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에서
(1) 태동의 모습
워크래프트3의 개발은 이미 그 전부터 알려줘 왔고, 블리자드라는 명성은 게임이 나오기 전부터 기대를 가지게 했다. 전략 시물레이션과 롤플레잉의 절묘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이 게임은 그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물론, 그런 유형의 게임이 그 전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블리자드에서 내 놓은 야심찬 게임이라는 점에서, 전작인 워크래프트2의 엄청난 성공에 비추어 볼 때, 많은 이들은 게임 자체로도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것은 점차 흔들리면서 무너져가던 한국 패키지 게임 시장의 한 반전의 계기를 생각하는 모습도 되었고, 동시에 그 시대 게임의 흐름을 일거에 변화시킬 수 있는 게임이라고 믿기에 충분했다.
소문과 함께, 뚜껑을 여는 순간, 적어도 한국에서는 블리자드의 전작인 스타크래프트에 비해 열광적인 인기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PC방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주도한 스타는 이미 게임 이상의 위치를 차지했고, 워3는 나름대로 흥행은 하게 되지만, 스타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워3는 먼저 시장을 제압하고 있던 스타의 아성을 넘기에 조금 모자른 감도 있었고, 이미 완성된 게임과 그렇지 않은 게임과의 대결은 초반부터 사실 불리한 점도 없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 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여하튼 이 게임은 한국에서 한 번도 망한 적이 없는 블리자드의 역량이 총집결이 된 기대작이었으므로. 단지 전작의 후광이 너무 강해서 그 빛이 조금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결국 그러한 믿음은 스타리그의 후속으로 워3를 선택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2년만 해도, 게임리그의 주도자는 방송국이었고, 협회는 뒷전에 있던 상황이었다. 방송사들의 고민은 스타를 넘어서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2의 킬러 컨텐츠의 확보였다. 온게임넷은 커프를 염두에 두고, 일단 리그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인기와 상금 문제에서 터져 나오는 잡음은 커프리그에 대해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겜비씨도 이 점에서는 온게임넷보다 크게 나을 것은 없었다. 그들 역시 KPGA 투어와 종족최강전으로 방송을 운영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것들이 존재했다. 지금이야, 팀리그의 개념이 등장하고, 팀리그와 개인리그로 한 주일은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시대이지만, 당시에는 컨텐츠의 부족이 분명 존재했다. 2002년 당시에, 장수하던 게임리그라고는 스타 외에는 커프 뿐이었고, 쥬라기원시전2과 피파 시리즈는 중단과 개최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 밖의 다른 게임들 - 이를테면 아트록스, 거울전쟁, 라이즈 오브 네이션스, 액시스 같은- 은 정규적인 리그로의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게임의 홍보라는 측면이 더 강했던 시절이었다. 프로게이머가 이렇게까지 우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어려웠고, 사실 스타리그가 모든 컨텐츠를 압도하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불안한 구석이 없지 않던 시절이었다. 6월 15일의 강도경과 변길섭의 대결에서 온게임넷이 거둔 흥행 성과는 말 그대로 참패였고, 게임 방송국은 분명 게임으로 먹고 사는 방송국인데, 그들의 킬러 컨텐츠마저 흔들리는 모습은 다른 대안을 강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럴 때, 나타나는 워3는 스타의 아성을 넘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워3는 먼저 한국에서 흥행에 실패해 본 적이 없는 블리자드의 게임이었다. 블리자드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가진 게임 개발사이고, 그들의 신작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걸게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중계 하기에는 다소 힘든 FPS게임이 아닌, RTS시스템을 가진 게임이라는 것은 분명 호재였다. 더군다나, 전작인 워2는 분명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인기 게임이 아니던가. 휴먼과 오크 외에, 나이트 엘프와 언데드가 추가가 된 게임은 분명 흥미를 끄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제작진들은 그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익숙한 블리자드의 게임, 익숙한 RTS의 게임, 그리고 여기에 양념처럼 더해지는 사냥과 영웅의 요소는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새로운 리그라는 열망은 분명 커서, 온게임넷은 5차까지 진행이 된 커프리그의 생명을 끊고, 워3리그를 출범시키기로 결정을 했고, 겜비씨도 이에 질세라 리그의 출범에 박차를 가했다.
온게임넷 입장에서는 당시에 다소간 흔들리던 스타의 인기에 대한 고민과 이를 넘어서는 카드의 부재라는 고민 속에서 워3를 통해 한 번에 그 고민을 해결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워3리그에게 목요일이라는 시간대를 주고,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캐스터였던 정일훈 캐스터를 투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정일훈 캐스터가 온게임넷의 직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만한 인지도와 실력을 갖춘 캐스터를 함부러 놀릴 만큼 온게임넷은 쉽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커프의 장수에는 분명 정일훈이라는 캐스터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던만큼, 새로운 E-Sports를 위해 투신하려는 그의 야망과도 맞물리기에, 워3리그는 그렇게 야심찬 계획이었다.
