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12/06 23:44:26
Name 라울리스타
Link #1 https://brunch.co.kr/@raulista
Subject [일반] [책이야기] 소비의 역사
k7xLGwOgRSHFPMbsEFHhpi5R_oM.jpg


현대인들은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상품들의 홍수 속에서 소비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현대인들이 꼭 소유해야 하는 '필수품'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경우 과거엔 스킨, 로션 정도만 바르거나, 혹은 그것조차 바르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요, 수많은 남성용 화장품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피부 관리와는 관련없는 직업군으로 여겨졌던 군인들 사이에서 피부 관리가 열풍이라는 뉴스는 이제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옷은 하루에 한 벌씩 갈아입는다 쳐도 일주일에 한 번은 빨래를 할 것이라 감안했을 때 넉넉잡아 상, 하의 10벌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옷장에 수 많은 옷들이 쌓여있어도 '입고 나갈 옷이 없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고 한 번 없이 관리가 잘 된 자동차도 어느 정도 연식이 차면 촌스럽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교체를 고려하는 대상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절대 빈곤을 극복한 선진국이 되면서 사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은 부족함이 없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소비자들은 더 나은 새로운 상품들을 갈망합니다. 이처럼 멀쩡한 과거의 제품들을 낡은 것으로 인식시켜 새로운 유행을 창출해야 하는 개념을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의 유명한 책인 <유한계급론>(1899)에서는 '계획된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소비'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생활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소비품들 혹은 소비를 하는 패턴들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요? 예를 들면 중세시대 유럽 왕족 혹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보면 여성들보다 더 화려한 치장을 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색조 화장, 과장된 가발, 겨울 이불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화려한 복식, 스타킹, 하이힐 등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떠한 남성이 저렇게 입고 다닌다면, 바로 '지하철 빌런' 정도로 여겨질 법한 패션입니다. 그럼 언제부터 남색, 회색 등 단조로운 색채와 셔츠, 재킷, 바지 등 간단하고 지루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남성 양복이 오늘날까지 세계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었을까요? 남성 양복은 간소화되고 남성용 예복인 턱시도의 존재감은 점점 초라해진 반면, 언제부터 여성용 예복인 드레스는 높은 가격과 화려함, 수많은 종류를 자랑하게 되었을까요? 왜 남성들과는 반대로 여성들의 일상적인 의복과 치장은 점점 화려해졌을까요?



RIzL7QwkddQNJNcoTiB5X2KhPZU
루이 14세의 초상화



성형수술의 경우엔 의학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현재도 종종 그러한 목적으로 시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현대에는 미용의 목적이 강한 '소비상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물론 직업군에 따라선 소비보다 '투자'의 영역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럼 미용 목적의 성형수술은 언제부터 본격화 되기 시작했으며, 각 문화별로 선호되는 눈, 코, 입, 몸매의 형태는 어떤 방식으로 결정이 되었을까요? 현대의 온라인 거래가 모태가 되는 '우편 거래'가 미국에서 발생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옛날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너무나 거대하고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인 '복합 쇼핑몰'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이 책은 위와 같이 현대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일상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상품들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답변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배경이 되는 역사들 중에는 당연히 재밌고 흥미로운 역사도 있지만, 인류의 각종 흑역사도 포함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 하나를 소개하자면 5번 챕터 '비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단지 위생 상품으로만 여겼던 비누에는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인류의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유럽이 산업화가 되고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비누가 본격적으로 보급화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위생(Hygiene)'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비누의 주요 기능은 때를 씻겨냄과 동시의 미백 기능이 있었습니다. 산업화 이전에도 노동계층은 상류계층보다 야외에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햇빛에 그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상류계층으로 보이고 싶은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미백 기능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피어스 비누(Pears' Soap)'라는 상품이 미백 기능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끕니다. 피어스 비누는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깨끗한 집, 화목한 가정,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라는 '높은 삶의 질'을 의미하는 듯한 이미지들을 광고의 전면에 내세우며 더욱 높은 인지도와 판매량을 얻게 됩니다. 아마 당시에 소비자들이 느끼기에 피어스 비누는 현대인의 '건조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정도와 같은 존재감이었을까요? 내가 저 것만 구매해서 사용한다면 훨씬 높은 삶의 질을 영위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제품이었나 봅니다.



