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KF-21 초도 비행 기념 T-50/FA-50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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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T-50/FA-50 이야기 2편 - 개발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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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T-50/FA-50 이야기 3편 - (개발사2) 탐색 개발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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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T-50/FA-50 이야기 4편 - (개발사3) 초음속 훈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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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T-50/FA-50 이야기 5편 - (개발사4)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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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T-50/FA-50 이야기 6편 - (개발사5) 체계 개발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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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6편 이후 바로 마지막 편을 올리려 했는데 갑자기 코로나에도 걸리고 회사일도 이것 저것 생겨서 많이 늦어졌네요.
편의상 본문은 반말체임을 양해 부탁 드립니다.
[체계 개발 착수와 삼성 항공으로의 이직]
드디어 업체 주도로 체계 개발이 진행 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국과연에서 T-50 사업 부장에서 면직 되고 삼성항공의 대표가 전 박사를 찾아와 삼성항공으로 와서 개발 책임을 맡아 주기를 부탁했다.
이 얘기를 공군 사업 단장에게 보고하니 사업단장은 흔쾌히 허락하며 가서 능력을 발휘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이 후 공군참모총장도
"전 박사, 소원 성취했네. 열심히 잘하게"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이 사업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T-50 사업의 대통령 재가가 97년 9월 26일에 있었고 공군과의 체계 개발 계약이 10월 24일에 이루어졌다. 전 박사는 12월 1일 부로 삼성항공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삼성항공의 이직이 결정되고 보니 전 박사가 총 책임자가 아니라 위에 상사가 2명이나 있었다. T-50 사업 책임자 장 모 상무와, 개발 담당 강 모 상무, 그리고 전 박사는 그 밑에서 이사로서 체계 개발 종합 업무를 맡는 것이었다. 전 박사는 당연히 본인이 총괄 개발 책임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본인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공직자 윤리 위원회 회부]
그러나 삼성항공으로의 이직 직후 전 박사는 공직자윤리법 상 문제가 되는 취업이라고 해서 공직자 윤리 위원회에 회부가 된다. 당연히 이직 전에 공직자윤리법 상 문제가 되는지 여부를 공군 측에 문의하고 문제가 없다고 확인 받은 사항이었으나, 이직 이후 국과연 쪽에서 기무사를 움직여 문제를 삼은 것이었다. 전 박사는 정말 끝까지 국과연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였던 모양이다.
공군본부 쪽에서도 혹여 잘못 되면 책임 지기 싫었던 탓에 적극적으로 비호 해 주지 않았고 이 문제는 국방부를 떠나 총무처의 공직자 윤리위원회로 넘어간다. 전 박사는 착잡했다. 만의 하나 여기서 부정 취업으로 문제가 된다면 T-50 개발은 또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될 것이었다.
다행히 공직자 윤리 위원회에서는 그간의 과정을 봤을 때 전 박사가 이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야 한다며 만장 일치로 문제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전역]
1998년 2월 28일. 드디어 전 박사는 28년의 나름 파란만장했던 군 생활을 마치고 군복을 벗는다. 공군에서 총장 이하 관련 인사들에게 인사를 다니면서, 전 박사는 "자네 같은 사람이 장군이 되어야 했는데" 하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늘 얘기해 왔듯 전 박사는 T-50 개발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만이 사명이었으며, 개발에서 손 떼야 하는 승진 같은 건 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IMF]
체계 개발 사업이 착수 되자 마자 그 유명한 IMF가 경제 위기가 터져 버렸다. 천우신조로 아마 체계 개발 착수가 한 달만 늦었어도 이 사업은 엎어졌을 것이나 한 달 차이로 IMF를 겨우 피해 갈 수 있었다. 물론 2배로 폭등한 환율 때문에 예산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K-상사]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전 박사는 삼성 항공에서 2명의 상사를 모셔야 했다. 사실 T-50 프로젝트의 창시자(?) 이기도 하고 모든 기획 업무를 맡아온 전 박사 입장에서 실무선에 결재를 맡아야 하는 사람이 2명이나 생긴 것은 대단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이 2명의 상사는 스타일이 달랐는데 사업 책임자는 장 상무는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 업무를 관리해온 공장장 출신으로 안타깝게도 '까라면 까' 스타일의 전형적인 8,90년대의 안 좋은 쪽으로 완전 꼰대 스타일의 K style 상사였다. 그 밑의 개발센터장인 강 상무는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 항공 업계에서 비행 제어 엔지니어로 오래 일한 사람으로 순수 미국 스타일의 엔지니어였다. 즉 성격이 온순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이러다 보니 안 좋은 쪽으로 K-상사인 장 상무와, 합리적인 미국 스타일의 강 상무는 상극이었다. 장 상무의 말도 안되는 '까라면 까' 스타일을 강 상무는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전 박사 입사 3개월 만에 강 상무는 장 상무와의 충돌 끝에 회사를 그만 두게 된다.