비단 온게임넷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겜비씨도 분명 워3에 주목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늦게 출범한 탓에 인지도에서 많이 밀리는 그들은 스타리그 부분에서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 격차가 쉽게 따라잡히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차피 쉽게 만회가 되지 않는다면, 서로 백지인 부분에서 출발하는 것에서 더 앞서나가 궁극적으로 인지도까지 완전히 만회하려는 계획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워3 부분에서 겜비씨가 보인 공과 정성은 상당한 것이었고, 그 점에서 그들의 노력은 분명 그간의 밀리던 싸움에서 주도권을 한 번에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캐스터 김철민을 투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두 방송사 모두 워3리그를 출범하면서 전제로 깐 것이 있었다. 스타리그가 언젠가는 흔들릴 것이고, 어쩌면 네이트배와 KPGA 2차리그를 통해 그럴 수도 있으며, 그 점에서 미리 스타 이후의 게임을 대비하고, 그 시장의 영역을 확보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워3가 스타를 대체할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을 분명 염두에 두고 그들은 리그를 출범시켰다. 여태 블리자드는 단 한 번도 시장에서 배신한 적이 없었고, 스타 못지않게 워3도 그러리라 믿었기에, 그들은 그 선택을 믿고, 승부수를 던지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워3리그는 태동하게 되었다.
(2) 예선의 과정
예선의 특색은 양 방송사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공을 위한 하나의 시도 중인 온게임넷은 흥행의 카드로 게이머를 들고 있었다. 프로게이머, 그 존재는 임요환이라는 존재가 상징하는 것처럼, 팬들의 관심을 얻어야 유지되는 그런 사람들이다. 임요환이 프로게임계에서 엄청난 영향력과 대중적인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많은 팬들의 힘에 기인했다. 물론, 그가 그런 팬을 얻는데, 그가 보여준 스타일리시한 게임, 그리고 약간의 시대적인 운이 결합한 결과라고 하겠지만, 어찌 되었건 임요환은 그렇게 당대 모든 종목의 프로게임계에서 최고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새로 시작하는 리그에서 임요환을 끌어들인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런 것이 불가능 하다면, 최소한 기존에 이름이 알려진 선수들을 통해서 리그의 안정성을 도모하자는 것이 온게임넷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스타의 대체적인 성격, 혹은 완벽한 흥행을 위해서는 이름이 있는 선수가 필요했고, 그들을 통해 리그에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효과를 기대했으니까, 그 결과는 바로 온게임넷에서 시도한 예선전의 분리였다. 1차시즌의 예선은 기존에 프로게이머 자격을 획득한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로 분리해서 치루어졌고, 그 결과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선수들의 등장을 얻을 수 있었다. 2000년 프리챌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자 김동수, 역시 같은 대회 최후의 테란이었던 최수범, 당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베르트랑, 커프 최고의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전지윤, 그리고 국산 게임에서 활약한 김대호, 오정환 같은 선수들이 이런 형태로 리그에 진입하게 되었다.
겜비씨의 선택은 달랐다. 그들은 그러한 기득권의 요소를 무시하고 진행을 했다. 그들이 상대적으로 흥행에 대한 욕심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선택이 워3 자체의 매력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혹은 상대적으로 온게임넷보다 흥행이라는 측면에서는 조금은 자유로웠던 측면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것은 그들이 워3리그에 대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리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워3리그에서 유래가 없는 팀플도 도입을 하였으니까, 더더욱 그런 점을 엿볼 수가 있었다. 요컨대 그들은 1차리그는 분명 시험의 리그였다.