bjgLTVYE5xn2ueLXCSkgoEhq7bI.jpg
피어스 비누가 전면으로 내세웠던 광고 이미지. 사랑스럽고 깨끗해 보이는 아이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아프리카의 열등한 유색인종과 구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비누를 활용한 위생의 관념이 여기에 활용됩니다. 불과 비누가 대중화되기 이전만해도 아프리카 인들과 위생수준이 별반 다르지 않았던 유럽인들은 어느새 자신들을 비누를 사용해 몸을 씻는 '문명인'이며 아프리카인들을 더러운 '비문명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인들이 피부가 검은색인 것은 비위생적이기 때문이고 유럽인들은 청결하기 때문에 피부가 하얀색이며, 따라서 아프리카인들은 문명인들의 상품인 '비누'를 통해 청결해질 필요가 있다라는 이념을 설파합니다. 당시 피어스 비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위생 상품 관련 회사들의 광고는 노골적으로 인종 차별적이었습니다. 그때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딱히 문제가 될만한 내용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광고에서 비문명화된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흑인들은 비누를 마치 부시맨의 콜라병처럼 신비한 물건으로 우러러 봅니다. 책에 있는 여러개의 광고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광고는 어린 흑인 아이가 피어스 비누로 씻으면 백인처럼 피부가 하얘진다는 내용의 광고 입니다. 굳이 흑인 아이를 출연시킨 것은 단순 미백 효과를 넘어서 마치 비문명인이 비누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문명인에 편입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합니다.



광고를 통한 계속된 설파는 제국주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여러가지 측면에서 꽤나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총과 칼을 이용한 강압적인 굴복보다는 훨씬 더 신사적인 방법으로 식민지 흑인들의 마음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전환기에 남부 아프리카에서 흑인 학생이 백인 선생님에게 비누로 열심히 씻었는데도 '선생님은 백인인데 나는 아직도 흑인이다'라고 불평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의 시점으로 봤을 땐 참으로 황당한 일입니다. 백인은 문명인, 흑인은 비문명인이라는 지속적인 '세뇌'의 성공 사례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의 마음을 비누로 사로잡을 수만 있으면 앞으로 비누는 물론 치약, 가글액, 치실, 탈취제 등 온갖 종류의 위생 상품의 잠재적 소비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단지 '노동력' 뿐이었다고 합니다. 위생과 청결은 아프리카인들의 '노동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데 이용될 뿐이었지요. 매일같이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비누가 이처럼 제국주의의 선봉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꽤나 충격적이면서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XjJhsJEVCQ1MP36mjGYQy4VcmyQ.jpg
인의 피부를 하얗게 만든다는 점도 황당하지만, 항상 흑인은 뭔가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어야 함




이 책은 위의 '비누' 챕터를 포함하여 총 25개의 챕터로 되어 있으며, 각 챕터는 '비누'와 같은 각 키워드별로 담긴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세심하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보론으로 절대적인 연구 역사가 길지 않아 앞으로 발전과 논의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소비사에 대한 현황과 전망에 대해도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상품들과 소비 생활의 배경에 대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자, 앞으로 새롭게 발명되고 판매될 상품들이 등장했을 때, 그 배경에 대해 좀 더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많은 분들이 충분히 관심가지고 한 번 쯤은 읽어볼만한 책으로 추천합니다.




※ 링크의 브런치에 오시면 더 많은 글들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오곡물티슈
21/12/06 23:48
수정 아이콘
[항상 흑인은 뭔가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어야 함]
이세계물에서 주인공을 보며 '대단해에에에에엣!'을 연발하고
일본의 자동문 택시를 보며 전율하는 외국인, 한국의 음식을 먹고 전율하는 국뽕 tv 게스트들의 역사는
이미 저 때부터 시작이었군요
위대함과 환상사이
21/12/07 09:52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쓰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언제 시간을 잡아서 한 번 읽어봐야 겠네요. 글쓴 분의 소개에서도 그런 점이 나오지만, 소비의 역사는 다른 한 편으로는 광고의 역사일 것도 같네요.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광고의 대상이 되는 상품에, 환상적, 허구적이지만 욕망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온갖 이미지를 덧씌우는 일이야말로 기업입장에선 곧 판매인 소비를 증진시키기 위한 최고의 방책일테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소비의 역사는 또한 낭비의 역사이기도 하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메타몽
21/12/07 10:45
수정 아이콘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그리고 비누 얘기는 참 훙미로우면서도 제국주의의 시각이 어땠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네요

