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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3/06/02 11:10:18 |
Name |
공룡 |
Subject |
[연재] 최면을 걸어요 (5) |
5. 반전?
정민은 다섯 번째 상대로 나선 이재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 때 한솥밥을 먹던 형이었다. 재훈 역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여기 저기서 플레쉬가 터짐을 느끼며 정민은 자리에 앉았다. 기자들도 많이 왔나보다. 흘낏 보니 오늘도 소연은 맨 앞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연의 미소만 보면 정민은 힘이 불끈불끈 솟곤 했다. 오늘도 분명히 이기리라.
경기는 시작되었다. 정민은 재훈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우물을 파는 스타일이지만 굉장히 강력했다. 정상적인 힘 싸움으로 져본 적이 별로 없는 정민이었지만 재훈에게만은 자주 졌던 것이다. 재훈은 초반부터 강력하게 밀고 나왔다. 예상하던 바였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강하지 못했다. 재빨리 본진을 정찰하니 게이트 수가 많이 부족했다. 의외긴 했지만 좋은 기회였기에 정민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병력 대 병력이 부딪히자 역시 이재훈이 밀렸고, 정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본진에서 위급한 신호가 울린다. 재빨리 본진을 보니 어느 사이 리버가 내려 있었다. 이재훈 그답지 않은 변칙적인 전술이었다.
정민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처했고, 조였던 곳을 더욱 탄탄히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느닷없이 뮤탈리스크가 날아왔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또 피해를 입은 정민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재훈의 스타일과 달랐다. 관중석에서도 술렁임이 인다. 정민은 여전히 상대를 조이면서 차분히 스캔을 했다. 역시나 반대편에 저그로 멀티를 시도한 상태였다. 생각보다 어려워졌다. 리버로 인해 scv가 많이 다치면서 생산에 차질을 빚었기에 당장 저그 진영을 치러 갈 수가 없었다. 지금 조이기 라인을 풀면 프로토스의 강력한 지상군이 그대로 밀려올 것이 뻔했던 것이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2차 공격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가디언이었다. 프로토스 유저인 이재훈이 저그를 적극 활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토스 지상군을 만드는데 드는 가스를 생각한다면 이정도 숫자의 가디언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상해서 프로토스 본진을 스캔한 순간 정민은 아차 했다. 게이트 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지금이라면 게이트 수가 못해도 7,8개는 되어야 했는데, 아직도 셋이다. 그리고 섬 쪽에 저그의 새로운 멀티가 또 보였다.
재훈은 처음부터 프로토스가 아닌 저그로 플레이를 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아무런 하이테크 건물이 안 올라간 프로토스 진영은 병력도 거의 없었고, 단지 자원만 열심히 캐는 프로브만 잔뜩 있었다. 속았다고 생각하고 프로토스 본진을 치려 했지만 이미 사방에서 울트라리스크가 달려들고 있었다 침착하게 방어를 했지만 진영이 너무 좋지 않았다. 더구나 프로토스를 상대로 하기 위해 메카닉 쪽으로 갔던 정민으로서는 저글링부터 울트라리스크까지 갖춘 저그의 병력이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1차전에서 정민은 gg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멋졌어요! 하지만 2차전엔 봐주지 않을 거예요.”
1차전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정민은 재훈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재훈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같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정민은 그런 이재훈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한참 고민하는데, 앞자리에 앉은 소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정민은 한껏 웃으며 윙크를 했다.
“걱정마”
입모양만 보여줬지만 소연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연의 얼굴이 다시 밝아진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모양이다. 사실 이번 경기로 인해 정민의 15연승이 깨진 순간이기도 했다. 정민으로서도 상당히 아쉬웠다. 최근 했던 리그와 이번 특별전을 모두 합쳐서 무패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요즘 같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정민이었다. 생각만 하면 어떤 움직임이든 마우스와 키보드를 쥔 손이 정밀하게 움직여 그것을 해내곤 했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변칙에는 여전히 약하다는 인상이 남들에게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정민은 너무 정석적인 플레이만 한다고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오히려 성적은 더 좋지 않아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다시 그런 전철을 밟을 수 없었기에 정민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상대가 이재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차라리 그것이 더 편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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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하네 다음 작전은 뭔가?”