이로서 전 박사는 엔지니어링의 최고 책임자인 개발센터장이 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제 개인 의견이긴 한데 전 박사로서는 어찌 보면 전화 위복이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리 강 상무가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격이라고 해도, T-50 개발은 엄청나게 빡빡한 일정이고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필요하면 굉장히 과감하고 도전적인 선택을 잘 하는 전 박사 입장에서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고, 특히 테크니컬한 부분을 일일이 결재 맡아야 하는 상사가 있다는 것은 추후 굉장한 문제 거리가 될 소지가 있었다.
반면 전형적인 K-상사 스타일인 장 상무는 성격은 X 같다고 해도 엔지니어링 쪽은 자기 분야가 아니므로 간섭하기는 좀 힘들 터였다.
그러나 K-상사는 K-상사. 이 장 상무라는 인간은 개발 센터장인 전 박사와는 아무 상의도 없이 개발 센터 조직을 몇 개월 마다 수시로 변경 해 대는 통에 전 박사를 괴롭힌다. 막상 개발 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은 전 박사인데 조직을 마구 바꾸어 대고 조직 변경의 결과로 인한 책임은 또 전 박사가 져야 하니 전 박사로서는 정말 괴롭기 그지 없는 상황이었다.
KFX 사업을 보고 록히드 마틴이 based on miracle, 즉 기적에 기반한 스케쥴이라고 했다는 데, T-50 사업은 이 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난이도가 덜한 사업이 아니었다. 일단 KFX, 즉 KF-21은 T-50 개발 이후, TA-50, FA-50을 개발 해 가며 KAI에서 축척한 기술에 더 해 국과연 등에서도 10-15년간 관련 기술을 축적한 경험 하에 진행 되는 사업이고, T-50 사업은 그에 반해 모든 것을 처음 해 보는 상황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사업이었다.
더구나 록마와의 계약 조건이 2003년 5월이던가까지 대한민국 공군이 양산 1호기를 발주하지 않으면, 록마는 투자금을 회수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처음임에도 일체의 스케줄 연기가 발생 해서는 안 되는 극악의 난이도였다.
더군다나 사업 계획서 작성 시, 전 박사가 사업비 증액을 그렇게 요구했음에도 당시 삼성 항공이 4~5억 달러를 낮춰서 사업 계획서를 내는 통에, 개발에 필요한 정, 동하중 구조 시험 장비 등 온갖 장비를 국과연 등 타 연구소의 장비를 빌려서 개발 해야만 했다. 남의 조직이 뭐가 좋다고 자신들의 장비를 기꺼이 빌려줄 이유도 없을 뿐더러(더구나 국과연은 악연도 있음…), 만의 하나 실험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가 밖으로 노출 되어 문제가 더욱 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와중에 모든 권한은 사업 부장에게 있고, 책임은 전 박사가 지는 구조에, 전 박사에게는 일체의 권한이 주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사업 부장의 눈치만 보고, 그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해도 뭐라 대꾸를 못 하고 쩔쩔 맬 뿐이었다.
