이라도 체어샷을 날리고 싶다.
- 요, 요, 요요요요, 요 있네. 요 있어.
= 어머, 뭐 있어요?
기록해야 한다. 범죄의 상황과 CCTV속 가해자의 특징과 시간을.
- 아지매요, 내 조오 쪼까리 있시머 하나 주시소.
= 네?
- 볼펜하고 조오 쪼까리 하나 주시라꼬요.
= 볼펜은 알겠는데, 그 다음에 뭐 달라는지 모르겠는데....밥 지어먹는 조 달라는 소리에요? 그게 어딨어. 여기에.
- 와따, 답따베라, 뭐라크시노. 와이 카실까요. (화난거 아님)
= 그거 일본 말이에요?
통일 신라시대가 그립다. 내가 구사하는 말이 그때는 표준어였는데. 허나 걱정은 없다. 의정부에서 1호선을 타고 출퇴근 하는 22살 미스 조에게 구박 받으며 서울말을 배운 나였다. 거진 은평 뉴타운 주민 수준의 서울말이 가능하다.
- 볼펜하고 종이 쪼....아니 종이 한장 주시겠어요?
= 그 총각, 서울말 되게 못하네. 그리고 왜 화를 내고 그래요.
- 화 낸거 아입니다. 억양이 그케서..아니 억양이 그래서 그렇습니다.
관리소 직원 아주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A4 이면지를 하나 주셨다. 화낸거 에인데.. 괜시리 미안해져 어깨를 움츠리고 두손으로 이면지를 받아 다시 CCTV 앞에 앉았다. 근데 정작 CCTV 앞에서 기록하려니 뭘 기록 할 것이 없다. 아파트를 지으면서 CCTV에서 원가절감을 다 했는지 화질과 프레임 모두 허접하기 짝이 없다. 차량 번호가 보이기는 커녕 차량 번호판도 아리까리 하다. 사실 차량 번호판도 여기쯤이겠지 예상하는 거지 번호판이 없어도 있다고 믿으면 보일 정도로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에 따라 번호판이 보였다 안보였다하는 원효대사급 화질에 순간이동 특수효과는 덤인 CCTV다. 멍 하니 보며 발생 시간만 계속 끄적이고 있는데 문과장에게 전화가 온다.
= 오고 있냐.
- CCTV로 찾았심미더. 이거 처리 좀 하고 가겠심미더.
= 뭔 소리야. 빨리 와, 임마.
- 처리 좀 하고 가면 안 됩니꺼.
= 빨리 와라.
눈 앞에 증거를 두고 가야 한다. 아주머니에게 18시 30분 이후로 와서 좀 더 봐도 되겠냐니까 단호하게 안된다 하신다. 부탁 드립니다. 안돼요. 제발요. 퇴근해야죠.
옥신 각신하고 있는데 아버지 연배 쯤 돼 보이시는 남자분이 들어 오신다. 문을 열자 보이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몸짓으로 아주머니에게 눈짓 한번, 나에게 눈짓과 턱짓 한번. 두분의 케미가 좋은지 아주머니가 한번에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아, 입주민 이십니까. 참 그런일이 다 있다니요. 하며 다시 볼라니 딱쟁이를 떼고 아까징끼를 바르는 듯한 아픔이 있는 CCTV를 또 한번 본다. 허 참. 허 참. 가족 오락관 장수 MC를 계속 찾는 관리소장님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건넸다.
- 제가 지금 회사때문에 다시 가봐야 되는데 퇴근하고 와서 다시 좀 봐도 되겠슴니꺼.
= 예, 그러세요.
집에 가도 할일도 없는데 뭘 허허. 하시는 귀인을 만나 기분은 더럽지만 발걸음은 가볍게 사무실로 복귀 한다. 12시 30분께 사무실에 도착하니 문과장은 이미 없다. 박기사가 밥먹고 오라기에 사무실을 나서는데 마주친 2인 모두 은실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늙은 종달새가 현장에 둥지를 튼 모양이다. 식당 가는 길을 포기하고 사무실로 다시 들어와 분노를 곱씹는다. 오후 근무시간 내내 현장에 머물렀다. 투바이투 각재 무더기에 박스를 깔고 누워 쓰디 쓴 블랙 커피를 마셨다. 퇴근 후 해야 할일에 대해 몇번이나 되뇌이고 모의실험을 한다.
= 야, 뭘 어쩌게.
퇴근하려 옷을 갈아입으며 문과장이 물어온다.
- 경찰에 신고할라고 합니더.
= 뭐 잘해봐라. 그러고 또 나가봐야 되면 얘기하고.
