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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12:14
제가 난독증인지...... 도저히 무슨 주장을 하고 싶은 글인지 이해할수가 없네요. 그리고 이건 기사 글자수 제한 규정에 어긋나지 않나요? 번역이 재창작은 아닌데 말이죠.
25/02/05 12:42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기사 글자수 제한 제재는 국내기사 한정으로 적용되어 왔습니다. (국내법 판례 때문에 생긴 규정이라서요)
25/02/05 14:13
예전에는 게임뉴스 게시판을 운영하고 거기에 기사들을 옮겨왔었는데 관련 언론사에서 무단전재에 대한 항의가 있었지요.
그 때문에 생긴 규정입니다.
25/02/05 13:17
종교, 믿음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거나 어떤 종교가 옳은지 알아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서 시작조차 포기하지 말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파트부터 접근하면서 종교를 탐구해보라는 취지로 읽힙니다. 물질주의가 완전히 주도권을 쥔 세상이 삭막하다거나 내면이 고갈되어간다고 느끼는 사람이 읽어보면 좋을 글이네요
25/02/05 13:21
읽기가 쉽지 않은데요 AI의 도움이 필요해서 딥시크에 넣어봤습니다.
"결론 이 에세이는 종교적 탐구가 단순히 하나의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적 경험과 지혜를 통해 궁극적인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임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종교적 선택의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진리를 찾고자 하는 진실한 욕망이 어떤 종류의 보상을 찾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다양한 종교 전통 사이에서 길을 찾고자 할 때 유용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개인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이미 무신론자인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 종교에 빠져든다는게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만약에 진리를 원하는 현대인이 있다면 어떤 종교든간에 자신이 끌리는 종교에 빠져드는것이 좋다는거군요 뭘 선택하든 진리에 수렴하게 될것이다...는 솔직히 납득이 잘 안가네요 아무튼 본인이 무신론자이지만 특정 종교에 끌림을 느끼고있고 망설이고있다면(가정이 좀 많네요) 망설이지 말고 귀의하라는게 요지라고 봐야겠네요
25/02/05 13:34
80억명의 사람은 80억가지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엄연히 별개의 세계인 것을 두고 공통점을 찾아 합치려드니 각자의 신앙이 각론에서 충돌해 모순이 생기죠.
단, 우리가 찾아낸 진리의 사영인 과학적 발견을 부정하는 신앙은 교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25/02/05 13:47
독실한 개신교인 어머니 때문에 반감으로 무교인이 되었는데 나이 먹어 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종교에 몰입하는 사람도, 극단적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도 그 자체로 신앙이 아닐까라구요. 종교에 대한 어머니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기에 기독교 계통으로 출석만 해보려고 하는데 삼프로 TV를 보고 천주교가 끌리더군요. 개신교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천주교는 믿음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삶(선행)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더 와닿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저런 교리적 차이와 우리나라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개신교가 보수화 되었는지도 생각이 들더군요.
25/02/05 14:30
종교를 부정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두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종교를 믿고 싶은 사람의 자기합리화로 들립니다.
산타가 없다고 하는 사람한테 산타가 없다는 믿음도 신앙이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종교를 극단적으로 부정하지 않아도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유니콘, 구미호, 제우스와 하데스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강력히 부정하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인들이 믿는 신이라는 존재는 그냥 어나더 산타고 어나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일 뿐입니다.
25/02/05 14:50
신앙보다는 신념에 가깝기는 하죠. 어차피 양측 주장 모두 증명은 불가능하며, 어느쪽을 따를 것인가는 개인의 철학적 신념에 따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25/02/05 16:27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자세가 문제라서 말이죠
철학의 근원은 질문이고 거기서 질문을 거세하고 "내 말이 옳아!"라고 윽박지르는게 종교적 자세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사이비를 제외한 거의 대다수 종교의 교조들은 현실 세계에 대한 적극적 탐구와 탐문 후 올바른 대답을 내놓기 위한 충분한 사유를 거친 뒤 결론을 내릴 것을 설화와 교리를 통해 숱하게 강조하긴 합니다만은 생각하기 귀찮아하는 사람들 눈에 들어오는 글귀는 그저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같은 문자의 편린 뿐이었고 이걸 역사에서는 보통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사용해왔죠 그러니 "그 또한 종교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그 의견을 존중하지만 그걸 생각에 그치지 않고 굳이 다른 사람한테 "내 말이 옳아"라고 설파하는 것은 전형적인 종교인들의 종교적인 자세로 보여서 동의하기가 어렵네요 아담이 이름 지을 권리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면 개념과 타인의 발언을 경솔하게 규정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아실거라 봅니다
+ 25/02/05 18:46
저는 두분다 일리가 있다 봅니다.
