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는 뒤로 발을 재게 놀리며 뱀파이어의 안면을 겨눠 한 탄창을 다 쏟아 부었다. 22구경 권총
은 깔끔한 살인을 선호하는 암살자들이 애용하는 흉기답게 열 발 모두 500원짜리 동전 크기
의 원 밖을 벗어나지 않는, 정밀한 탄착군을 선사했다.
문제는 상대방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데 있었다. 순식간에 개구리처럼 막이 돋은 왼손으로
탄을 전부 막은 칭링은 손톱 돋은 오른손을 송곳처럼 앞세워 쳐들어왔다.
X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뭐 저딴 게 다 있어.’
X는 모처에 숨겨놓은 12구경 슬러그 탄을 삽탄한 산탄총이 그리워졌다. 7.62 패밀리도 괜찮
았다. 평상시엔 관통력만 높고 살상력은 적다고 구박하던 5.56도 지금은 감지덕지였다.
‘저런 괴물을 만날 줄 알았나.’
X는 탄창 멈치를 눌러 빈 탄창을 버리는 동시에 뒤로 가는 기세 그대로 제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면서 왼손에 든 대검으로 공격범위에 들어온 상대의 왼발을 깊게 찔렀다. 경험 많은 그
또는 그녀의 즉흥적인 움직임에 칭링은 속수무책이었다.
“야, 이 썅!”
댐 무너진 뒤의 물줄기처럼 어마어마한 길이와 기세를 가진 욕설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따라
공기를 가득 메웠다. 그 사이 X는 지면을 데굴데굴 굴러 드디어 골목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
다.
중국 영화에서 흔히 하듯 허리를 튕겨 벌떡 일어난 X는 전봇대에 붙어 얼른 다음 탄창을 갈면
서 엉뚱하게 스타일 다 구겼다고 한탄하였다. 바닥을 이용해 빠져나오는 과정을 통해 담배꽁
초와 낙엽, 기타 여러 쓰레기 들이 비싸고 소중한 코트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이 동네 구청 청소과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한 꼴이네.’
칭링이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라는 듯, 욕설을 대신해 길게 포효하며 왼손을 허우적거려 전
봇대를 박살내었다.
“죽여주마!”
“해 봐.”
X는 좌우로 머리를 움직이며 이를 피하고는 쏟아지는 돌가루와 돌조각 선물의 답례로 22구경
총탄을 듬뿍 안겨주었다. 따라하는 것처럼 칭링도 고개를 흔들어 총알을 모두 피해 버렸다. 그
러고는 대검을 뽑더니 자유로워진 발걸음으로 전봇대 뒤로 따라 들어왔다. X는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손톱을 다세대 주택 정문으로 들어가면서 녹슨 철제문으로 가로막는 것으로 해결했
다. 불꽃과 함께 엄청난 마찰음이 일었다. 민감한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몸서리를 칠
만큼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손톱을 못이긴 철제문의 철봉 몇 개가 깨끗이 절단돼 아래로 무너지는 가운데, X는 이죽거리는
톤으로 근처의 물건을 골대에 공 걷어차는 축구선수처럼 차 날렸다.
“이것도 막아봐.”
놓인 자전거.
“이것도.”
캔과 종이 전단지 쓰레기가 들은 비닐봉투.
“이건 어때.”
고무호스가 달린 수도꼭지, 그 밑의 쇠파이프.
칭링은 코웃음을 치면서 이 모든 것을 일격에 두 동강냈다. 그녀는 X가 물러난 만큼 앞으로 걸
었다. 잠시 후 X의 코트와 허벅지를 적시던 물줄기가 칭링의 종아리에 닿았다. 칭링의 거대한
덩치가 방범등에서 나오는 불빛을 가렸다.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듯 X에게 칭링이 드리운 그림
자가 고스란히 겹쳤다.
X는 중압감을 이기려는 듯 다세대주택의 좁은 계단 위로 뒷걸음질 쳐 올라가면서 입을 열었다.
“알지? 몸뚱이 크다고 싸움 잘하는 거 아냐.”
“계속 말해. 계속 지껄여. 잘난 그 입 없어지기 전에. 그러고 나면 지금 이 순간이 사무치게 그
리울 거야.”
코웃음을 치면서도 X는 적의 말을 내심 동조하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살인마와 평범한 인간이
싸우면 평범한 인간이 손해이듯, 살인마와 괴물의 싸움은 살인마의 손해였다. 충돌은 손실을 낳
는데 양자 간에 잃는 것의 질과 양이 상이할 수밖에 없는 싸움인 것이다.
