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일어나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3G가 터지지 않는다.
이런 망할 개티.
전화와 문자가 되지 않아서 심심했지만, 강아지들하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농약을 치지 않은 배추와 상추, 각종 채소 쌈에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어머니께서는 여수에서만이라도 태워주고 싶다고 했지만, 버스를 탄다고 하고 재빠르게 달려나왔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고 싶어?
나에게 물었다. 여행하기 전에 짜놨던 계획은 지웠다.
여기는 여수시 화양면 나진리이다.
우리나라 지도에 보면 한 참 아래쪽에 있다.
이 근방은 내가 군 생활 할 때 오가던 곳이며, 평소에 버스가 많이 다니지 않는 것도 잘 안다.
나진리는 여천 깊숙이 더 들어 갈수 있고, 여수시로 나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해가 따스웠다.
마트 앞 탁상에 앉아서 곰곰이 고민했다.
만약 들어가는 버스가 먼저 오면 들어가고, 나오는 버스가 먼저 오면 여수터미널로 가자.
지금 내가 앉아 있는 버스는 29번 여수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다.
버스에 앉아서 예전에 근무했던, 지금은 많이 바뀐 곳을 보게 되었다.
예비군이 되고 나니 군 생활 할 때가 그리워진다.
후회와는 다른 그리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땡보였지만, 땡보라는 보직이 그립다기보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게 조금은 슬픈 것 같다고 마음이 말한다.
시골의 버스는 정감이 많이 간다.
잠깐 창밖의 시골경치에 넋이 나가 있는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젊은이 어디서 왔소? “
“경기도 부천에서 왔습니다. 할머님 어디까지 가세요?”
“나 시내 좀 나가요.”
“그럼 여기 앉아서 가세요.”
“아이고 고맙소잉.”
먼저 일어나서 비켜 드려야 했는데 괜히 죄송하다.
오랜만에 고장 사투리를 들으니,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버스에 자리가 없을 때 할머님께서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자리 좀 비켜주오. “ 와 비슷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노약자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은 작은 도시일수록 더 많은 것 같다.
2007년 1월 5일에 전역한 후 여수터미널이 처음이라 그런지 가슴이 벅차다.
어디로 갈지 대충 생각은 하고 있지만,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버스 시간표를 쳐다본다.
터미널에서 버스 시간표를 보는 건 여행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난 유독 버스를 좋아한다.
길을 가다가 버스가 지나가면 시야에 없어질 때까지 본다거나, 터미널에 도착해서 시간이 남을 때는 각기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정차해 있는 버스들을 둘러본다.
어릴 적에는 기차를 유난히 좋아했지만, 언제부턴가 고속버스 시내·시외버스가 좋아졌다.
깨끗한 버스를 타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새 차 같아서 좋고, 조금 낡은 버스를 타면 ‘이렇게 열심히도 지금까지 기특하게 달려와 주었구나‘ 라고 생각이 들어서 좋다.
대학교 4학년 2학기에 ‘노사관리론‘이라는 수업의 발표 과제로 금호고속을 조사한 적이 있다.
우리가 아는 4학년 2학기는 토익공부에 자격증에 취업준비를 하지만, 나는 발로 뛰어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었다.
발표를 안 해도 되는 거였지만 그만큼 버스가 좋았다.
지금도 좋다.
여수 터미널에서 순천행 승차권을 끊었다.
순천에는 볼 것이 별로 없지만, 웃장·중앙시장·아랫장과 같이 독특하게 시장 분포가 되어 있어 궁금했던 곳이기 때문에 순천으로 가기로 했다.
그 지역의 특색이나 고장 사람들을 보려면 시장으로 가야 한다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순천을 닿고 진주로 가는 금호고속을 탔다.
군 생활 할 땐 없었던 건물들, 보수공사 하고있는 도로, 창밖에 비치는 변화된 모습들이 왠지 낯설다.
달리는 버스 안에 멍하니 창밖을 보니 내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과 같은 모습을 느꼈다.
어느새 늙은 내 모습이 낯설다.
낯섦.
낯섦을 느꼈다고 해서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돌아서 가거나 혹은 느리게 가면 다른 사람보다 늦어지겠지만, 묵묵히 걸어가면 언젠가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주지는 못하잖아? ‘
그러니까 천천히 걷자.
혼자 이렇게 위안 삼아본다.
여기는 중앙시장이다.
어머니 직장과 사택이 있어서 순천은 많이 다녀갔지만, 중앙시장은 딱 한 번 대학교 시절 친한 친구와 시간 보내려고 걸어본 기억밖에 없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많진 않다.
시장 골목 다른 사람들의 걸음은 대체로 빠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느리게 걷는다.
기분 좋다.
왠지… 나 이런 거 좋다.
시장을 둘러보는 일은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빠르게 걷다 보면 자칫 작은 볼거리를 놓칠 수 있지만, 느리게 걸으면 작은 것까지 볼 수 있다.
시장을 둘러보다 문득 여행은 나에게 뭔가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혼자 터득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 하나하나가 모여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날 위해 힘내서 걸어보자.
시장을 둘러보고 순천 북부터미널에 와서 표를 끊고 기다렸다.
오라는 버스는 오지 않고 배에서 신호가 왔다.
배고프다.
순천 북부터미널 근처에 중화요리 음식점이 있지만, 사람이 꽉 차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다.
2대의 광주행 버스가 꽉 찬 채로 손님을 태우지 않고 가버렸다.
‘배고픈데 어떡하지?’
시장 쪽으로 무작정 걷다가 비교적 사람이 적은 음식점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밖에서 보이는 깨끗한 모습과는 달리 원산지 표시가 없고 주방은 어지럽혀 있다.
‘너 지금 이런 거 따질 때 아니야! ‘
배에서 하는 소리 같다.
혼자서 여행을 하면 끼니를 해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혼자 밥 먹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여행을 하는 내내 더 많이 힘들 것이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한 삶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말자.
신기하게 보는 시선은 느껴지지만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다.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간단히 소고기 김밥과 비빔냉면을 시켜 먹은 후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주는 내가 20년 동안 산 곳이다.
사람이 살기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정이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있는 광주.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다.
부천으로 독립해서 더 많이 느꼈다.
벌교, 보성을 구경하고 광주에 오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배낭을 메서인지 갑자기 어깨가 결려 광주행을 선택한 것이다.
마음이 무겁다.
다른 때와 다른 느낌에 발걸음 또한 무겁다.
'여행에 대해 몸이 반응하는 건가?.'
‘아파도 참아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관리실에서 열쇠를 찾고 관리비를 내고 아무도 없는 광주 집에 왔다.
씻지도 않고 일찍 잠을 잔다.
내일은 나아지겠지.
의지박약 이겨내자.
나진->여수터미널 버스비 1,100원
여수->순천 버스비 4,000원
순척역 -> 중앙시장 버스비 1,100원
소고기김밥, 비빔냉면 6,500원
순천 북부터미널->광주 문화동 버스비 6,200원
문화동->우리집 버스비 1,000원
포카리스웨트500ml 1,200원
p.s
원래 어제 글을 올리려 했으나 여자친구와 헤어질뻔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 올립니다.
댓글 달아주신 분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