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걸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돌리려는 사람은 그 바퀴에 깔려 두동강 날 뿐입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하죠. 그리고 그 끝은 항상 똑같았습니다.
시작하죠.
산적인 시단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세력이 수만에 이르는 것을 본 손호는 겁이 났을 겁니다. 소가 뒷걸음질 쳤다가 쥐잡은 격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손호가 무창으로 천도한 것도 건업과 오 지역의 불만이 극한으로 쌓여있었기 때문일까 합니다.
시단의 반란이 진압되고 뒷처리가 마무리 될 즈음 다시 건업으로 돌아온 손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일단 그는 회계군을 분할해 동양군을 새로 설치하고 오군과 단양군을 분할시켜 오흥군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 오흥군 안에 반란이 일어났던 영안이 있었습니다. 오흥군은 오군의 양선, 영안, 여항 ,임수현과 단양군의 고장, 안길, 원향, 어잠현을 통합해 오정현에 관소를 두어 통합했죠. 자신의 기반인 오정을 중심으로 두어 자신에 반란을 일으켰던, 그리고 반대세력이 극심했던 지역을 내리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손호는 그 이유를 이 지역의 지세와 물의 흐름이 오정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편리하고 산월 진압을 원활히 함과 동시에 명릉(손화의 릉)을 지키고 제를 지내기 마땅하다는 이유를 내세우죠.
하지만 내우도 있었지만 외환도 있었습니다. 양양과 합비 지역 뿐만이 아니라 손휴 말년에 여흥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교지와 구진은 조위와 서진의 세력권 아래에 있었던데다 일남 지역은 고립된 상황이었고 합포 지역에서는 교지와 구진의 서진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었죠. 이러한 서진의 교주 공략 선봉장은 촉의 내강둔부이도독으로서 영창군을 통치하면서 촉에 반란을 일으킨 영창의 요적을 토벌한 후 감군과 익군장군 겸 건녕태수를 거쳐 남중도독으로 있었던 곽익이었습니다. 곽준의 아들인 곽익은 이후 남중도독으로서 위에 항복한 여흥을 도와 교주지역을 서진의 관할안에 두는것에 성공했습니다.
268년 손호는 탈취당한 교주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개시합니다. 교주자사로 있던 유준과 전부독 수칙으로 하여금 교주 지역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북방을 치기 위해 동관 지역으로 나아가고 대장군 정봉은 합비를 공격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야심찬 계획은 전부 패퇴합니다. 정봉은 제갈정과 함께 합비를 공격하기로 했는데 당시 대사마 악릉군공으로 있던 석포는 회남 지역을 잘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석포는 사마사의 중호군사마로 관직을 시작한 이후 동래와 낭야태수를 지내면서 서주 지역을 잘 알았고 서주자사를 거쳐서 감청주제군사를 통해 청주지역을 관할했고 제갈탄 반란 당시에는 주태와 함께 오군을 방어했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회남 지역에 있었죠. 석포는 정봉이 침입해온다는 소식을 듣자 방어를 굳건히 하고 강을 막아 방어하려 합니다. 대오전선의 전진기지인 회남지역의 방어력은 합비와 합비신성의 명성이 헛되이 전해지지 않은 이상 함부로 공격하기 힘들자 정봉은 이간책을 써서 석포가 서진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립니다. 이러한 이간책에 걸려든 당시 감군인 왕침은 사마염에게 석포가 오와 결탁했다고 알렸고 사마염은 양호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석포를 체포하라는 명을 내려 소환했지만 당시 사마의의 7남인 부풍왕 사마준은 석포에게 군을 해체하고 죄를 빌라는 조언을 해 석포를 구해내죠. 그리고 빈 자리는 바로 사마준을 도독양주제군사로 임명해 정봉과 제갈정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일반적으로 정봉의 군은 급할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위험지역은 다름아닌 교주 지역이었죠.