X의 경우 상대에게 통할 만한 무기는 이미 거의 다 쓰고, 온전히 남은 것은 육체뿐인데 저런 기
괴한 덩치에게 격투를 걸었다간…….
‘저쪽이 원하는 대로 될 테지.’
X는 코트 아래로 느껴지는 비장의 한 수, 결정타로 쓸 만한 C4 한 토막을 위안 삼았다.
한편 칭링은 칭링대로 흡혈로 축적된 정기(精氣)를 계속해서 소비하는 현재의 상황에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했다.
‘벌써 3인분 썼어. 겨우 2인분 남았고. 협박도 안 먹히고 큰일 났네. 계속 이러다가 전투형에서도
압도 못 하는데 일반형으로 돌아가서 상대해야 한다면…… 얜 대체 정체가 뭐야?’
두려움은 쉽게 분노로 바뀌었다. 지금도 날카로운 이빨이 좀 더 길어지고 흉악해졌다.
X는 이에 반응하여 협박하듯 양손으로 22구경을 정조준했다. 뻔히 막을 수 있으면서도, 뻔히 막
을 걸 알면서도 양자 모두 이것만 묘수라는 듯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긴장했다.
그러다가.
*
엄청난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한쪽 벽을 덮치면서 옥탑방이 잠시 흔들렸다. 부엌 쪽창으로 비치
는 밤의 어둠이 일시에 환해지더니 오렌지색으로 물들면서 곧 벽돌조각이 주성분인 파편이 우박
두들기듯 유리창과 벽을 대중없이 두들겼다.
은실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워낙 긴장한 탓에 품속에 있던 38구경 M10리볼버를 꺼내기 직전 간
신히 참고 참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성은 냉장고에서 형형색색의 우유 네 개를 꺼내더니 배에다 대고 현란한 살
사 스텝을 밟으면서 외쳤다.
“신선한 우유에요, 음메에~. 네로랑 파트라슈가 죽어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혼자 왔어요, 음메
에~.”
양익이 대답했다.
“어서 오세요, A등급 깨끗한 우유님.”
“안녕하세요, 좀 늙은 고객님.”
“우유를 먹고 싶은데 이 우유에는 어떠한 효용이 있나요?”
“머리가 납니다. 북북북. 아무로 레이의 아프로 머리만큼 엄청나게 납니다. 북북북.”
은실은 이런 미친 대화가 다 있나 하고 듣다가 화들짝 놀랐다. 설탕 위의 고춧가루처럼 서로 어울
리지 않는 화제여서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머리숱이 적은 그에게는 선전포고 수준의 독설일
것이다.
과연 양익은 즉각 반응하였다.
“……님아, 죽을래요? 우리 아픈 데는 건드리지 맙시다. 쫌. 내가 수성 씨한테 수성 씨 말할 때마
다 침 튀긴다고 지적하면 좋겠어요?”
“설마. 진짜요?”
수성은 농담 말라는 듯 폴과 원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약간 망설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
였다. 수성은 누구나 알아차릴 만큼 확실히 풀이 죽었으면서도 아닌 척, 그런 일 없는 척 했다.
양익이 어색한 분위기를 메우려고 하나 마나 한 소릴 했다.
“기분 안 상했죠?”
“당연히 안 상했죠. 장난인데.”
“그쵸?”
수성이 웃는지 찡그리는지 알기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네, 하여간 젖이 부풀어서 아파요. 얼른 마셔주세요.”
“네? 그냥 춤으로 끝나는 거 아니었나요? 전 맞장구 쳐 줬을 뿐이에요.”
“아닌데. 먹어야 하는데. 무슨 맛 좋아해요?”
“커피 맛을 좋아하긴 하는데 우리 이러지 맙시다.”
다른 사람들은 의외의 진행에 박수를 치며 낄낄댔다. 여기에 힘입어 우유 네 개를 거머쥔 젖소가
몸을 기울여 강제로 중년남성의 입 근처에 커피 곽을 밀어붙였다.
‘부, 불결해!’
경악한 은실은 같은 말을 백만 번 정도 중얼거리다가 백만 1번째 이럴 때가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은실이 소리쳤다.
“밖에 무슨 일이 난 게 확실해요. 나가보고 올게요.”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수성이 나서려자 은실이 가로막았다.
“또 중국인 짓이라고 말하려고요? 축하할 일이 있어서 기념 폭죽을 터뜨렸다고 말할 생각인가요?
나가서 내다보든가 아니면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