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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4/11/21 10:39:28 |
Name |
쎌라비 |
Subject |
[LOL] 가지 않은 길 |
몇개월전쯤의 일이다.
여기서 내가 그의 아이디를 밝힐수는 없으나 우리 1픽의 아이디는 상당히 중2틱했다. 중2병스러운 단어의 조합이였는데 여튼 무척 유치했다는것만 알아두자. 생긴대로 논다는 유명한 말처럼 그의 첫마디와 픽 역시 그의 아이디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독존적인 가갈갱밴 그리고 자신감 있는 블라디미르 픽 이후 그는 입을 열었다.
"강이 핏빛으로 물들것이다, 크큭. 하지만 운이좋은 녀석들이로군. 너희들은 몰살당해 마땅하나 오늘은 만월이구나. 짐이 기분이 좋으니 너희에게 한번의 기회를 주도록 하지. 0에서 10까지중에 좋아하는 숫자를 골라봐라"
이렇게 글을 쓰고보니 오그라들지만 어쩔수없다. 실제로 녀석이 저렇게 말했기 때문이다.(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뜻 보기에 녀석은 흔하디 흔한 컨셉종자로 보였고 아마 우리 팀원들도 그런 판단을 하고 녀석을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다름아닌 LOL. 자신의 죽음이 무기가 되고 협박의 수단이 되는 무서운 게임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녀석의 행동은 그냥 흔한 컨셉질이 아니였다. 그 이유는 녀석이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선심쓰듯이 말했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준 선택권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름아닌 자신을 위한것.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분명히 선택권을 주었다. 하지만 너희는 그 선택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자 그럼 게임을 시작할까'
내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다른 팀원들처럼 녀석을 컨셉종자로 치부하며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분야에 있어서 프로였다. 토요일 저녁의 모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세미프로와는 다른 그야말로 진짜 프로 말이다. 나는 지극히 위험할 뿐더러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싸이코들과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만날 수 있어서 롤계의 '오올블루'라고 불리우는 실버5와 브론즈5, 바로 그 사이 에서 7개월간의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그곳에서 100여건 이상의 혹독한 현장실습을 통해 다져진 끝에 '롤 내 싸이코 프로파일러 자격증'을 취득한 프로중의 프로 이른바 리얼프로였던 것이다. 그러한 리얼프로인 나의 프로파일링으로는 이 친구는 싸이코 그것도 꽤나 고 위험군에 속하는 싸이코였다.
내가 그를 고위험군 싸이코로 빠르게 분류할수 있었던 이유는 롤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았던 신참내기 레지던트 시절 브론즈에서 비슷한 케이스의 환자를 만나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2병 컨셉을 잡은 블라디미르와는 달리 다정다감하고 유쾌한 컨셉을 가진 친구였었다. 그 친구는 숫자가 아닌 색상으로 우리에게 선택을 종용했는데 그때 나는 좋아하는 색상으로 파란색을 골랐었다.
"파랑을 선택한 당신. 겉으로는 강한척 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여린 사람이군요. 언뜻 보면 감정이 부족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당신을 잘 아는 친구들은 당신이 따뜻하고 여린 사람인걸 잘 알고 있을거에요. 얼음물처럼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눈물 흘릴줄 아는 따뜻한 당신. 그런 당신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은 바로 여신의 눈물 입니다."
그리고 그는 여신의 눈물 6개를 구입하며 우리팀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고 위험군 환자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물론 무관심은 나쁜 방법이 아니다. 이기려는 생각이 별로 없을때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고위험군 환자들의 후각은 천부적인 데가 있어서 승급전만 되면 잔칫집 찾아내는 거지마냥 귀신같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잠시 비위를 맞춰줄 뿐이다. 이것만 참아내면 나도 한단계 성장할수 있다. 이정도는 군대에서도 많이 겪었던 일이다.
내가 생각할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는 7 하지만 녀석은 내가 7을 고를것이라고 생각할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아마 7이라는 숫자가 써진 커튼을 열어제치면 트롤이라는 함정트랩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렇다면 여기서는 역으로 간다. 불길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잘 고르지 않는 숫자 나는 4를 자신감있게 꺼내들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말을 많이 하지는 않기로 했다. 녀석의 유희에 반응을 보여주되 최대한 짧고 간결한 대답을 하는것. 그것이 내 승리와 함께 자존감을 최대한 지킬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시크한척 그저 그 녀석이 불쌍해 보여 선심써서 반응을 보이는 척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4"
"호오? 4? 나쁘다면 나쁘고 좋다면 좋은 어중간한 숫자군. 하지만 네 녀석은 일반인들처럼 7을 고르지 않은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야"
이 친구를 무시해서 그러는건지 아니면 화장실이라도 다녀오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4픽인 나의 차례가 되었고 나는 자르반 4세를 선택했다. 사실 자르반은 나의 주캐릭터는 아니였지만 4티어로 가는 승급전, 내 주포지션인 정글이 4픽까지 남아있다는 우연, 그리고 내가 선택한 숫자4. 모든것이 나로하여금 자르반4세를 선택할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잘 짜여진 운명과 같았다. 나는 자르반 4세와 함께 지긋지긋한 5티어를 벗어나 4티어로 간다. 이제 나를 물플레라고 부르지 말아다오. 나는 이제 불플레이고 싶다. 비릿한 미소와 함께 "플레5가 어딨냐? 골드 0티어지"라고 플레5를 멸시하는 그런 불플레 이고 싶다.