'일부 전투적 무신론은 종교와 같다'라고 하면 뭐 크게 틀린건 아닙니다. 세상에는 무신론도 다양하죠. 무신론 철학자 존 그레이가 'Seven Types of Atheism'이란 책을 썼죠. 마르크스주의자 테리 이글턴의 리뷰 번역해 드립니다. - Seven Types of Atheism by John Gray 서평 - 모든 무신론자가 뒤집어진 신자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조셉 콘래드까지 다루는 인상적으로 박학다식한 이 저작은 물질 세계 자체에서 충분한 신비를 발견하는 무신론을 포용합니다. 테리 이글턴 최근 몇 년간 인류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가들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매트 리들리, 샘 해리스는 기근과 대학살이 지구를 얼마나 망가뜨리든 진보를 믿는 이성적 인본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크게 개선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서구 계몽주의 가치로의 이러한 회귀는 급진적 이슬람의 위협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철학자 존 그레이의 역할은 이러한 낙관론자들 사이에서 예레미야처럼 행동하며, 우리가 예전만큼이나 못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혐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상적 변혁을 위한 계획들입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지 않으며, 역사가 단지 찍어내고 파헤치는 소리에 불과했다고 보는 철저한 인간혐오주자입니다. 기독교가 그레이만큼 비관적이면서도 훨씬 더 희망적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합니다. 역사가 발전해 왔는지에 대한 답은 분명히 예스와 노우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에게 현대는 매혹적인 해방이자 긴 악몽이었습니다. 핑커나 리들리의 눈이 휘둥그레진 낙관론은 페미니즘, 회전식 건조기, 항생제와 같은 현대의 발명품들에 대해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종말론자들만큼이나 일방적입니다. 사실은 모든 사람이 진보를 믿지만, 도킨스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유물들만이 진보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사실상 열린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크게 개선된 미래를 옹호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존 로크 그레이에 따르면 존 로크의 자유주의는 억압된 종교입니다. 그레이는 또한 인본주의자들이 자기기만 상태에 있다고 믿습니다. 대부분이 무신론자이지만, 그들은 단지 신 대신 인류를 대체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하는 바로 그 종교적 신념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실, 그레이가 보기에 대부분의 이른바 세속적 사상은 존 로크의 자유주의에서부터 자코뱅파와 볼셰비키의 천년왕국론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억압된 종교입니다. 무신론과 종교가 반대라는 대중적 믿음은 그의 관점에서 보면 실수입니다. 그레이는 또한 종교를 우주를 이해하려는 원시적인 시도로 보고 과학이 나중에 이를 대체할 것이라고 보는 종류의 무신론을 비판합니다. 그레이는 다행히도 종교가 세계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삶의 형태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종교는 믿음의 체계라기보다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마르키 드 사드, 도스토예프스키, 문학 평론가 윌리엄 엠슨과 같은 광적인 신 혐오자들 역시 뒤집어진 신자에 불과하다며 퇴짜를 맞습니다. (엠슨은 기분 좋은 과시로 "신은 인간의 검은 마음이 아직까지 발명한 것 중 가장 사악한 것"이라고 썼습니다.) 남는 것은 신을 포기하면서도 인류에 대해 낮은 평가를 하는 종류의 무신론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옥스브리지 교수 휴게실에서 발견할 수 있을 테니, 그다지 충격적인 결론은 아닙니다. 이성적 인본주의자들과 달리, 그레이는 이성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하지만 이성이 인간사에서 모든 것을 관통하지는 않더라도, 이성이 없다면 우리는 멸망합니다. 그는 완벽한 사회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현재보다 상황이 실현 가능한 수준에서 훨씬 더 나아질 수 없다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됐습니다. 그는 인류의 어리석음을 즐기면서도 그 놀라운 미덕들은 조심스럽게 넘어갑니다. 또한 18세기 계몽주의의 인종차별주의를 다루면서도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는 자신의 우울한 전망이 보편적 진리라기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어두운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영웅 중 한 명은 19세기 사상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인데, 그는 아마도 가장 우울했던 철학자로, 인간의 삶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스러운 의지에 의해 추동되고, 세계는 환상이며 인류 역사 전체가 피로 물든 전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레이는 정치적 유토피아주의자들의 절대적 진리보다는 무의미함을 받아들이고 싶어합니다. 유일한 의문은 그가 왜 처음부터 이렇게 터무니없이 양극화된 선택지를 제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레이는 할리우드 영성으로 대표되는, 내용 없는 초월성으로 향하는 현대 사상가 그룹에 속합니다. 그레이는 조지 스타이너를 대표로 하는 현대 사상가 그룹에 속하는데, 이들은 세속적인 것을 경멸하면서도 교회나 시나고그로 자신을 끌어가지는 못합니다. 대신 그들은 일종의 내용 없는 초월성으로 향하는데, 이는 이른바 할리우드 영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가장 좋은 예시입니다. 