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등의 자(字)는 원룡(元龍)이며 서주 출신입니다. 광릉군 출신으로 짐작됩니다만 확실치는 않네요. 젊어서 동양현장이 되었고, 도겸이 서주의 주인일 때는 전농교위(典農校尉)를 맡아 농업을 진흥시켰습니다. 또 아버지 진규는 태수급인 패국상(沛國相)을 역임하기도 했지요.
도겸이 죽은 후 서주 사람들이 유비를 추대할 때, 처음에는 미축이 유비를 찾아갔고 그다음에는 진등이 방문했습니다. 진씨 집안이 당시 서주 일대에서 무척이나 영향력이 컸던 호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진등이 서주 사람들을 대변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때 진등의 말이 자못 인상 깊습니다.
[“지금 한실이 쇠퇴하고 천하는 기울고 있으니, 공을 세워 일을 이루는 것은 모두 오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지금 사군(使君. 주의 목이나 자사에 대한 경칭)을 위해 보병과 기병 십만을 모으고자 합니다. 위로는 군주를 보좌해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오패의 업적을 이루고, 아래로는 할거하여 변경을 지키면서 그 공을 사서에 길이 남길 만하지 않겠습니까!” [촉서 선주전]]
단순히 한실에 충성을 다하자는 의미는 아닌 것 같지요? 그보다는 더 큰 위업을 이루어 보자는 속내가 은연중에 드러나는 발언입니다. 진등 또한 야심가였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는 당대의 여러 세력가들처럼 자신이 직접 우두머리가 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영웅의 자질이 있는 주인을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주인이 바로 유비였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여포에게 뒤통수를 맞고 서주를 빼앗깁니다. 새로 서주를 얻은 여포는 진등을 후대하였습니다. 서주에 그 어떤 기반도 없는 그로서는 지역의 유력자를 무시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진등은 자신이 섬길 만한 사람으로 여포가 눈에 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은밀히 조조와 협력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포가 원술과 손잡으려 하자 진규는 그를 설득하여 원술 대신 조조 편에 서도록 합니다. 이때 사자로 진등이 파견되지요. 진등은 조조를 만나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여포는 용맹하지만 꾀가 없고 행동거지가 가볍습니다. 속히 도모하심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조조의 속내를 꿰뚫어 본 탁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당초 조조가 여포와 손잡은 건 일시적인 형편일 뿐이요, 실제로는 장차 여포를 토벌할 작정이라는 걸 파악했으니 저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답합니다.
“여포는 이리새끼 같은 야심을 가진 자이니 오래 기르기 어렵소. 그대가 아니라면 누가 그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었겠소.”
조조는 진등을 광릉태수(廣陵太守)로 삼고 그 아버지 진규의 관질을 높여 주었습니다. 또 여포를 평동장군(平東將軍)에 임명하였지요. 그런데 여포 입장에서 보니 돌아가는 꼴이 좀 이상한 겁니다. 자기는 원래 서주의 주인인 서주목으로 인정받길 원했는데 돌아온 건 그보다 격이 낮은 평동장군이었지요. 반면 진등이나 진규는 오히려 큰 벼슬을 받았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한 여포는 무기를 뽑아 책상을 찍으면서 거칠게 다그쳤습니다. 나는 원하는 걸 얻지 못했는데 너희 부자(父子)는 모두 존귀해졌으니 이건 나를 팔아먹은 꼴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진등은 능청스럽게 대답했지요.
“제가 조공(曹公. 조조)을 뵈었을 때 말하기를, ‘장군(여포)은 비유컨대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으니 고기를 배불리 먹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으니 배가 고프면 부릴 수 있으나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릴 것이오.’라 했습니다.”
꽤나 훌륭한 말솜씨입니다. 너 하기에 따라 서주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결코 직설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어리석은 여포는 이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혼자 납득합니다.
이후 여포가 자신을 배신한 데 분노한 원술이 한섬, 양봉과 연합하여 여포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진등이 계책을 내어 한섬과 양봉을 설득해 오히려 여포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여포군과 원술군이 바야흐로 격돌하려는 순간, 한섬과 양봉은 칼끝을 반대로 돌려 원술군에게 겨누었습니다. 그 일전에서 원술군은 그야말로 대패하여 죽은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모든 결과가 진등의 꾀에서 비롯되었으니 진등의 모략 또한 그 말솜씨만큼이나 훌륭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진등은 남몰래 조조를 위해 세력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조가 여포 정벌을 개시했을 때 조조의 편에 서서 선봉이 되지요. 여포는 결국 사로잡혀 죽었고 진등은 그 공으로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오릅니다. 이후 서주 남쪽을 지키면서 손책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손책은 살아생전에 끝내 진등의 방어를 뚫지 못했지요. 손책 사후 손권이 다시 서주를 공격했지만, 진등은 조조에게 구원병을 청한 후 복병을 써서 퇴각하는 손권을 추격해 대파합니다. 이런 업적으로 보아 군사적 능력 또한 상당히 뛰어났던 걸로 보입니다. 정말이지 다재다능하다는 평가가 이보다 어울릴 수 없네요.
