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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4/20 16:00:02
Name The xian
Subject [기타] 이름을 남긴 사람의 슬픔.
1999년 X월.

나는 그 때 연구실에 틀어박혀. 곱게 간 시멘트 가루를 노에 집어넣고 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만족할 만한 실험 결과가 나올까 하며 기다리던 찰나. 얼마 전에 산 핸드폰 번호가 울렸다. 전화의 내용은 이랬다.

"안녕하세요. 소프트맥스의 ●●●입니다. 실례지만, 이번 창세기전 3에 나오는 캐릭터에 ●●님의 게시판 닉네임을 사용해도 될까요."

어떤 역할인지 묻지도 않고 승낙했다. 좋아하는 게임에 - 비록 닉네임이지만 - 이름을 남긴다는 것만큼 게임 마니아로서 기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창세기전 3에 나오는 선지자이자 흑태자교 교주. 그리고 시즈 중 한 명인 시안(Xian)의 캐릭터 이름 유래다. 그리고...... 시안의 디자인은 그 당시 한창 신경질적이고 한창 날카로웠던 내 모습을 기반으로 김형태씨가 그분만의 그림체로 디자인한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 시안이 그 시안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2000년 X월.

무슨 일이라고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 분명한 건. 나는 두 번 다시 연구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미 15년이나 지난 일이고. 잘못은 내가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군대였다.


2003년.

제대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서 너무 늦은 나이에 사회에 다시 나온 나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 따라온다는 말은 전부 다 헛된 소리였다. 동기부여도 무엇도 없이, 집에는 빚만 가득한 상황에서, 적든 많든 돈을 주는 곳이 필요했고, 이름을 남길 만큼 무언가를 불태울 곳이 필요했다. 막무가내로 게임 분야에 뛰어들었다.


2007년~2008년.

글을 여기저기에서 썼더니 글에 대한 제의가 쏠쏠하게 들어왔다. 게임과 관련된 여기저기에 내 이름을 걸고 글을 쓰고, 300페이지 짜리 가이드북을 내 이름으로 한 권씩, 두 권 썼던 것이 이 때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간에. 그 책을 다 썼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지금도 그런 일이 주어지면, 다시 할 수 있는 자신감은 있다. 늘 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2013년 초.

10여년 간. 글이 필요하면 글을 썼고, 기획이 필요하면 기획을 했고, 수익모델이 필요하면 수익모델을 디자인했다. 처음부터 그걸 배워먹어서가 아니라. 살아남고 싶었고 이름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잘 했다고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위에서 된다고 할 때까지는 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에 내 이름을 남겼다. 그렇게 여러 회사를 거쳐가며 약 10년 만에 팀장까지 올랐다. 그리고 내 앞에는, 일생을 거는 것까지는 몰라도 30대의 마지막을 걸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바로 눈 앞에.


2014년 말.

처음부터 끝까지. 숨이 찰 정도로 달렸다. 마라톤을 한 열 번은 뛴 느낌이다. 그런 느낌으로 겨우 프로젝트를 완성했지만. 나는 두 번이나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팀장으로 처음 맞이한 프로젝트가 부진한 성적을 거두는 것을 누운 채로 지켜봐야 했다. 이름을 남긴 무언가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내는 것은, 언제 겪어도 슬픈 일이다.


2015년 초.

겨우 회복했지만. 나는 다시 내가 몸담았던 곳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인연에도 무엇에도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2015년 4월.

오래 전에 내 이름을 빌려갔던 게임의 후속작이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나왔다. 하지만 석 달 전에 잠깐 본 모습에서 전혀 개선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왔다. 악평만이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지만, 악평의 수준을 넘어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것도, 게임 게시판이 아니라 유머 게시판 같은 곳에서 말이다. 어디를 다녀도 비슷한 취급을 받는 그런 모습을 보니 20년 추억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팬심이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같은 바닥에서 고생하고 굴러 온 사람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내서는 안 되는 게임인데 싶었다. 비웃음거리가 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16년 전에 그 게임에 이름을 남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좀 많이 아쉽고, 서글플 뿐이다. 이미 살아온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이 분야에서 더 이상 게임에 이름을 남길 수 없을 것을 각오하고. 그들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고, 11년 경험자의 마지막 충고라고 생각하고 결과물에 대해 요 근래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지독한 악평을 했다. 그 곳에는 나와 안면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나에게 배신감을 느끼거나, 나를 원수처럼 여기거나 볼드모트 대하듯 한다 한들, 어쩔 수 없다. 배신한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고, 그들이 내놓은 게임이다.