선택은 확실히 달랐다. 온게임넷은 같은 종족끼리의 16강 단판 토너먼트를 통해 종족별 밸런스를 유지하고자 했다. 종족별 밸런스의 유지는 보다 더 다양한 다른 종족간의 전투를 통해 관중들의 흥미를 끌려는 시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 결과로 처음에 여덞 명의 선수가 단 한경기만을 치루고 사라지게 되지만, 여하튼 그들은 리그의 구조를 최대한 밸런스를 유지한채, 최대한 스타들이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로 잡았다. 반대로 겜비씨는 최대한 다양한 게임을 선보이려고 했다. 그들은 초반의 리그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도록 설정을 했다. 16강을 4개조로 나누어 순위 결정전을 치루고, 순위 결정전을 통해 팀플의 조를 짜고, 팀플 조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두 개의 조가 최종 4강이 되고, 그들이 다시금 개인 4강을 벌이는 경기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워3의 다양한 경기를 시청자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동시에 리그의 초반부가 그다지 많은 재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즉 박진감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이라는 시행착오 속에서 양 방송사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리그의 시작을 꾸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심 스타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존 리그에서 나타난 스타였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고, 혹은 워3만의 스타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스타들이 나타나기에는 아직 워3라는 게임은 등장한지 초반이었고, 초반이라는 것은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자, 많은 것이 나타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가능성과 초반의 혼란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단 한 명이 초기의 워3를 그대로 상징하게 되었다.
(3) 휴먼 킹 전지윤
전지윤.
1982년 6월 22일 생. 프로게이머로 데뷔한 것은 스타크래프트로 하나로통신배와 같은 대회에 참가한 기록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스타 유저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주목을 받은 것은 당대 최고의 게이머 중의 하나였던 봉준구의 연습 파트너였다는 점이었다. 그 자신은 스타에서 게임으로 주목받은 적은 없었고, 그 점이 그로 하여금 다른 게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 계기가 되었다. 봉준구와 전지윤은 커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며, 워3에서 명가의 자리를 굳힌 클랜인 Saint의 주축이 되었다. 그 둘이 만들어 낸 Saint는 커프에서 그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전지윤은 최초로 결승에 오른다. 커프 2차리그에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결승 무대를 밟게 된다. 하지만, 결승 상대는 커프계의 천재 유저격인 김성훈이었고, 그는 그 대회에서 결승에서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하고 지지는 않았다는 점에만 만족해야 했다. 최종 결과는 1:3 패배였고, 그는 그 대회에서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조금이나마 알리는데 성공했다. 그 당시 정황을 그린 정일훈 캐스터의 글을 보면,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의 비참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것을 잘 알았기에, 그는 다음 커프리그에서도 성공을 거둔다. 가장 성대했던 온게임넷 커프 3차리그에서 그는 이세중과 결승을 치룬다. 2:2로 맞선 상황, 단 1초만 더 공격을 가해서 건물을 부수면, 그가 이기는 상황이었지만, 그 1초 차이로 등장한 궁극의 영웅은 전지윤의 생애 첫 메이저 타이틀을 앗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것이 커프에서 전지윤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그 전지윤은 워3에서는 최고가 되었다.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초기에 휴먼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에 휴먼으로 한 번 일을 내고 싶은 마음에 휴먼을 선택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건 초기의 많은 랜덤 유저들과 달리, 그는 휴먼으로 일을 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경기는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고, 무언가 간결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워3에서 최고가 되는데, 그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온게임넷에서는 단 한 경기만을 지며 우승을 차지했고, 비록 겜비씨에서는 추승호에게 지면서 2위를 차지했지만, 스타성에 있어서는 추승호를 더욱 능가했다. 이미 커프 시절부터 존재했던 팬 층에 그가 워3에서 거둔 성과까지 더 해지면서, 그는 영웅이 되었다. 휴먼킹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고, 그가 보여준 경기들은 비록 영원히 기억될 감동적인 그런 것까지는 아니어도, 딱 교과서적이고, 정석적인 깔끔함으로 사람들의 인상에, 뇌리에 남게 되었다.
전지윤의 의미는 아마도 최초의 워3 영웅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워3로 영웅이 된 최초의 선수, 물론 그는 워3만 하던 선수는 아니었고, 다른 종목에서 전향을 한 선수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를 상징하는 것은 워3 휴먼의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는 끝까지 그의 게이머 인생을 규정짓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휴먼킹이라는 별칭은 끝까지 그를 따라다니게 되었고, 사람들은 마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부활과 귀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게이머 인생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다시 있겠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가 이룬 것은 단순히 두 대회 중 하나의 우승이 아니라, 워3계의 이미지를 가진 최초의 스타 탄생이었다. 그는 스타가 되었고, 그렇기에 워3 게이머로 최초로 프로 팀에 입단까지 하게 된다.