짧은 로딩과 함께 게임이 시작되었다. 로딩중 확인해보니 그는 중2병 컨셉종자 답게 블라디미르 제2의 기본스킨인 피의군주 블라디미르 스킨을 착용하고 있었다. 녀석을 혼자 두는것이 아이를 혼자두고 섬그늘에 굴따러 가는 엄마처럼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블라디미르의 구린 호응은 나로서도 어쩔수가 없어 애써 불안감을 지워가며 3레벨에는 미드에 킬따러 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트페의 빠른 호응덕에 상대 오리아나를 잡으려고 하는 찰나 찰진 소리가 울려퍼졌다.
"뻐스트 블러드!"
뭐야? 아직 상대 오리아나는 살아있는데? 역시나 였다. 군주님 군주님 우리 군주님이었다. 탑에 혼자남아 집을 보거나 낮잠을 자면 될것을 그 짧은 사이를 못참고 기어나가 상대 메뚜기에게 퍼블을 헌납한 것이다. 그리고 채팅창에 나지막이 한줄의 채팅이 올라왔다.
"1/4"
저건 뭐야? 지 플레이에 대한 평점인가? 내가 볼땐 너무 후했다. 하지만 가만히 채팅을 보니 뒤에 있는 4라는 숫자가 마음이 걸렸다. 자세히 보니 그건 내가 선택한 숫자 같았다. 그렇다면 짚이는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확신으로 바뀔때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음을 적당히 갈무리하고 유령을 먹고 있을 무렵 탑에서 그가 또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2/4"
그리고 또 몇분 지나지 않아 "3/4"
그렇다. 이제 나에게 남은 목숨은 목숨 하나였다. 4/4가 되는순간 벌어질일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 탑으로 가야만 했다. 나는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미드와 봇에 한번만 힘을 실어주면 게임을 터뜨릴수 있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기산에서 눈물을 뿌리며 퇴각한 제갈공명의 심정으로 어쩔수없이 탑으로 기수를 돌렸다. 다행히도 결과는 괜찮았다. 상대 레넥톤은 킬을 딴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는지 의아한 무빙을 보여주었고 나는 신선한 악어고기를 군주님께 제공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채팅창에 올라오는 한 마디
"2/4"
그는 공평한 사람이었다. 공과 과가 확실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0/4로 그의 스탯을 초기화하고 새롭게 게임을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탑을 한번 더 찔렀다. 상대 레넥톤의 실력은 우리 블라디에 걸맞은 실력이었고 무난하게 악어를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1.5/4 "
어? 뭐야? 왜 -1이 아니라 -0.5지? 그는 공과 과만 확실한것이 아니라 계산에 있어서도 확실한 사람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번에 레넥톤을 잡은것은 그가 아닌 나였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킬은 -1, 데스는1, 어시는 다름아닌 -0.5로 기록되는 것이었다.
만월이라 피를 너무 많이 빨아서 몸이 무거운지 킬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는 유독 힘들어했다. 상대 카직스의 별다른 지원없이도 솔킬을 내주기 시작한 것이다. 솔킬에서 내 판단이 틀렸다는게 드러났다. 그는 공평한 사람이 아니었다. 솔킬에도 1점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억울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승급전인 나는 을 그리고 트롤을 마음먹은 그는 슈퍼갑 이를테면 남양유업과 대리점 주인의 관계였던 것이다. 나는 슬슬 몸이 달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탑의 집중 투자가 이뤄졌다. 만지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톡하면 터질까 와드도 두개씩 착착 박아주고 킬양보도 깔끔하게 하고 여튼 꽤 긴 시간동안 노력한 끝에 나는 결국 그의 스탯을 0/4로 만드는게 성공했다. 그 댓가는 만만치 않았다. 내가 탑에만 공을 들이는걸 눈치챈 적들이 이미 드래곤을 비롯한 아래쪽을 초토화 시켜놓은 것이다. 하지만 탑에만 집중한 덕분에 블라디가 잘 크긴 했다. 이 블라디를 통해 어떻게든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정상적으로 한다고만 말했지 잘할거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없는 그의 실력이 호랑이 기운처럼 솟아날리는 없는것이다. 나는 결국 망할게 뻔한 주식에 투자한 것이다.
그렇게 게임은 나의 파산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 신비한 것이다. 그에 대한 원망보다는 내 선택에 대한 후회가 훨씬 컸다. 그때 내가 7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7정도면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이 게임을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을텐데.. 남들이 가지않은 길을 선택한 나의 오만한 판단이 이 모든일을 만든것이라며 나는 나를 자책했다.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얘기할 것이다. 숫자속에 두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때문에 모든것이 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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