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7/02 21:50:18
Name 웨이P
Subject [일반] 6년 전 이야기
제목을 뭘로 할지 모르네요. 생각해보니 착잡하고 힘들어서 적어봅니다.
6년 전 일인데도 너무나도 생생하여 적어봅니다.

6년 전,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1학기 끝나고 종강했던 날.
걱정이 심해 종강파티 하나 즐기지 못했던 저에게 한 복학생 오빠가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그 복학생 오빠는 저희 반의 단합과 신입생들의 적응을 책임졌기에 정말 믿음직한 오빠였죠.
무슨일이냐고 물어보는 오빠에게 성적관련한 이야기를 해주니까 그 오빠가 이렇게 얘기했죠.

"지금 종강파티라도 즐겨. 성적표는 성적나온날에 걱정하면 되니까. 두번째 학기에서 더 잘하면 되고."

대학교 1학년, 실기가 많은 저희과 특성상 수시합격(실기시험 안 봄)으로 들어온 저는 적응을 도저히 할 수 없었고 조별과제에서 늘 아웃사이더였습니다. 그 복학생 오빠는 자기 조에 넣어주고 싶어도 이미 꽉 차서 애매하니까 다른 조와 대화를 해서 저를 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조에서 저는 친구를 만들 수 있었고요.
그 오빠는, 어떤 대화를 해도 마음이 편하고 신입생들을 지탱해주는 가이드이자, 과 조교님 이상으로 믿음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희과가 다른과에 비해 유독 단합이 안되는데 그 오빠만이 단합을 하려고 애썼고, 결국 1학기 끝날때쯤 되서야 저희과는 단합이 어느정도 완성되어갔습니다.

이 날 종강파티 때 걱정되는건 성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독 불길한 느낌이 많이 들더라고요. 불길해서 주변 상황을 계속 둘러보았습니다. 종강파티는 다행히 별 사고없이 끝났습니다. (종강파티는 이른시간인 8시에 끝났습니다.)
저는 집에 들어갔는데 삐삐 거리는 휴대폰 소리가 나더라고요. 제 폰 배터리가 너무 없는겁니다. 평상시보다 휴대폰을 보지도 않았는데 유독 배터리 소모가 커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끄고 배터리 충전기에 꽂고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었습니다. 불길함을 잊으려고요.

그런데 불길함이 아무리 생각해도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잠을 계속 설치고 또 설친 끝에 자다가 다음 날 오전 10시에 일어났습니다. 방학 첫날이라 꿀잠을 잤다고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불길함. 느낌이 너무 쎄하니까 저는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켰습니다. 이 날 문자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하면 되겠다라는 심정으로 컴퓨터를 키고 네이트온을 켰습니다.
그런데 네이트온의 과 선배가 저한테 메세지로 얘기하더군요.

"너 왜이렇게 연락을 안받아. 전화기가 꺼져있었어."

저는 선배의 말에 답장을 했습니다.

"죄송해요.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요. 그런데 무슨일이에요?"

나의 메세지에 선배는 다시 답장을 보냈습니다. 충격적인 답장..

[xx형이 돌아가셨어. 어제.]

저는 깜짝놀라서 다시한번 주변사람에게 확인을 했는데 맞았습니다.. 돌아가셨다고요.

복학생 오빠의 죽음. 저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았습니다. 과에서 돌린 사망소식이 있더군요. 오빠의 집 근처의 대학병원이 장례식 장소였습니다.
멍하니 눈물밖에 안나더라고요. 전 날 그렇게 저랑 선명하게 수다를 떨던 사람이, 저에게 확실한 어드바이스를 던져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 미처 얘기도 못하고 황급히 검은 양복을 입고 집을 나왔습니다.

병원 지하에서 교수님과 만났습니다. 상황을 대략 설명해줄 틈도 없이 멍한 제 표정을 본 교수님은 장례식장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그저 멍했습니다. 환하게 웃는 복학생오빠의 영정사진.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불과 하루 전부터 불길했던 느낌이 이거였을까요? 저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대학교에서 보낸 조화, 상복을 입은 사람들, 슬프게 울고있는 복학생 오빠의 여친..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꿈이 아니라고. 악몽이 아니라고.

저는 국화꽃을 올리고 절을 했습니다. 여친은 하루만에 초췌해져있었고, 복학생 오빠의 아버지께서는 울 힘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상황설명을 들었는데 그저 어이가 없었습니다.

심야에 만취한 택시기사가 이 날 술도 안마시고 평범하게 오토바이타고 드라이빙했던(안전수칙도 준수했습니다) 복학생 오빠와 친구를 치고 뺑소니를 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복학생 오빠의 친구는 수술받고 무사히 끝났지만 복학생 오빠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복학생 오빠는 현장에서 사망한 사태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 사고가 심야에 일어나서 목격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피해보상을 받기가 힘든상태이더라고요. 저는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울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복학생 오빠의 여친과 친했던 저희과 1학년들은 선배 영정사진앞에서 술마시면서 엉엉 울고있었고 저도 슬펐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휴지를 주면서 눈물을 닦아주고 다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들어도 울지말고 의연하게 있으라는 복학생 오빠의 조언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울음이 나오는걸 어쩌겠나요. 다독이면서도 울음이 나오더라고요. 의연하게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복학생 오빠는 화장해서 지금 경기도의 한 납골당에 있습니다. 항상 복학생 오빠의 기일에는 저희과 1학년들과 친했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러나 재작년부터 다들 취직하고 바빠서 그런지 몰라도 자주 모일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디자인회사에서 일하던 중이라 만날 수 없었고요.