연의나 정사 할것 없이 가장 도외시 되는 지역이 있다면 전 두군데를 뽑는데 바로 교주와 태행산맥 서쪽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태행산맥 일대는 남흉노가 있었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항복하고 이후 단석괴에게 망하면서 진태의 열전에서 보듯 조위와 서진의 노예 공급처가 되버리기까지 하는등 이 지역의 이민족들은 조위와 그 뒤를 이은 서진 왕조와 지속적으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실제로 가비능은 제갈량과 결탁하려고도 했죠.
하지만 교주의 경우는 다릅니다. 교주의 경우 사섭 생존시 손오에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고 손권은 사섭의 영향력 때문에라도 이 지역을 직접적으로 손대는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사섭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섭 사후 교주에 대한 직접 통치와 거의 착취와 다름없는 징발 그리고 물적 수탈 뿐만 아니라 인원 수탈까지 해댔죠.
제갈량이 남중 지역을 평정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물적 수탈을 한 기록은 없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요. 하지만 기록을 보면 제갈량의 북벌 시기의 주력군은 남중 반란을 일으켰던 이들이 항복하여 구성한 오부군이었으며 북벌에 필요한 비용 역시 이 남중 반란을 일으켰던 이들이 항복한 이후 그들과 그 가족들을 성도 인근으로 사민시켜 둔전 정책을 통해 북벌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하지만 손오는 그딴거 모름 하면서 아예 이 지역에서 대대적인 수탈을 자행했고 징병까지도 행해대니 사섭 이후에는 아예 대놓고 반오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촉오전쟁 이전 이 지역을 기반으로 남중 지역에서의 반촉 반란을 부추기던 상황과는 정 반대가 되어버렸죠. 그리고 이후에 여흥이 반란을 일으키고 남중도독으로 있던 곽익이 여흥을 지원하고 비록 여흥이 수하 이통에게 살해당한 이후에도 교주의 중심지역인 교지와 구진 지역이 서진의 땅이 되었고 다른 지역인 합포와 주이 지역 역시 오에 불온한 준동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지역이 넘어갈 경우, 오는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이 지역이 넘어가면 남형주 지역의 오계만이와 연결될 가능성이 컸고, 이는 남형주 지역의 상실을 불러와 강릉과 서릉 지역이 포위당해 상실되며 이후에는 형주 전체가 서진으로 넘어가면서 무창지역까지 위험해지고 이후 건업까지 위험해지게 됩니다.
교지 공격에 나선 교주자사 유준과 전부독 수칙은 3차례에 걸쳐 교지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던 양직은 오군의 공격을 모두 격파하고 굳건하게 지켜냅니다. 거기에 곽익은 이를 뒤에서 지원하면서 모경과 동원을 보내 오나라 군대를 격파합니다. 곽익은 이들을 파견하면서 지원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두 장수에게 성이 포위되어 100일을 넘겼는데도 구원하지 않으면 자신이 죄를 받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대로 이들을 계속 지원합니다. 이후 오군이 지속적으로 패퇴하자 눈치를 보고있던 인근의 울림과 구진이 서진에 귀부했고 이어서 합포에서 유준과 수칙을 전사시키고 오군을 격파하면서 교주 지역의 지배권이 서진에게 완전히 넘어갑니다. 이제 교주에서 오에게 남은 지역은 합포 뿐이었습니다.
