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핫도그를 처음 먹은 날을 기념한다고 생각했거나.
‘그 정도로 가난하진 않아!’
은실은 속으로 포효하면서도 행색이 그렇게 후줄근해 보이나, 평소 꾸미지 않아서 그런가 하
고 우울해했다. 정말 특별한 부모님 정도는 아니지만 특별한 친척들만큼은 따라가자 싶어서
항상 노력하고 경쟁하는 터라 여성스럽게 꾸미는 데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은 탓 같았다.
‘그래서 근무 평점 쉽게 따는 방법이라고 오해했다가 매력은 전혀 없고 그저 이상한 규칙이
랑 설정을 달달 외우는 특이한 남자들이랑 있게 됐지. 이 황금 같은 일요일에. 반장님 포함
선배들은 전부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을 텐데. 특히 반장님, 혼자서 펑펑 놀고 있겠지? 아님
저번에 한 번 봤던 것처럼 신나게 낮술을 즐기고 있을지도 몰라.’
은실은 대충 용의자의 가닥만 잡으면 시간을 억지로라도 내서 또래 여자애들이 할 법한 복장
과 화장품을 잔뜩 쇼핑하자고 결심했다.
‘실수는 잊자. 모두 이겨 버리자. 얼른 해치우자.’
부모님이 좋은 것은 입히고 싶으나 주위 사람들이 위화감을 품을까 봐 비밀리에 특별 주문
생산해 유니클로 제품과 전혀 차이가 없는 샤넬 재킷과 루이비통 셔츠, 에르메스 면바지, 구
찌 백팩 차림의 은실은 핫도그를 얼른 먹어치우고 DSLR급의 기능을 갖추고 있으나 역시 특
별 주문으로 억지로 축소시키고 중고품처럼 낡게 만든 소형 디카를 챙기고 게임 룸으로 자
리를 옮겼다.
야구 카드, 미식축구 카드, 기념주화 좌판이 깔린 복도를 지나치자 처음 이곳에 방문했던 때
의 입구 반대편, 미니어처 박스가 가득 깔린 톰의 좌판이 나타났다.
톰이 인사했다.
“안녕yo."
“안녕하세요.”
은실은 쭈뼛거리는 태도로 어제 자신이 있었던 탁자 근처와 뛰쳐나갔던 입구를 쳐다보았다.
“오늘 한국인 없어yo."
"없어요?”
“No one."
뒤로 영어가 주욱 이어졌다. 다른 데로 모임 자리를 옮긴다는 연락이 왔는데 모르고 있었냐
는 말 같았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은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용의자 군(群)이 없으니 오늘도 잠입
수사는 물 건너간 일이었다. 또 한 번의 실수였다. 이걸 어째야 하나 하고 산더미 같은 장난
감 상자 앞에서 고민하는데 옆에서 어떤 이가 말을 걸었다.
“디앤디 미니어처 보시는 거예요?”
“네? 아, 네.”
이미 샀다고 말하려다가 말을 건 사람을 본 은실은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이
아니라 안경 너머 푸른 눈이 선명한 전형적인 백인이었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고, 확실히
벗겨진 머리를 깔끔하게 삭발에 가까운 스포츠형으로 정리한 백인이 씩 웃었다.
“실례일 수도 있지만 저 사실 그쪽 알아요.”
“네?”
들으면 들을수록 특정한 부분의 억양이 약간 특이할 뿐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완벽한 한국어
로 그가 대답했다.
“‘뽑기 마녀’ 정은지 양이죠? 아니, 정은실 양으로 불러야 하나요. 은실 양은 하루 만에 이
곳에서 유명인사가 됐답니다.”
‘소문까지 퍼졌다구?’
위장 신분이 완전히 날아간 사실에 충격을 받아 멍한 표정의 은실에게 정체불명의 외국인이
자기소개를 했다.
“폴 웨이드예요. 저도 디앤디 미니어처 정말 좋아해요.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
폴은 아내가 미 대사관 공보관 소속 공무원이어서 함께 한국에 온 경우였다. 한국어는 어렸
을 적 가장 친한 친구가 한국어여서 내국인 수준으로 배운 것이었고, 현재는 학원에서 영어
를 가르치면서 주말마다 각종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한국 플레이어들이 없는 건 이유가 있어요. 오늘 수성이 생일이거든요.”
아, 그래서.
“두 분이서 친하신가 봐요.”
“네. 제가 그 친구를 디앤디 미니어처에 입문시켰죠. 오늘 수성이 집에서 하는 생일 파티에
도 초대를 받았어요. 한국인들 잔뜩 있을 거예요.”
은실의 표정이 티 나게 밝아졌다. 폴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하.”
폴이 싱글벙글 웃자 은실은 왜 그러나 하다가 그의 오해를 깨달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수성이 생긴 건 그래도 참 좋은 사람이죠.”
