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2/10/02 22:37:43
Name ijett
Subject [진짜잡담] 인사동길을 걸으며.
전공 과제가 인사동 도시 설계인 관계로, 짬이 날 때면 - 집에선 좀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 일부러 인사동길에 들르곤 합니다. 건축가들은 인사동길을 이야기할 때마다 염화시중-_-의 미소를 떠올린다고 하지만, 마감에 맞추어 과제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염화시중의 미소는 커녕 자비나 빌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묵직한 화두로 가득찬 길이기도 합니다. 전통, 현대, 길, 도시, 정신, 자본, 문화, 소비, 역사... 한두 가지만 골똘히 생각해 봐도 머리가 무거워질 만한 이야깃거리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그 길.
(디카와 허수룩한 옷차림과 귀차니즘으로 무장하고 인사동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여대생;; 비슷한 물건이 보인다면 저거 혹시 ijett 아닐까... 하고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

제가 인사동 길을 처음 걸었을 때 이미 그 길에는 기와색 전돌이 깔리고 돌벤치가 놓여 있었죠. 따지고 보면 저는 아주 최근의 인사동길만을 아는 셈입니다. 서울이 보내온 시간들은 - 다른 곳에서처럼 그냥 흘러가 버리지 않고 - 한 층 한 층 고운 켜를 드러내며 그 곳에 쌓여 있습니다. 간판부터 예스러운 옛 골동품 상점들과 필방, 지물포, 고서점, 묘한 향기와 가야금 소리가 흐르는 전통 찻집과 술집, 가게 앞 좌판에서 웃고 있는 탈과 불두(佛頭)와 옛 동전. 그 안에서는 잠시나마 도시를 잊을 수 있는, 작정하고 길을 잃고 싶어지는 아기자기한 골목들. 외국인들에게는 Mary's Alley라는 애칭으로 유명해진, 서울의 사랑스러운 오솔길.

시간은 흐르고, 길은 변해 갑니다.
차 없는 거리제가 시행된 것이 구십칠 년의 일. 이른바 '소비대중'이 물밀듯이 인사동길로 들어왔습니다. 거리 자체의 예스럽고 차분한 분위기에 호기심을 느낀 젊은 세대들이 대부분이었죠. 이들에게 골동품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고 비싼 옛날이었습니다. 이제는 평일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 촘촘히 모인 조그만 가게들을 헐고 잘게 나누어진 필지들을 모아 여러 층 대형건물로 개발해도 채산성이 맞습니다. 말소리도 높이기 힘들었던 그 길 곳곳에서 망치소리가 울립니다. 인사동의 얼굴이었던 열두가게가 헐릴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인사동을 낳은 골동품점들은 소리없이 하나 둘 인사동길을 떠납니다. 문을 닫는 화랑들도 생겼습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어김없이 젊은 세대들을 겨냥한 음식점과 술집들이 들어섭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은 이 길, 그리고 말없이 이 길을 포위하고 있는 현대의 그늘.

숱한 화두가 웅크리고 있는, 내겐 너무 벅찬 그 길을 걸으면서, '변화'에 대해 생각합니다. 무언가 제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사람 사는 공간은 다 변하게 마련이라고. 그것이 순리이고,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라고. 그 변화들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결코 변하길 원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해도, 지키고 싶은 그 무언가가 있다 해도... 결국은 고집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생각일 뿐이라고. 과거의 분위기를 고집하지 말고,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꾀하라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로 지금,이 거리에서 살아야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요? '내면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변화가 정말 가능할까요? 시집 '농무'의 서문에서 백낙청 씨가 쓰신 것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자기를 짓밟아야 하고 좀 잘산다는 말을 듣자면 자기와 남들을 아울러 짓밟아야 하는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끼리 떳떳하고 정직하고 또 평등하게 주고받는 이야기며 노래로서의 시가 번창하기란 힘든' 이 시대에, 조화로 귀결되는 자발적인 변화는 정말 가능한 걸까요? 그 공간을 이루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대에, 그 사람들이 제가끔 내는 목소리가 결국엔 어울려서 지금까지 지켜온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는 게 가능할까요? 단 한 사람만 침묵 속의 규칙을 거부해도 무너져 버릴 수 있는 것이 '분위기'인데, 그런 위태로운 기반 위에서 과연 바람직한 변화가 가능한 걸까요?