“엉?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어?”
부하들과 막 샴페인을 터트리려던 이운재는 아이우의 질문에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방금 난 개떼 같은 테란 부대를 완전히 소탕했다구! 그런데 지금 무슨 소리야? 웬 작전이 또 필요해? 이제 와서 갑자기 내게 줄 돈이 아까워진 거야?”
“음...... 자네와 싸운 병력들은 테란의 주력이 아니라네. 아마 테란의 주력은 이제 곧 들이닥칠 거야.”
아이우의 말에 운재는 샴페인을 바닥에 내던졌다. 하지만 특수유리로 만든 샴페인은 깨지지 않고 굴절하여 도진광의 머리를 때렸다. 그러나 도진광은 불평하지 않았다. 저번에 항복을 위해 운재를 묶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던 이가 바로 진광이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운재는 오히려 최고사령관에 올라 여전히 자신의 상관으로 있게 되었다. 이럴 때는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혹이 난 이마를 어루만지며 하늘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는 진광이었다.
“대체 테란의 주력이 어느 정도 되지? 방금 공격으로 우리 병력도 많이 잃었다구!”
“정확히는 모르네. 하지만 자네의 승리는 이번 전쟁에서 연합군의 첫 승리네. 우리는 모두 고무되어 있다네. 계속 잘해주길 바라네.”
아이우는 그 말만을 남기고 송신을 끊었다. 운재는 아이우가 비쳐졌던 스크린을 향해 총을 쏘려 했다. 이번에는 진광이 말려야 했다.
“참아요 형!”
“이거 놔 임마! 저자식 말하는 것 좀 봐. 죽기 살기로 싸웠더니!”
운재는 씩씩거리다가 다른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훈이 형 잘해줬어요. 그런데 아직 멀었대요.”
재훈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동수의 추천으로 프로토스 진영을 지휘하기 위해 급하게 투입되긴 했지만 그 역시 전투 경험은 전무했다. 그저 테란의 군대가 몰려올 때 어느 정도 대치를 해주면서 후퇴를 하다보면, 운재가 지휘하는 저그의 군대가 뒤를 친다는 계획이었고, 그것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보통 지금까지의 전투에서는 접근전과 화력에서 강한 프로토스의 군대가 주가 되어 움직였기 때문에, 테란의 병력은 프로토스를 많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했기에 이번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작전이 또 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운재는 자신이 있는 듯했다. 어쩌면 최후의 대결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웃는다.
“재훈이 형은 계속 프로토스를 지휘해 줘요. 이번에는 마음 독하게 먹고 정면으로 싸워야 해요.”
“알았어.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기면...... 정민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테란측에서 죽이거나 하는 건 아닐까?”
“... ...”
"운재야.“
“후후, 꿈도 야무지시네요. 우리가 운 좋게 이번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다음 전투에서 또 승리하란 법은 없어요. 정민이 잘 아시잖아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우린 녀석 손에 죽게 되요. 그게 더 녀석에게는 괴로운 일이 될걸요? 물론 괴로워할 정신이 남아있다면 말이죠.”
운재는 모자를 눌러쓰고는 다시 작전 구상에 들어갔다. 예전 스타를 하던 시절 1.08 패치가 나오자 은근히 좋아했었다. 강해진 테란...... 그 후로도 패치는 계속 테란이 좋은 쪽으로 돌아갔다. 비록 그것이 빌미가 되어 스타의 인기가 사그러들긴 했지만...... 그런데 현실에서도 테란족의 병력은 강했다. 프로토스와 저그의 병력이 모두 힘을 합쳐도 될까 말까였다. 운재는 차라리 자신이 테란족의 지휘관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한참 고민하던 운재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강도경에게 연락을 취했다.
“형! 앞으로 테란족이 다시 쳐들어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죠?”
“잘해야 1시간이야. 왜?”
“지금부터 저그족 지휘를 형이 맡아줘요.”
“이유는? 네가 프로토스를 맡으려고?”