이렇듯 진등은 여러 방면에서 무척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습니다. 식견과 통찰력이 있었고,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계략을 꾸미는 일에도 능했습니다. 또 군사를 부리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지요. 그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이미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오만하고 자긍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감복하는 반면 보잘것없는 자는 무시했던 걸로 보입니다. 여포를 대하는 진등의 모습과 조조, 유비를 대하는 진등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지요.
조조가 그런 진등을 무척 높게 대우하였음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유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비가 형주에 있을 때 유표와 더불어 천하의 인물들을 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명성 높은 선비인 허사라는 자가 말하기를, 진등은 비록 뛰어난 인물이나 너무 오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유비가 그 이유를 물었지요. 허사는 자신이 예전에 진등을 만났을 때, 그가 자신을 평상 아래에 앉혀둔 채 자기는 평상 위에 누워 말도 걸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유비가 말했습니다.
[“그대는 국사(國士. 나라의 뛰어난 선비)로 일컬어지고 있소. 지금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천자께서 거처할 곳을 잃었으니, 그대는 마땅히 집안일을 잊고 나라를 근심하며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품어야 하오. 그러나 그대는 사사로운 이익에만 관심을 둘 뿐 가히 들을 만한 말을 하지 않으니 원룡이 그대를 꺼린 것도 당연하오. 무슨 까닭으로 그대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겠소? 나 같으면 백 척 누각 위에 누워서는 그대를 맨땅에다 엎드리게 두었을 것이오. 고작 평상 위니 아래니 하는 걸 따질 필요도 없소. (중략) 원룡처럼 문무를 겸비하고 담력이 있는 자를 찾고자 한다면 응당 옛 선인들 사이에서 구해야 하지, 창졸간에 비할 만 한 자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위서 장막전]]
너 따위가 어딜 감히 진등을 평가하느냐는 촌철살인이요, 동시에 진등에 대한 극찬입니다. 그만큼 유비가 진등을 높이 평가한 거지요.
안타깝게도 진등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39세에 사망합니다. 삼국지에는 안타까운 죽음이 참 많은데 진등 또한 그렇습니다. 사인은 놀랍게도 기생충이었습니다. 화타전에 따르면 비린 회를 먹고 기생충이 생겨서 죽었다고 하네요.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만, 과거 정치권에서는 킹메이커라는 말이 빈번하게 언급되곤 했습니다. 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압도감이나 카리스마가 부족하지만, 대신 뛰어난 능력과 상당한 세력이 있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만한 사람을 지원해줄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등은 그 누구보다도 킹메이커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대호족으로서 서주 전체의 여론을 주도할 만한 위치에 있었고, 천하에 명성을 떨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직접 무언가를 하는 대신 자신이 섬길 만한 주인을 찾는 데 전념했죠. 도겸이 죽자 그가 고른 주인은 유비였습니다. 그리고 유비가 실패하자 다음 선택은 조조였습니다.
킹메이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겠습니까? 바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만한 자를 알아보는 안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양대 영웅을 주인으로 고른 진등의 안목은 실로 대단했다 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진등은 너무 일찍 죽은 탓에 그 재능을 다 펼치지 못했습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 또한 그 점을 무척 안타깝게 여겼지요. 그러나 그가 39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룬 업적만 보아도 그의 능력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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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태수 진등이 병이 들자 가슴속에 고민이 가득하였으며 안색이 붉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화타는 그의 진맥을 보고 말했다.
"당신의 위 속에 있는 몇 되의 기생충이 안에서 악성종기가 되려고 하는데, 날 것을 먹어서 생긴 것입니다."
즉시 두 되의 탕약을 만들어 먼저 한 되를 복용하게 하고, 조금 있다가 전부 복용하도록 했다. 탕약을 먹은지 얼마 안 되어서 세 되의 기생충을 토했는데, 붉은 색 머리는 모두 움직이고 있었으며, 반쪽은 아직 물고기를 얇게 저민 모습을 하고 살아있었다.
"이 병은 3년후에 또 재발합니다. 그때 훌륭한 의사를 만나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
과연 화타가 말했던 기일에 병이 재발하였는데, 그 당시 화타가 살아있지 않았으므로 말한 것처럼 죽었다.
여포를 대하는 진등의 모습이나 공손찬을 대하는 하북의 호족들의 모습을 보면 유학적 질서관을 가진 호족 재사들이 그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서주 백성을 학살한 조조나 황제를 갈아치우려 한 원소를 섬기면서까지 여포나 공손찬은 부정했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