다음에 시간이 날 때 읽어봐야 겠습니다
운운이
21/12/07 16:43
수정 아이콘
글을 참 잘쓰시네요.
요새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니 이렇게 재미있게 잘 읽히는 글에 대한 부러움이 들더라구요.
자주자주 써주세요~
라울리스타
21/12/07 19:59
수정 아이콘
힘이 나는 댓글이군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은주식왕
21/12/08 07:59
수정 아이콘
흥미로운 글이로군요. 잘 봤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4289 [정치] 문재인 정부 4년간 서울 아파트 값 평균 2배 올라 [212] Leeka25427 21/12/08 25427 0
94288 [일반] 최고로 어색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쿠오모 브라더스 [5] 오곡물티슈10129 21/12/08 10129 1
94287 [정치] 검찰개혁에 대한 소고 [55] Promise.all16999 21/12/08 16999 0
94286 [정치] 신의진 "다시 그 법을 볼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97] 어강됴리22570 21/12/07 22570 0
94285 [정치] 여성의 말을 믿지 않으면 나쁜거다? [101] LunaseA22343 21/12/07 22343 0
94284 [정치] 노재승 국민의힘 선대위원장 발언 논란 확산..5·18 발언 논란 이어 '가난 비하'까지 [181] 선인장23835 21/12/07 23835 0
94283 [일반] 굴림체 지옥으로부터 탈출했습니다. (Chrome update) [59] Tiny12548 21/12/07 12548 9
94282 [정치] 이재명, 서울대 경제학 특강.. "가난하면 고금리 대출, 정의롭지 않아". [194] 미생20567 21/12/07 20567 0
94281 [정치] 야당을 향한 공수처-검찰의 수사 성과가 아예 전무하네요. [54] Alan_Baxter14876 21/12/07 14876 0
94280 [일반] 가볍게 쓰려다가 살짝 길어진 MCU 타임라인 풀어쓰기 [44] 은하관제11760 21/12/07 11760 25
94279 [일반] 미국이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공식사절단을 파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03] 강가딘18100 21/12/07 18100 8
94278 [일반]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8] HJS12038 21/12/07 12038 6
94277 [일반] [서브컬쳐] 10 년이 되었습니다. [2] 카페알파9484 21/12/07 9484 2
94276 [일반] 오미크론+백신 조합 오히려 좋을수도 [268] 21288 21/12/07 21288 3
94275 [일반] [영화]인성논란을 통해 본 다크나이트 트릴로지(배트맨의 정의관) [20] 달렉10182 21/12/07 10182 9
94274 [일반] 한국 수출과 주식시장 [9] LunaseA16427 21/12/07 16427 20
94273 [일반] [책이야기] 소비의 역사 [6] 라울리스타8812 21/12/06 8812 10
94272 [일반] 고인물들이 봉인구를 해제하면 무슨일이 벌어지는가? [61] 캬라19318 21/12/06 19318 72
94271 [일반] 판타지 소설과 과학 [16] 레드빠돌이10219 21/12/06 10219 0
94269 [일반] 대구에 새 마스지드는 지어질 수 있을까요? [178] 라이언 덕후20641 21/12/06 20641 0
94268 [일반] [역사] 북촌한옥마을은 100년도 안되었다?! / 한옥의 역사 [9] Fig.117528 21/12/06 17528 35
94267 [일반] 증오하는 pgr에서 퍼간 글로 딴 추천은 달콤하더냐 [63] 오곡물티슈17193 21/12/06 17193 53
94266 [일반] 중국의 미래에 대한 잡생각 [46] 이연진16653 21/12/06 16653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