카발라나 사이언톨로지를 가볍게 다루는 유명인들은 너무 많은 운전기사, 마사지사, 은행 계좌, 수영장으로 가득 찬 물질세계로부터의 도피처로서 이를 행합니다. 영적인 것은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의 반대이며, 이는 그레이가 덜 사치스러운 방식으로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이는 유대-기독교의 관점이 아닙니다. 예수가 배고픈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방문하는 것으로 구원을 이야기할 때, 그는 영적인 것이 우선적으로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라고 보는 독실한 유대인으로서 말합니다. 종교에서 다른 세상의 위안을 구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경고, 즉 그의 말씀에 충실하다면 자신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에 분명히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대교의 또 다른 측면은 우상 파괴입니다. 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는 신의 유일한 형상이 인간의 살과 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교의 신은 미래의 신이기 때문에,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새겨진 형상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로 금지됩니다. 게다가 미래를 지금 여기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미래가 될 수 없습니다.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혐오하는 그레이라면 분명히 동의할 것입니다. 그가 인정하기 더 어려울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유일한 이미지가 현재의 실패라는 점입니다. 구약의 예언자의 임무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지금 여기서 그들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즉 가난한 자들을 부자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가치 있는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을 읽으라고 아내를 독려했던 세속적 유대인 마르크스는 미래에 대한 비전 금지에 충실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저작은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악명 높습니다. 유토피아적 사고와 격렬한 논쟁으로 경력을 시작한 저자에게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반마르크스주의자인 그레이가 이를 언급하지 않는 것도 놀랍지 않습니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을 두렵게 하는 것 『Seven Types of Atheism』은 영지주의자들에서 조셉 콘래드까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버트런드 러셀까지 다루는 인상적으로 박학다식한 저작입니다. 결국 이 책은 더 높은 세계로 보충할 필요 없이 물질 세계 자체에서 충분한 신비를 발견하는 종류의 무신론에 안착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도킨스의 종교적 복음주의에 대한 복음주의적 캠페인만큼이나 빅토리아 시대로의 회귀입니다. 조지 엘리엇과 같은 작가들은 신의 죽음에 휘청거리며 우주의 헤아릴 수 없는 복잡성에서 위안을 찾았습니다. 그레이는 세속적 인본주의를 다른 수단에 의한 종교의 연속이라고 비난하지만, 물질을 넘어선 어떤 모호하고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에 대한 그 자신의 신념 역시 정확히 같은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25/02/05 13:58
학생일 때 생각으로는, '진실에 기반한 진리를 좇아야지 처음에 믿음으로 시작하는 게 말이 돼?' 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이 들면서 그냥 뭐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쁘지 않지로 변하더군요. 삶이 아주 길고 시간이 많다면 진실을 좇겠지만 갈수록 살 날이 줄어드는 인생이라 적당한 시점부터는 실용주의적으로 갈 수 밖에요. 신이 있다는 쪽이든 없다는 쪽이든 일단 나한테 도움되는 걸 해보는 걸로.
25/02/05 18:20
신지가 에바에 타는 주의입니다
https://namu.wiki/w/%EB%B3%B5%EC%9D%8C%EC%A3%BC%EC%9D%98 기독교의 여러 말씀중 특정 분야에 더 집중하는 주의 입니다. 믿음을 통한 [구원]을 중시하는데 현세적 믿음이 아닌 후세적 믿음이죠(이번 생에 이 땅에 천국을 만들긴 글렀으니 구원이나 받자) 주로 미국 기독교과 강한 복음주의고 그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 기독교도 복음주의가 매우 강합니다. 개인적으론 기독교를 인스턴트 종교로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한 패스트푸드형 기독교라고 생각하는데 단지 개인적 생각일 뿐입니다.
+ 25/02/05 18:50
사실 톰라이트가 신학계에 대세가 된 지금은 낡고 도망치는 신학이긴 한데 권력자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안온한 믿음이라 잘 쓰이죠. 한국도 그렇고요.
+ 25/02/05 20:36
톰라이트의 칭의학은 신학계에선 대세가 된지 모르지만 현실 교회에선 아닙니다.
행위 -> 구원 이라는 카톨릭에서 믿음 -> 구원 이라는 단순함으로 교세확장에 꽤나 도움이 되었지만 (무조건적인 은혜로의) 구원 -> 믿음 이라는 아가페적 결과론적 무조건적 인 방향으론 아무쪼록 가기 어렵겠죠 그럼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고 그럼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없고 목사라는 직업이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인간은 보통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는 법을 잘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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