268년의 합비, 동관, 교주의 군사행동이 전부 패배로 돌아간 이후 269년 정월 손호는 아들인 손근을 태자로 세우고 아들들을 각기 회양왕과 동평왕으로 봉합니다. 그리고 이해 정봉이 군사를 이끌고 진의 곡양을 공격했지만 이 지역의 백성들은 이미 서진에 의해 모두 피난한 이후였기 때문에 어떠한 이득이 없어서 하릴없이 돌아왔습니다. 손호는 곡양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극도로 분노해 정봉의 길잡이를 맡았던 장수(도군導軍)를 참해버립니다. 정봉의 도군을 죽인 것은 정봉을 죽일수 없어서였을 겁니다. 당시 정봉과 비슷한 위치의 장수는 시적을 제외하면 없는 상황이었고, 시적은 파구부터 서릉에 이르는 형주 전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봉을 함부로 숙청했다간 군부의 반발까지 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도군을 죽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기에 형주에서는 감군 우사, 위남장군 설후, 창오태수 도황을 파견하고, 감군 이욱과 독군 서존, 도군 풍비를 보내 건안에서 바다를 통해 양면으로 합포를 전진기지로 삼아 교지를 공격해 교주탈환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오군의 군사행동에 서진은 대오전선을 보강해 오를 공격할 준비를 서두릅니다. 상서우복야 위장군으로 있던 양호를 도독형주제군사를 겸하게 해 형주 전선을 보강하고 여기에 거기장군을 더해서 양호가 기회가 있을 경우 바로 남군과 강릉을 공격할수 있도록 장군부와 그 아래 관료들을 파견해 자유롭게 운용하게 한 것이죠. 합비를 비롯한 양주 회남 역시 도독예주제군사로 임명해 이 지역을 지키게 합니다. 교주 지역 역시 비슷한 태세를 취하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던 270년 준비가 점차 되어가던 서진에게는 엄청난 일이, 오에게는 한줄기 생명줄이 내려오게 됩니다. 252년에 독발부 선비의 수령인 독발수전이 죽고 그 뒤를 손자인 독발수기능이 이은 뒤, 270년 독발수기능이 그를 따르는 선비족을 데리고 서진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실 이 독발수기능의 난은 사전에 진압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 진압에 실패하면서 대오전선에 갈 전력들이 독발수기능을 진압하는데 투입되었죠. 거기에 많은 장수들이 여기에 투입되었고 사마준 역시 이곳에 투입되면서 대오전선에 쓸 힘이 많이 분산되게 됩니다. 양호는 여전히 형주에 있었지만 만일 양호까지 빼버릴 경우 대오전선이 아예 크게 비기 때문에 일단은 양호는 형주에 주둔했지만 급하면 양호도 빼 쓸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70년 봄 교주 탈환전이 이상한데서 어긋나버립니다. 해로를 통해 교지군을 협공하려던 이욱과 서존이 도군 풍비를 죽이고 퇴각해버린 것이죠. 손호전에는 이욱이 건안 길이 불편했다는 이유로 도군을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교주 탈환전에서 1개 군이 빠짐으로서 형주를 통해 진격한 우사, 설후, 도황의 군만이 교주 탈환전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군이 비관적인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교주전선을 뒤에서 지원하던 곽익이 이 당시 사망해 양직을 지원해줄 상황이 아니었고, 독발수기능의 난으로 인해 파서 지역도 위험한 상황이었던 탓에 교주로 지원군을 보낼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양쪽의 상황이 이렇게 가자 교주 탈환전에서 오군은 추가병력을 위해, 서진군은 방어태세를 정비하기 위한 합의하지 않은 휴전상황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 본국에서는 좌대사마 시적이 사망했고, 이욱과 서존이 퇴각한 일로 인해 전중열장으로 있던 하정이 이욱과 서존이 풍비를 죽이고 독단적으로 군대를 철수시켰다고 말해 이 둘과 그 가족까지 멸문시켜버립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정은 그해 9월 하구로 가 사냥을 합니다. 그런데 손호전에는 사냥이라 나오지만 다른 기록에는 전부 약탈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 손광의 손자로서 전장군 하구독으로 있던 손수가 밤에 가족과 병사 수백을 데리고 진나라로 도주해 항복해버리죠. 이는 손호가 손수를 매우 두려워 했는데, 손수는 손휴와 매우 가까웠고 전장군 하구독으로 있으면서 병권이 있었기 때문에 손호가 매우 꺼렸다고 합니다. 손수 입장에서는 손호의 측근인 하정이 5천 병력을 이끌고 사냥이라는 명목하에 약탈을 하러 오자 자신을 숙청하려는 것이 아닌가 했을 겁니다. 손휴의 가족들을 모조리 처리했고 그를 감싼 것으로 추정되는 시적이 사망하자 이제는 자신을 죽이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여 서진으로 투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당시 오나라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손수가 음해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상황이었습니다.