비릿한 비웃음을 날릴 줄 알았더니 또 저리 말하니 문과장에 대한 인식 개선에 조금 도움이 되려 한다. 미움과 배려 중 마음이 어느쪽으로 넘어가면 다시 원점 복귀 시키는 오뚜기 같은 사람이다. 생긴 것도 그렇지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도로에 은실이가 안광을 빛내며 달린다. 잡으머 주 때리야 되나? 아니면 지차도 똑같이 가서 주 차뿌까? 이런 저런 생각을 다시 하며 관리 사무실에 도착하니 관리소장님이 반색을 하며 반겨 준다. 그리고 헬스클럽 관장님 같은 사람이 오른손을 내밀며 나에게 다가 온다.
= 차가 그렇게 돼서 어쩝니까? 마음이 많이 상하셨겠네.
- 예. 좀 그렇습니더.
손을 맞잡고 대답을 하며 관리소장님 쪽으로 봤다.
= 아, 입주자 대표십니다. 내가 이런 일이 있다고 연락을 했지.
- 아 예.
CCTV는 봤다고 했다. 어쩔꺼냐고 물어 오기에 경찰에 신고를 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도 일단 그게 좋겠다며 동의한다. 전화기를 꺼내 평생 눌러본적이 없는 112을 누른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 신고하고 싶다고 이야기 하니 곧 사람을 보낸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범인의 정체에 대한 두분의 고견을 경청했다. 20대다, 30대다,여자다, 남자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3자들이 옥신각신하기 시작한다. 저러다 태양인, 소음인 얘기까지 나오겠네 생각하고 있는 찰나 관리사무실 문이 열리며 회색 잠바에 형광 조끼를 입고 경찰관 두분이 들어온다. 제가 신고잡니더 알려주자 나를 살짝 비켜지나가며 오는길에 몹이라도 만나셨는지 급하게 갈색 포션을 찾는다. 정수기에서 제조 후 후루룩 한모금 하며 나에게 온다.
= 뭔 사고에요?
- 차를 주차해놨는데 밤에 누가 차를 발로 차고 갔습니더.
= 발로 찼는지, 박았는지 어찌 알고?
- CCTV 찾았습니더.
= 봅시다. 그럼.
몇번을 봐도 내가 폭행당하는거 보다 더 가슴 아픈 영상이지만 누군가에겐 커피 안주로 딱인듯 하다. 뭐, 사실 태도는 별 문제 삼을 것이 없다. 내 마음이 안좋아서 그렇게 보이는 오해 일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은 CCTV도 안보고 탁자에 앉아 있긴 하지만.
- 시간은 오늘 새벽 1시 40분에 흰차가 들어와 차를대고 1시 45분경에 내차로 와서 가만히 있는 차로요, 40만원 주고 코팅한지 얼마 안된 차로요....발로 주 차뿟심미더.
= CCTV 차 들어오는 시간으로 좀 돌려봐요.
.
.
= 번호판 안 보이네.
- 예?
= 번호판이 안 보인다고요.
말 없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을 벌리며 경찰관을 봤다. 그러자 탁자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종이컵을 구기며 일어나며 한마디 한다.
= 에이, 못 잡겠네, 이거 못 잡아요.
잘못 들었나 싶었다.
- CCTV에 나오는데 와 못잡슴니꺼.
= 번호판 보여요?
- 안 보입니더.
= 차는 뭐 같은데요?
- XXX 같긴 한데. 잘 모르겠슴니더.
= 우리도 똑 같잖아요. 그죠?
그러자 입주자 대표가 나선다.
= 에이, 경찰 아저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범인 모습이 보이는데 왜 못잡는다는 거에요. 그러면 현행범 아니면 다 못 잡겠네. CCTV 이거 뭐하러 달아요.
== 아니, 그게 아니라..이런 건은 보통...그러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조사를 해보면 결과가 달라 질 수도 있는 거고..
= 잡으려고 노력하는 척이라도 합시다. 거 참.
입주자 대표의 핀잔에 경찰관이 차에 가서 서류를 하나 들고 온다. 무슨 신고서라는데 황당한 마음에 뭔지 눈에도 안들어 온다. 인적 사항을 적고 사고 상황을 적었다. 그리고 가려고 해 CCTV는 안가져 가냐고 물어보니 아 맞다 하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인다. USB가 없으니 다시 와서 받아 가겠다고 한다. 경찰이 가고 난 뒤 잠시 멍하게 있다 나라도 CCTV를 담아가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USB를 꺼내니 이거라도 줄껄 하는 생각이 든다. 바보 같이 그 생각을 못했네.
CCTV 영상을 다운 받고 숙소로 왔다. 못 잡는다는 경찰관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차를 발로 찬 사람보다 그리 말한 경찰관이 더 짜증이 났다. 누워서 자려니 발로 차는 영상 보다 경찰관의 그 말이 5.1채널 돌비 서라운드로 들려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자다 일어나 식탁에 앉아 곰곰히 다시 생각을 정리 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
* 새벽 1시 45분에 누군가 차를 발로 참.