전지윤의 시대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지윤이 이 시기에 가장 강력했던 게이머이며, 이 시기에 자신이 게이머 경력동안 따라다닌 이미지를 구축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커프 시절 다소 불운했던 한 게이머가 정상급의 게이머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을 왕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의 시대는 아니지만, 그는 워3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적어도 얼라이언스에서는 원성남, 박세룡, 김태인과 같은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기 전까지 강력한 힘, 그 자체였다. 그리고 후에 설명하겠지만, 워3에서 몇 안 되는 순수 워3 스타 선수의 탄생이기도 했고, 그것은 전지윤이 후에 많이 부진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끝까지 그를 믿고 기다린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강도경이나 최인규의 경기력에 의문을 표해도, 그들을 끝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가 거둔 성적, 온게임넷에서 거둔 9전 8승 1패는 온게임넷 워3리그에서 가장 좋은 승률이며, 모든 리그를 통틀어도, 판타지스타 장재호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런 승률을 거두고 우승한 선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휴먼, 오크, 언데드, 나엘 모든 종족을 누르고 우승을 했으며, 랜덤 추승호와의 겜비씨 1차리그에서 아쉬운 패배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 것은 약간의 아쉬움일지언정, 그가 거둔 성취를 빛바래게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떴고, 스타가 되었다. 처음치고는 워3계도 스타 게이머 하나 발굴하고, 나름의 성과를 얻고 있었다.
(4) 1차 리그에서 기억할 것들
초기 리그의 특색이라면, 역시 무언가 아직은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혼돈이라고 하겠다. 나름의 장치를 걸었다고 하지만, 그 장치는 그렇게 완벽한 것은 아니어서, 리그의 구성이 치밀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온게임넷의 예를 들자면, 힘들게 예선을 거친 16명 중에 여덞 명은 단 한 경기만을 치루고, 집에 돌아가야 했다. 종족 안배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흥행이라는 요소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꼭 흥행과 연관이 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집에 돌아간 선수 중에는 후에 오크의 중추가 되는 정승재(St_Rori)도 있었고,김동수도 전지윤에게 져서 허망하게 16강 탈락을 했다. 겜비씨 1차리그 3위였던 박외식은 베르트랑과의 나나전에서 지면서 탈락의 고배를 들었고, 김대호에게 진 황태민은 당시 최고의 장기전을 벌였지만, 결국 김대호의 끈기에 말려서 진 경우였다. 앞에서 언급한 최수범도 역시 비슷한 경우였다.
겜비씨도 역시 비슷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팀플의 도입이 개인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팀플 8강 리그의 조 편성에서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조 순위결정전의 상위 선수에게 이점을 주었지만, 그 것도 클랜과 친분에 따라 편성이 되면서, 그렇게까지 유기적으로 활용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팀플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두 팀이 다시 개인 4강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 방식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즉, 팀플과 개인전은 엄연히 방식이 다른데, 그 다른 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다른 선수들 간의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있다. 실례로 4강에 든 4명의 선수들 가운데, 초반 순위결정전에서 1위를 차지한 선수는 전지윤과 추승호뿐이었다. 우연하게도 그 둘이 결승에 오르기는 했지만, 이런 리그 방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부호를 가지게 하는 리그 방식이었다. 스타리그로 비유하자면, 팀플의 최강자인 이창훈, 심소명, 김윤환 같은 선수들이 개인전 4강에 그대로 드는 방식이고, 초기에 다양한 워3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여했지만, 결국 수명이 그렇게까지 긴 것은 아니었다.
리그에서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선수들이 나타났다. 선 리치를 선보인 언데드의 유일한 희망격이었던 장재영, 개성넘치는 랜덤 플레이로 이름을 날린 추승호와 봉준구, 그리고 이 당시에는 그렇게 유명한 선수들은 아니었지만, 훗날에 이름을 날리게 되는 황태민, 이형주, 정인호, 이진섭까지. 많은 선수들의 등장은 분명 초기에 기억되어야 하는 순간이고,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개척자들은 분명 고독한 것이 숙명이고, 그런 점에서 다소간의 삐걱거림은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시작을 했다는 점에서 초기의 모습은 그렇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제 남은 과제는 그 초기의 모습을 어떻게 더 꾸려 나가고 발전시키는가에 있었다. 방송사들에게 그 과제는 쉬운 것은 분명 아니었고, 그 것은 차기 시즌 과정에서 잘 드러나게 된다.
어찌 되었건 초기의 리그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온게임넷.
한빛소프트 후원, 우승자에게는 2000만원의 상금.
16강 단판 토너먼트, 8강 조별 풀리그, 4강 크로스 토너먼트 방식.
우승은 전지윤(H), 준우승은 베르트랑(N), 3위 김대호(O), 4위 이재준(O, ReX_Jun)
결승전 스코어는 3:0으로 결정이 되었으며,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게 시드가 부여
정일훈 캐스터와 김창선 해설의 조합으로 출발했으며, 나중에 서광록 해설이 가세한 리그가 되었다.
2002년 7월 25일에 개막하여, 9월 12일에 결승으로 그 막을 내렸다.
겜비씨.