“잔말 말고 그렇게 해요. 날 총사령관으로 앉혀놨으니 형도 내 부하라는 걸 잊지 말아요!”
“건방진 자식! 알았다!”
강도경은 말은 그렇게 해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패전만 하는 지휘관으로서 심적으로 고생이 많았었는데, 운재가 승리를 거둬줌으로써 많이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운재는 도경과의 통신을 끝내고 곧바로 다시 동수에게 연락했다. 부탁을 할 일이 있어서였다. 어쩌면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기에 그는 자신의 결정이 맞기를 바랬다.
“헤헤, 슬슬 재미있어 지는군. 정민이가 과연 얼마나 잘하나 볼까?”
운재는 바닥에 떨어진 샴페인을 다시 주워 마개를 열고 마시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술이다. 테란을 물리친다고 해도 술은 끊을 생각이었다. 술 먹고 뻗어 있지만 않았어도 동수에게 잡히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귀찮은 일을 맡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꽤 신이 난 상태다. 젊은 시절의 승부욕이 온 몸을 불태우고 있다. 마침내 동수가 화면에 나타나자, 운재는 자신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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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벌써 4연승을 했고, 상금도 꽤 모았기에 지금 진다고 해도 그리 아쉬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상금을 독식하는 것 같아서 동료 게이머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어차피 이런 특별전은 누가 독주를 하는 것보다는 여러 선수들이 다양한 경기를 보여주는 것이 더 시청자들에게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몰라도 지면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중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모두 정민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스탭들이나 응원 온 블리자드 관계자들까지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상대하고 있는 이재훈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민을 응원하는 그런 기분...... 정민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생겨남을 느꼈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다.
“어?”
혼란에 빠진 마음이 눈으로 전달이라도 된 것일까? 순간적으로 대회장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울렁거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의 얼굴도 잠깐이지만 일그러진 듯한 모습..... 그리고 앞쪽에 앉아 있는 이재훈은 잠시 잠깐 이운재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게 대체 뭘까? 정민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위의 시선은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조건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행복은 모두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는..... 정민은 육감적으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 시작하겠습니다.”
해설자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경기는 시작되었다. 정민은 최대한 신중히 게임을 했다. 이번에도 프로토스가 제일 먼저 압박을 해 왔다. 하지만 그 수에서는 이전 경기와 비슷했기에 역시나 저그의 기습이 있을 걸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제 공격해 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에 저그는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입구 쪽이 공격받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적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공격을 할 수 있는 유닛은 많지 않다. 그리고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자신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공중과 지상을 포함해 가장 긴 사거리를 가지고 있는 시즈탱크의 소리였다.
‘아차!’
정민은 설마 재훈이 테란을 주력으로 공격을 해올 줄은 몰랐다. 정민의 입구는 단숨에 조이기를 당했고, 프로토스와 저그의 병력들도 어느 정도 뽑아서 견제를 해주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굶어죽기 딱이었다. 빨리 봉쇄선을 뚫어야 했다. 하지만 테란 병력의 특징이라면 자리를 잡고 있을 때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그에 몇 배나 되는 병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무리하게 뚫고 나가다가는 자신의 병력을 다 잃고 역러시를 당할 게 뻔했다. 정민은 난감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주위에 술렁임도 느꼈다. 자신을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에 정민은 숨이 막혀 옴을 느꼈다. 그리고 그 쳐다보는 사람들 중에 소연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하는 묘한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그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당연할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인데 시합에 한 번 진 것을 가지고 설마 소연이 내게 화를 낼까?’
정민은 생각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뇌리 한 쪽에서는 소연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더 심한 일도 벌일 수 있을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정민은 또 한번 머리를 좌우로 강하게 흔들었다. 오늘 따라 이상한 일만 생긴다. 이대로 지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했다. 정민의 머리는 다시 차갑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능숙한 조작으로 방어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재훈을 프로토스 게이머로 생각하지 않고 임요환이나 이윤열 같은 테란 게이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테테전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있었기에 정민은 점차 유연하게 마우스를 움직였고, 슬슬 활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을 빛냈다.
‘이길 수 있다!’
정민의 얼굴에서 점차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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