* 본네트 한번, 범퍼 한번 참.
* 차량 색깔은 흰색임.
* 차량 종류는 XXX 같으나 확실치 않음
* 차량 번호 모름.
* 검은색 후드티를 입은 것으로 보임.
* 20~30대의 호리호리 체격의 남자로 보임.
* 왜 걷어 찬 것인지 이유를 모름.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주차를 주차선을 두칸 차지한 것도 아니고, 통로에 주차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나에게 할당된 주차 공간에 주차를 잘 했을 뿐인데. 원한에 의한 보복 범행인가? 혹시 박기사 이놈이? 벼라 별 생각을 다하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일을 곱씹었다.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하는 일은 현명하지 못한 일인 것 같다. 경찰 아저씨가 바빠서 그랬겠지. 그래 아무래도 어제 그 시간이 교대 시간이었나 보다. 나 같아도 그 시간에 누가 일 주면 좀 싫지. 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하는 일은 현명하지 못한 일인 것 같다. 물론 내차를 힘차게 밀어찬 그 사람을 빼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고 현관으로 걸어가자 이노무 공동 현관문이 또 안 열린다. 주말에 전도 이벤트라도 발생해야 덜 심심 하지라고 투덜 대며 뒤로 물러서다 갑자기 공동 현관문을 통과하려면 비밀 번호를 누르고 들어와야 된다는 사실이 떠 올랐다. 그리고 공동현관에는 CCTV가 있지.라며 뒤를 돌아 찾아보니 엘리베이터 입구 쪽에 까만 밥공기가 보인다. 깜빡거리는 빨간 점이 반갑다.
- 문과장님, 오늘 연차 좀 내겠습니더.
= 야, 뭔소리야. 안돼
-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아이씨 진짜. 알았다.
관리실에 가보니 아직은 출근 전이었다. 몇번이고 지하 주차장과 공동 현관을 오가며 내 생각을 정리했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하니 분노로 인해 가려졌던 많은 정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정리한 나의 생각.
* 아파트 입구의 차량 출입 차단기 - 입주민들에게 리모컨 지급 또는 경비 아저씨가 열어 줌.
* 지하주차장에서 바로 세대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올라 온뒤 각동의 공동현관을 통과해 세대로 갈 수 있음.
* 공동 현관문은 비밀 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형식.
그 시간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건 입주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 시간에 차를 대고 갈 곳이라곤 집 밖에 없지.
생각을 정리 후 관리 사무실 앞에서 기다렸다. 관리 사무실 직원을 따라 들어가 CCTV 열람부를 책상에서 빼서 작성 후 제출 한 뒤 지하 주차장 출입문 CCTV를 보기 시작했다. 1시 46분. 짙은 색의 후드티를 쓴 이가 지나간다. 여긴 지나갔구나.
어디로 갔을까.
이번에는 공동 현관문 CCTV를 보기 시작한다. 총 10개동. 한개 동에 공동 현관 2개. 1동에서 부터 차례로 보기 시작했다. 시간은 1시 47분에서 새벽 2시 정각까지 13분의 시간을 보았다. 1동부터 보기 시작해 8동을 보기 시작하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지켜보는 시간이 적었나...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사실 차만 대고 다른 곳으로 갔을 수 도 있잖아. 사고난 아침에 이 사실을 알고 CCTV를 보았더라면 그차가 그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는데..그럼 이 짓을 할 필요가 없는데.라며 원망의 대상도 딱히 없이 원망을 하였다. CCTV에 주연으로 좀 출연하면 안되겠냐며 징징거렸다.
어쩐지 점심 시간이 다가오니 관리소 직원들의 눈이 가을에 서둘러 온 초겨울 새벽녘에 반가운 눈처럼 차갑다. 출근하려고 입은 회사 가을 잠바의 자꾸를 괜시리 내렸다 올렸다 하고 있을 적에 진심을 담아 징징 거리면 나온다던 쿠크리처럼 드디어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검은색 후드티가 8동 *, *호 라인 공동 현관문에 나타났다. 시간은 새벽 1시 52분. 내 촉이 쓸만하네.
반갑다. 108동 * , *호 라인 입주민분아. 덕분에 눈 빠질 것 같네. 엘리베이터 CCTV보면 몇층에 내리는지도 알수 있겠지?
※ 워낙 똥글이라 기다리셨던 분이 몇분이나 계실 지 모르겠으나 기다리신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늦어진 점 사과 드리며 꼭 마무리 짓겠다는 말을 번복하며 이번에 마무리 못 짓는 것 또한 같이 합쳐 사과 드립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글을 쓰려 아침, 점심 양치질을 건너 뛰었다는 점, 정상 참작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