삭막한 도시 속의 작은 기적, 여전히 나를 미소짓게 하는 샘물,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몸부림.
혼자 인사동 골목길을 걷다가, 뜬금없이 PgR을 떠올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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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글이 하염없이 길어졌군요.
83생이라고 얘기하면 혹시 1883년생이 아니냐는 말을 종종 듣는,
한 괴짜의 넋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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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0/02 23:07
수정 아이콘
서울에서 근무할 땐, 5년전에 떠났지요. 인사동을 자주 갔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멀지 않아서 걸어서 잘 갔지요.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전 정신에 허영심을 입히고 싶을 때, 그럴때 혼자서 갔습니다.
요즘은 가운데 도로가 새로 뚫렸더군요. 그래도 뒷골목의 찻집은 그대로 있어서... 반가웠구요. 여기저기 전통 찻집이며 갤러리 찾아 다니는 재미가 좋았는데,
그립군요. 부산엔 그런 곳이 없어서 말이죠.
얼마전에 식용오이님께서 교보문고 얘기 하실때도 불현듯 그리움이 밀려와서 인터넷 지도 펼쳐서 무교동이며, 세종로며, 종로거리 찾아 봤었답니다.
진작 하고 싶은 말은...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말씀 올려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Elecviva
02/10/02 23:16
수정 아이콘
같은 83년으로서 조금은 질투가 나는 너무 좋은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02/10/02 23:18
수정 아이콘
인사동 하면 그윽한 분위기나 정취를 느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좀 재미난 기억이 많습니다.
특히 어느 뒷골목 숙박업소가 참으로 재미있었어요. 딱 '조용한 가족' 분위기였습니다. 요즘은 잘 안 가서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포장마차촌은 있겠지요? 거기서 마시다 땡기면 홍대까지 날아가 락바 가고 그랬었는데.
"숱한 화두가 웅크리고 있는" ijett님 말씀의 공간 못지 않은 곳은 제게 대학로인데. 여러 것들이 섞여 있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날 좋은 날, 사람 구경하기에 좋지요. 뭐, 이런 저런 생각이....
스카티
02/10/03 00:04
수정 아이콘
82년생이라고 우겨봐도 혹시 70년생이 아니냐는 말을 '자주'듣는 저에겐 ijett님의 마지막 에필로그가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 ㅠㅠ
sebastian
02/10/03 00:29
수정 아이콘
음..저도 요즘 인사동 도시계획이 과제인지라 인사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던중이었는데... 마침 이렇게 좋은글도 올라오네요..
황무지
77년생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멀리서 보다보면 78,79 쯤으로 보이는 73년생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역시 피부가 ...피부가...
02/10/03 02:08
수정 아이콘
고풍스런 글 속에 살살 녹아있는 ijett 님의 신상명세.. 까먹기 매우 힘들듯. 앞으로도 좋은 글로 pgr21 을 빛내주십셔.
[진짜잡담]<---- 감사드립니다..(_ _)
저의 진짜잡담이라는 말머리도 유행을 하기 시작하는군요..

음훼훼훼훼훼훼훼훼...........-_-vV
아 그리고 까먹었네요..좋은 글 감사드립니다..^_^
어느 것 하나 매듭 짓지 못하고, 그저 고민하다가 의문거리들 그대로 한아름 쏟아 놓은 글인데도;;; 과분한 댓글 달아 주신 모든 분들 ㅠ_ㅠ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과제를 계속해 나갈 때도... 여러분이 달아주신 댓글이 큰 힘이 될 것 같네요. ^^; 이젠 힘내서 모델 만들어야지~~!!!
그러고 보니 벌써 개천절이 되었네요. 하늘이 열린 날... 뜻깊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02/10/03 02:31
수정 아이콘
지금의 인사동은..... 정말인지 상업도시가 되어 버렸죠.
저도 20을 갓 넘겼지만 어렸을적부터 그 쪽에 살았던 관계로 변한것을 알 수있었는데요. 바가지 요금에다 전혀 특색없는 가짜 기념품들...
더이상 외국인들도 인사동을 전통의 거리라 생각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런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신도시화 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수 없네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수는 없겠지만.... 명소 하나가 조만간 또 그래왔듯이 사라져 버리는것이 아닐까 라는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Nang_MaN
02/10/03 11:49
수정 아이콘
인사동을 한번도 못가본 저로서는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이글을 보면서 인사동의 옛모습과... 지금의 바뀐모습을...

상상해 봤습니다... 현대로 바뀌면서 고층건물이 생기고 순리에 맞게

바뀐다고는 하지만... 옛모습에 정감이 가는건 왜일까요... ^^

그리고 글과는 상관없지만 댓글에 내용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외관상 살아온 횟수일뿐...

전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싶습니다... ^^
가라뫼
02/10/03 21:46
수정 아이콘
간단히 말해 83년생이면서 나이트입구에서 back하는 저로선 이왕이면 속도 83년치곤 엄청 깊은 ijett님을 닮고싶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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