서진은 이러한 오의 황실 유력자를 그냥 놔두진 않았습니다. 서진 조정은 손수를 표기장군에 개부의동삼사로 삼고 회계공에 봉함과 동시에 후대합니다. 투항자인 손수에게 부를 열게 해 재상급으로 대우한 것이죠. 이러한 소식이 오에 전해지자 진으로 항복하는 오의 인사들이 많아진 통에 손호는 손수의 성을 여?씨로 바꿔 여수라 부르게 합니다. 여?라는 뜻이 사납다라는 뜻도 있지만 같은 발음으로는 문둥병 라, 혹은 문둥병 뢰라는 뜻이 이는 것을 보면 손수를 문둥병자라고 격하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해가 지난 271년 설후는 10만 군사를 끌어모아 교주 탈환전을 다시 시작합니다. 역시 수륙양동으로 구진을 공격한 것이죠. 당시 구진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진의 교주자사인 양직의 부장인 동원이었습니다. 동원은 도황과는 악연이 있었던 자였는데 269년의 교주 전투에서 도황은 양직과 싸웠다가 부장 두명을 잃고 크게 패했고 벌을 면하기 위해서 양직의 부장인 동원을 야습해 군수물자와 보물들을 빼앗아 죄를 피하죠. 구진태수 동원은 유인책을 쓰려하지만 이 유인책 와중에 동원의 부장인 혜상이 붙잡혀 동원의 작전이 간파당합니다. 그리고 도황은 이를 역이용해 혜상을 수레에 태워 구진성 앞으로 보냈고 이에 걸려든 동원이 혜상이 자신을 팔아먹은 것이라 여겨 성안에 있던 혜상의 형 혜계를 처형해버립니다. 혜계는 부하들에게 큰 신망을 얻고 있었는지 동원이 혜계를 죽이자마자 바로 내분이 일어나 구진을 점령하고 동원을 벱니다. 이후 다시 병력을 합쳐 양직이 지키고 있던 교지성을 공겨가기 시작합니다. 양직은 계속 버티지만 이미 이들의 뒤를 지원하고 있던 곽익이 이 즈음 죽은 바람에 더이상 지원이 오지 못하자 버티지 못한 양직이 항복하고 오군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도황을 둘러싼 약간의 사건이 있었는데 271년 여름 4월 서진의 장수 모경이 설후와 도황에게 사로잡히죠. 모령은 오군의 유준, 수칙이 교주를 공격할때 이를 격파하고 동원과 함께 합포에서 오군을 완전히 대파함과 동시에 오군의 대장인 유준과 수칙을 베어버립니다. 오군의 교주 탈환전이 시작되고 포로로 잡힌 모령은 도황 앞에 끌려옵니다. 모령의 용맹함이 탐났던 도황은 그를 살리려고 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도황을 계속 죽이려고 하자 결국 죽이기로 하죠. 그런데 이때 수칙의 아들로서 도황 밑에서 종군하던 수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모령을 산채로 배를 갈라 죽여버립니다. 동시에 숨이 끊어질때 수윤은 모령을 모욕주었지만, 모령은 역으로 자신이 죽인 수윤의 아버지 수칙은 죽은 개만도 못한 자라고 욕을 퍼붓고 손호를 죽이지 못해 한이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교주탈환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71년 교지 탈환 이후 철군하던 도중 총대장이었던 설후가 돌아오던 도중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었고, 그에 따라서 도황과 수윤같은 주력 병력 역시도 어쩔수 없이 교주에 남아버리게 된 것이죠. 어쨌든 교주를 이용한 오의 후방을 찌르는 서진의 전략은 물거품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교주와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오의 마지막 명장이라 불리는 육항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여섯살. 원숙한 숙장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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