한빛소프트 후원, 우승자에게 2000만원의 상금.
16강 순위 결정전, 8개조 팀플리그, 최종 2개 팀플조가 4인의 개인으로 분화되어 다시금 크로스 토너먼트를 치루는 방식.
우승은 추승호(R), 준우승은 전지윤(H), 3위 박외식(N), 4위 봉준구(R)
결승전 스코어는 3:2로 결정이 되었으며, 4위까지 시드가 부여 되었다.
김철민 캐스터, 김동준, 이승원 해설의 조합으로 출발했다.
2002년 7월 17일에 시작하여 10월 9일에 그 막을 내렸다.
(5) 1차리그 결과들
겜비씨 1차리그
2002.7.17 A조 순위 결정전
이형주(N) 승 Lost Temple 패 장재영(U)
전지윤(H) 승 Lost Temple 패 황태민(O)
장재영(U) 승 Tranquil Paths 패 황태민(O)
전지윤(H) 승 Tranquil Paths 패 이형주(N)
7.24 B조 순위결정전
진현덕(N) 승 Legend 패 봉준구(rN)
정인호(O) 승 Legend 패 주정규(H)
봉준구(?) 승 Gnoll Wood 패 주정규(H)
정인호(O) 승 Gnoll Wood 패 진현덕(N?)
7.31일 C조 순위결정전
전환병(O?) 승 Lost Temple 패 이진섭(U)
김덕조(O) 승 Lost Temple 패 황연택(N)
이진섭(U) 승 Tranquil Paths 패 황연택(N)
전환병(O?) 승 Tranquil Paths 패 김덕조(O)
8월 7일 D조 순위결정전
김대호(?) 승 Legend 패 김동언(H)
추승호(rU) 승 Legend 패 박외식(N)
박외식(N) 승 Gnoll Wood 패 김동언(H)
추승호(rO) 승 Gnoll Wood 패 김대호(rH)
8월 14일~9월 11일 팀플 8강리그
(이 무렵의 자료를 원래 구했던 것이 있는데, 후대 그 유명한 그 일 EKDT에 분노로 파기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9월 18일 4강
1경기 봉준구(rU) 승 Lost Temple 패 추승호(rN)
2경기 추승호(rO) 승 Legend 패 봉준구(rU)3경기 봉준구(rO) 승 Tranquil Paths 패 추승호(rH)
4경기 추승호(rN) 승 Gnoll Wood 패 봉준구(rN)
5경기 추승호(rO) 승 Lost Temple 패 봉준구(rN)
9월 25일 4강
1경기 전지윤(H) 승 Lost Temple 패 박외식(N)
2경기 박외식(N) 승 Legend 패 전지윤(H)3경기 전지윤(H) 승 Tranquil Paths 패 박외식(N)
4경기 박외식(N) 승 Gnoll Wood 패 전지윤(H)
5경기 전지윤(H) 승 Lost Temple 패 박외식(N)
10월 2일 3.4위전
1경기 박외식(N) 승 Lost Temple 패 봉준구(rO)
2경기 봉준구(rH) 승 Legend 패 박외식(N)3경기 봉준구(rO) 승 Tranquil Paths 패 박외식(N)
4경기 박외식(N) 승 Gnoll Wood 패 봉준구(rN)
5경기 박외식(N) 승 Lost Temple 패 봉준구(rU)
10월 9일 결승전
1경기 전지윤(H) 승 Lost Temple 패 추승호(rO)
2경기 추승호(rN) 승 Legned 패 전지윤(rU)3경기 전지윤(H) 승 Tranquil Paths 패 추승호(rH)
4경기 추승호(rO) 승 Gnoll Wood 패 전지윤(H)
5경기 추승호(rO) 승 Lost Temple 패 전지윤(H)
(ps. 결승전에서 랜덤으로 오크가 나왔는지, 선택을 했는지 여부는 불확실)
리그 개막 1주전에 특별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덧말...
- 제목은 정말 거창하지만, 실은 별로 볼 것은 없는 글일지도 모릅니다.
복무 중에 그간의 추억을 생각하며서 끄적이는 것인데, 기억의 오류도 있고, 글의 오류도 있고, 하여간 부족한 글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 글이 보다 더 완벽해지려면, 여러분이 지적도 많이 해 주시고, 빠진 부분도 많이 보충해주시고, 그래야만 더 완벽한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찌 되었건 한국의 E-Sports도 10년이 다 되간다는데, 이런 글 하나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남겨봅니다.(원래는 워3만이 아닌 전체를 쓰고 싶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인듯 싶어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과감한 지적과 의견은 제 글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역사를 남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