“그게 아니라니깐요. 전혀 아니에요.”
“네, 알겠어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맞다. 시간 있으면 파티에 같이 가요. 제 차로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좋은 기회였으나 그녀 입장에선 엉뚱한 억측이 껄끄러웠다.
‘수다쟁이, 지각쟁이, 빵점짜리 조언가를 내가 대체 왜?’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양하지 마시고.”
“네.”
“그래요. 사랑은 좋은 것이죠.”
‘맘대로 생각하세요.’
은실은 금세 포기해 버렸다.
폴은 은실에게도 익숙한, 그러나 이름 모를 달콤한 곡조의 휘파람을 불면서 앞장섰다. 그
가 멈춘 곳은 본인 소유의 차를 댄 근처 주차장이었다. 막연히 미국 차를 상상했던 그녀
앞에 첫눈에도 꽤 오래 굴린 듯한 구형 소나타가 나타났다. 분명 개인이 갈색으로 덧칠한
이 소나타에는 어울리지 않게 외교관 번호판이 달려 있었다.
“차 값 싸고, 유지비 싸고, 외교관 대우로 공영 주차장이라면 어디든 공짜인 제다이(*SF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4>의 주인공 직업명.) 전용 머신 랜드스피더(*동명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소유한 차량명.)를 소개합니다!”
“아, 네.”
무덤덤한 반응에 폴이 물었다.
“은실 양은 영화 많이 안 보시는군요. 아니다, 덕후가 아닌 건가요.”
“한국어 정말 잘하세요. 덕후란 말도 아시고. 근데 호칭은 좀 너무 점잖은 것 같아요. 양
빼고 씨로 불러주세요. 영화 많이 안 보고 덕후 아닌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요.”
몇 번을 물어도 폴은 웃으며 대답을 삼갔다. 조수석에 타라는 말에 차체 뒤쪽으로 돌아서
앞으로 갔던 은실이 흠칫 놀랐다. 조수석에 창문이 깨져 있었다. 정확히 말해 완전히 뚫린
것은 아니고, 촘촘히 비닐을 덧대어 가려놓았다.
조수석 문을 열고, 조수석에 포장된 상자를 뒷좌석에 둔 다음 은실이 탔다. 창문이 왜 이
모양인지는 묻지 않았다. 스피드랜더인가 뭐시기인가의 장점 중 하나가 싼 것이라는 소릴
아까 들었기 때문이었다.
차가 정문을 나서서 녹사평 역 쪽으로 우회전할 때 은실이 물었다.
“선물인가 봐요.”
“네.”
“디앤디 미니어처인가요? 수성 씨 많이 좋아하겠어요.”
상자가 중간 크기의 추석 선물 세트만 하니까 많이 들어 있겠구나 싶었는데 돌아오는 대
답은 달랐다.
“아니에요. 레고 7962 아나킨과 세불바의 포드 레이서예요.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1
보이지 않는 위험에 등장하는 탈것들이죠.”
“레고라면 그 조립식 장난감 말하는 거죠? 블록끼리 끼워맞추는 물건.”
“네.”
은실은 성인들끼리 장난감을 주고받는 것을 처음 봤지만 이 사람들은 보통 “성인”이 아
니기 때문에 그러니 싶었다.
“디앤디 미니어처가 아니고 이걸 선물로 마련하신 걸 보면 수성 씨가 되게 갖고 싶었던
물건인가 봐요.”
전쟁기념박물관을 막 지나는 차 안에서 폴이 크게 웃었다.
“절대 아니에요. 그 친구는 쓸데없이 상상력도 뛰어나고 자기 주관도 확고해서 만족시키
려면 엄청 까다로워요. 최고의 선물이라는 걸 정해 놓았는데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들
로만 구성해 놓았죠.”
“뭔데요?”
“클레이모어라는 이름의 장검에다, MP-5K기관단총을 든 게임 캐릭터 춘리(*일본 게임
사 Capcom이 만든 격투게임의 출연 캐릭터 중 한 명.)가 아프렐리아 바이크에 타고 그
뒤를 시베리안 허스키가 쫓아오는 상황을 선물로 받고 싶대요.”
“……네에?”
그게 뭐야, 변태 같아, 더러워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 한편으론 생전처
음 상상력과 자기 주관이라는 단어가 욕으로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표정
도 생각 따라 신 것, 쓴 것, 불결한 것을 실수로 먹었을 때 지을 만한 것으로 변했다.
‘역시.’
고수성은 피하는 게 최고였다. 그러지 못하고 수사 때문에 미군부대에 차도 세워놓고 놈
의 본거지 행에 따라나선 자신이 약간 가엽고 안타까웠다.
‘집에서 누워 있다가 엄마가 간단히 해 주시는 남방참다랑어 가마도로나 먹을 걸 그랬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