그들이. 16년 전에. 그 게임 시리즈에 이름을 남겼던 사람의 슬픔을. 그리고 분노와 허탈함을. 과연 이해할지 모르겠다.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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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K간다.
15/04/20 16:09
수정 아이콘
주잔 모바일이나 할 것이지...
어쩌자고 3D 리니지1을 내가지고...ㅡㅡ
15/04/20 16:17
수정 아이콘
...... 있는거 잘 굴리기만 해도 좋기는 한데 그게 아닌 뭔가를 하고 싶었던게 아닐지...
15/04/20 16:22
수정 아이콘
시대를 앞선(!?) 게임 4Leaf을 Web 4Leaf화 되면서 날려먹고..

이너월드 초반만 해도 이쪽으로 재미 볼 생각이면 주사위의 잔영을 잘만 가져와도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습니다... 네 뭐...

기술력에서의 문제였는지 다른 곳에서의 문제였는지 많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실 창세기전4 보다는 주사위의 잔영을 모바일화 하면서 충분히 벤치마킹해서 따라 붙는다면 국내에서 수위권 게임은 충분히 되고 남으리라 예상을 했었는데 경영진의 입장에선 딱히 매력적이지 않아 보였을것 같단 생각도 들고 주사위의 잔영이라는 이름보다는 창세기전이라는 테마가 주식쪽으로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판단을 했던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상황까지 와서 주사위의 잔영을 모바일로 가지고 온다고 해도 이제는 남은 모든걸 걸어 이거로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느낌이 강한 결과물이 될것 같아서 그냥 주잔 모바일조차 포기를 하는게 어쩌면 낫지 않을까 생각마저 드는군요..
은하관제
15/04/20 18:18
수정 아이콘
이너월드 서비스 이후, 작년 11월 즈음까지 불판을 갈다가 그만뒀었던 1人으로서,
처음에는 이너월드가 소맥의 새로운 수익모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나름 확밀아만큼의 뽐뿌질을 자극하는 요소들도 있었고요.
창세기전, 4leaf, 미슬토 각자 캐릭터들도 나름 스토리가 있고, 사연이 있었기에 입맛대로 골라 즐기면 되었었고요.
그런데 소맥은 일정 이상 궤도에 오른 순간, '보스랭킹전->던전랭킹전->월드보스랭킹전->무한반복..'을 통한 피로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유저들을 계속 붙잡더군요. 많은 유저들이 정말 피로해 했습니다. 저도 피로감을 너무 많이 느꼈고요.
더 무서운건, 이 사람들이 '변화'를 하기 싫어하는구나... 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게임에서 흥미라는 요소를 줄여버린채, 반복을 하면 떠나가죠.
여러가지가 겹치긴 했지만, 결국 이너월드를 떠났고, 다시 접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소프트맥스는 '변화'를 두려워했었기에 나온 결과물이 이 '창세기전4'라는 타이틀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새로운 계층을 끌어들이기 보다는, 소위 말하는 '소맥빠'가 여전히 해주길 바라고, 즐겨주길 원했던거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소위 '소맥빠' 유저들에게도 많은 실망을 안겨다 주었죠.
더 큰 실망은, FGT때만 해도 나름 기대하였던 모습들이 있었지만, 그것에서 '변화'가 없었던 모습에 다들 큰 실망을 하였던 것이고요.
어쩌다 보니 소맥 관련 얘기만 계속 하게 되었네요.

그 어떤것으로도 쉽게 풀어지진 않겠지만, The xian님이 앞으로는 슬퍼지는 일이 되도록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15/04/21 00:04
수정 아이콘
글이 좀 어두운 분위기인데..
위키에 보니 ''the xian'은 소프트맥스 행사에서 시안 코스프레를 실제로 했다고 하며,'
이 항목이 눈에 들어오네요. 힘내세요,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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