얼마 전 기일에도 모두 맞추지 못했고요. 현실의 슬픔을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2학기 때 그 오빠의 자리를 보면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수님도 출석부를 보다가 복학생 오빠의 이름을 부를려고 할 때 말을 잇지 못했고요. 저도 당시에 말을 잇지 못했어요. 아무리 지금 여기에 없더라도 한 학기 동안 함께했던, 좋은 사람인데 어떻게 잊겠나요.

그리고 그 오빠의 여친은 그 사건 이후 술집에서 일하며 다른 남자들을 꼬시고 다니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제 친구였지라 저는 따졌습니다. 슬퍼도 그렇게 있지말고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그 오빠 몫까지 꿈을 이루라고. 그 친구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얼마 후, 휴대폰으로 친구와 전화하던 그 친구의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잊지 못하겠어.. 아무리 다른 남자들 만나도 어떻게 잊는데.. 첫사랑인데..]

저도 그 때 홀더폰에 그 오빠의 전화번호가 있었고 그 전화번호를 보면서 그 오빠의 빈자리를 다시 한 번 실감했고요.

너무나도 실감났던 이야기인지라 슬프고 비참해서 적어봅니다..
길었던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살려야한다
16/07/02 22:01
수정 아이콘
정말 가까운 사람의 예상치 못한 죽음을 겪으면 삶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대학교 때 지인의 죽음을 겪어서 남 이야기 같지 않네요.
그런데 목격자가 없는데 어떻게 택시기사의 만취운전인지 알 수 있었나요?
16/07/02 22:10
수정 아이콘
슬프네요.
mapthesoul
16/07/03 02:56
수정 아이콘
찡하고 아련하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6121 [일반] [비밀은 없다] 난해한데 묘하게 흥미가 가는 영화 [8] Cherish5122 16/07/03 5122 0
66120 [일반] [서브컬쳐] 러브라이브 선샤인 TVA 첫 방영 및 기타 소식들과 잡담 [24] 시네라스6309 16/07/03 6309 2
66119 [일반] 유럽 역사 최악의 제식 소총 [34] blackroc8235 16/07/03 8235 3
66118 [일반] LG페이는 과연 언제 나올까? [59] 에버그린10504 16/07/03 10504 2
66117 [일반] (머투) 세계 금융시장 '브렉시트'에 웃었다…"모두가 승자" [6] blackroc10240 16/07/03 10240 1
66116 [일반] 개인적으로 지내본 판교 원룸형 오피스텔 평 [20] 삭제됨21830 16/07/03 21830 5
66115 [일반] 사랑하는 혼성 듀엣곡들 [65] 비익조10286 16/07/03 10286 5
66114 [일반] 오직 목성(木星) 하나만 보고 5년을 날아왔다... [36] Neanderthal10836 16/07/03 10836 25
66113 [일반] 고백(1) [23] 삭제됨6308 16/07/02 6308 3
66112 [일반] 정동영의원 "처음 들었다" [78] 만우13003 16/07/02 13003 0
66111 [일반] [해축 오피셜] 헨리크 미키타리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적 [40] 반니스텔루이7929 16/07/02 7929 0
66110 [일반] 지도와 함께 보는 255년 강유의 북벌. [7] 선비욜롱7100 16/07/02 7100 1
66109 [일반] 새로운 안드로이드 7.0 닉네임 공개, 누가(Nougat) [46] 여자친구9477 16/07/02 9477 0
66108 [일반] 6년 전 이야기 [3] 웨이P3934 16/07/02 3934 1
66107 [일반] [잡담] 정신과 의사 비판 : 어느 환자가 만난 몇몇 의사만을 중심으로 [33] 학자11636 16/07/02 11636 26
66106 [일반] LG G5의 모듈화는 과연 혁신이었을까? [68] 에버그린10317 16/07/02 10317 9
66105 [일반] <삼국지> 곽충5사와 교병제交兵制 등에 대한 의견. [3] 靑龍3932 16/07/02 3932 0
66104 [일반] 왜 존재하는가 [24] 법대로5184 16/07/02 5184 0
66103 [일반] 결과적으로. 대한체육회는 박태환의 리우행을 오히려 열어 준 꼴이 되었습니다. [72] The xian14295 16/07/02 14295 11
66102 [일반] 국민의당 리베이트 사태 최후의 승자는 박지원? [33] 에버그린7959 16/07/02 7959 0
66101 [일반] 비교적 근래에 데뷔한 더블A 이하 걸그룹 중 몇팀 단상 [17] 좋아요6212 16/07/02 6212 1
66099 [일반] 커피숍 직원분과 썸타고 싶었다던 글쓴이의 중간 후기입니다.-_-; [83] This-Plus14440 16/07/02 14440 4
66098 [일반] [MLB] 오피셜 박병호 트리플a로스터확정.twt [10] 김치찌개7548 16/07/02 7548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