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재수한 후 08학번으로, 대학 신입생이 된 지 10년 가까이 된 아재라서 다소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개강시즌만 되면 대학교 군기가 Issue가 되고 있기 때문에 기억 나는 대로 제 대학시절 일화를 몇 가지 적어봅니다.


신입생 시절 저는 아웃사이더도, 인사이더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친했던 친구들 몇 명하고만 재미있게 놀고 그랬지, 진성 인사이더처럼 막 몰려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회에 있는 동기들 몇 명은 알았지만, 선배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는 위치였지요. 그럼에도 학생회의 선배들이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 후배들 중 하나였는데 그 이유는 제가 학번이 높다는 이유로 후배에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하는 선배들을 싫어하는 티를 조금씩 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안면이나 친분 없는 선배에게도 단체로 다 인사하는데 혼자 안한다던가, 선배라고 살갑게 말 걸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무언가 의식적으로 그랬다기 보다는 그냥 그런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싫어했다는 말이 맞겠네요.


하루는 2학기 개강 총회였습니다. 학생회에서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파티를 개최했고, 참가비 내면 술과 안주는 무한으로 먹을 수 있는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평소 학생회에서 후배들에게 군기 잡는 걸로 유명한 두 학번 위 여 선배가 있었는데, 이 날 갑자기 입장하려는 저에게 다소 살벌한 말투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기 테이블로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아마 평소에 인사도 잘 하지도 않고 살갑지도 않았으니 이 때가 기회라고 군기 좀 잡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확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예의도 없는 그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시하고 제 친구들 테이블로 갔지요.


그렇게 개강 총회가 끝나고 친구 자취방으로 가서 보드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여 선배에게 전화가 오더군요. 전화를 받으니 그 분은 저에게 찰진 욕을 하면서 지금 당장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술이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 내일 정신차리면 그 때 이야기 하자고 말하고 주저리주저리 떠는 선배의 말을 무시하고 끊었지요. 그 다음 날 학교 수업에 들어가니 동기들이 공공의 적이었던 선배를 한 방 먹인 영웅 취급을 해주더라구요. 속이 시원하다, 니가 짱이다 등. 여 선배였던 지라 여 동기들을 더 많이 괴롭혔는데, 그래서인지 여 동기들도 쉬는 시간에 와서 계속 잘했다고 칭찬하더군요. 아마 제 인생에서 가장 여자한테 인기가 많았던 한 주였을 겁니다(그 다음 주 부터는 정상치로 회귀....). 제가 딱히 잘 한 것도 없지만, 잘 못 한 것도 없기 때문에 학교 다니면서 불이익이나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족보 이런 건 뭐 원래도 안 받고 다녔구요.


또 한 가지 기억나는 일화는 복학생 05학번 형이었습니다. 학교 다니다 보면 꼭 있는 신입생 때 학점 망쳐서 복학 후 유급한 형이었죠. 일반수학(미적분학)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신입생들 교양과목에서 모이면 쉬는 시간에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불과 1년 전까지 고등학생이었던 데다 학과내에 최신 뉴스에 대해 엄청 이야기 많이 할 시기이니 시장바닥 분위기였죠. 그러자 이 복학생 형이 영남 사투리로 쉬는 시간에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조용히 하거나 나가서 떠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쉬는 시간에 면학 분위기를 만들자는 것은 좋은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으니 서로 배려를 하자’ 라는 식의 학교 선배로서 권유가 아닌 학번이 높다고 다른 학생들에게 명령을 하니 그것이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수업 분위기가 막장이었던 것도 아니었구요. 다들 수업시간엔 열심히 참여를 하고 쉬는 시간에만 좀 시끄럽게 떠드는 분위기여서 다소 불쾌할 수 는 있어도 크게 문제가 있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형은 다른 교양과목 시간에도 후배들에게 이런저런 잔소리 및 명령을 하던 것으로 유명한 형이었죠. 따라서 제가 그 잔소리들을 다 무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자 어느 날 복도에서 그 형이 저에게 ‘니 내가 마음에 안드냐?’라고 말을 하더라구요. 일단 개인적 친분도 전무한 상태에서 처음부터 반말로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히 말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형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매번 명령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면 편하게 지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구요. 그 때 형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대화 이후 확실히 그 형도 그런 명령조 말도 줄어들었고, 저도 그다지 보복성을 당했다랄 것도 없이 무탈하게 신입생 생활을 마쳤습니다. 물론 제가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는 그 여 선배나 05학번 형도 더 이상 마주칠일이 없었구요.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가 이랬다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지금은 한 달 한 달 월급 먹고 사는 직장인인지라 저 시절의 패기 따윈 없습니다. 지금은 생계가 걸린 문제이니 회식에서 과장님 잔소리 하면 리액션 및 공감하는 연기력이 남우주연상 감인 무기력한 사회인 중 하나 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저 시절에 선배들에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잃을 게 없어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대학시절은 돈도 명예도 없는 시절입니다. 잃을 게 없어요. 사회 생활처럼 상사한테 반항했다가 회사 내에서나 및 업계에 이미지 타격 입어서 저성과자 되는 곳도 아니구요(의학계열, 예체능 계열은 예외겠지만). 극단적으로 남학생 한정으로 신입생 때 씻을 수 없는 흑역사 만들어도 군대라는 훌륭한 리셋 버튼도 있구요. 여학생도 요즘엔 휴학을 자주하는 추세이기도 하구요.


한 가지 확실한 건 당하는 입장에서 부당한 건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윗물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 습성이 그렇죠. 얼마 전 한 대학교 OT에서 새벽에 PT 시킨 사건, 부당함에 거부하는 인원들이 한 10명만 되었어도 시키지도 못하지요. 그래 봤자 불이익은 족보 못 받거나 학생회 인사이더 못 되는 것 정도뿐입니다. 그러면 대학시절엔 동아리 활동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잖아요. 특히 신입생이라면 동아리 여기저기 간 보면서 밥 얻어먹고 돌아 다녀도 다 받아주는 특권도 있구요.


결론적으로 지금 이 시간 알게 모르게 군기에 쪼임 당하고 있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은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인데 대학시절이 딱 그 시기입니다. 게다가 인생에서 조직문화에 얽매이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시기 이구요. 부당한 짓 하는 선배 있으면 부당함이 잘 못 되었다고 표현을 하세요. 돈이나 인간관계 등에서 잃을 게 없기 때문에 그래 봤자 손해도 별로 없어요. 모든 권리는 투쟁을 통해 얻어집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야 학교에서도 문제를 인식하여 자정노력을 하고, 그래야만이 이 나라의 대학교 꼰대 문화가 어느정도는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