도대체 이 큰 사업을 이런 식으로 어찌 끌고 갈지 앞이 캄캄해 진 전 박사는 용기를 내어 개발 센터의 운영권을 전 박사에게 위임하고 각종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개선 해 줄 것을 K-상사에게 건의 했으나 일언 지하에 거절 당한다.
사실 전 박사는 탐색 개발 때도 자기 팀에 대한 인사권이 없어서 본부장에게 그 문제를 해결 해 줄 것을 부탁 했으나 본부장은 인사권을 양도하지 않아서 결국 연대 서명 파동 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쪽으로는 지독히 운이 없는 전 박사였다.
[시뮬레이터 개발 문제]
한 편 전 박사는 T-50을 개발하면서 항공 전자와 마찬 가지로 시뮬레이터도 반드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항공 전자와 똑 같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술이며 추 후 이를 이용해 돈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 부장이 반대했는데 관리도 힘들고 리스크도 크니 외국 회사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전 박사는 기술적으로 검토해 보고 충분히 가능하다며 다시 사업을 진행할 것을 건의 했으나 일언 지하에 거절 당한다.
그러나 얼마 뒤 갑자기 한국항공(KAI, IMF 때문에 삼성 항공 등 관련 업체들이 KAI 로 통폐합 됨)이 '도담' 이라는 자회사를 만들어 시뮬레이터 사업을 진행하기로 한다. 이 자회사에는 사업 부장을 포함한 몇 몇 경영진도 지분을 투자했다. 연유야 어찌 되었든 전 박사는 시뮬레이터 사업을 국내에서 진행하게 되어 천만 다행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동시 공학 설계]
이 후 개발은 수많은 난관을 뚫고 차근 차근 진행 되었다.(자세한 기술적 얘기는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비행기 형태가 최종 확정 된 후 이제는 모든 부품들에 대해 설계 도면을 작성 하여야 했다. 신규 부품에 대한 품목 수를 예측 해 본 결과 약 8960여 종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여기에 대해 모든 도면을 작성해야만 실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즘 T-7 이래로 미국 항공 업계에서 디지털 설계나 개발이라는 개념이 유행하는데 어찌 보면 T-50이 현대적인 수준은 아니어도 적어도 동체나 부품 설계에 있어서만은 CATIA라는 CAD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100% 디지털 설계를 처음 적용한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이다.
워낙에 개발 일정이 빠듯했기에 차근 차근 설계 해서 제작 해 보고 문제가 발견 되면 재 설계를 하는 식의 여유있는 개발 방식을 택할 수 없었다. 따라서 최대한 디지털 설계를 많이 이용했고, 이 후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 되면 안 되기에 동시 공학이라는 개념을 적용했다.
설계 단계에서 부터 이 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잡아내기 위해 부품 하나를 설계 할 때 부터 그 부품을 생산할 생산 부서, 생산 기술 부서, 품질 부서, 치/공구 부서 등 관련 부서가 모두 참여하며, 도면 작성 이전에 미리 제작성, 조립성 및 품질 요구 조건 등을 사전 검증하여 출도된 도면 대로만 부품을 제조하면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부품 제작과 조립 상의 문제가 획기적으로 줄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 소요 시간 역시 획기적으로 단축 할 수 있었다.
[미친 계획을 실행하다]
설계 및 제조해야 하는 부품은 대략 10개월 안에 6천개였다. 94년도 KFP 사업(KF-16 라이센스 생산 사업) 당시 월 개발 부품 수량이 월 평균 150개인데, 이번에는 월 평균 600개였다. 부품 생산이 항상 일정하게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므로 어쩌면 월 1000여개의 부품을 생산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필요한 설계 인력을 추산 해 보니 대략 현 인력의 2배 정도였는데, 어찌 저찌 하여 결국 필요 인력의 70% 정도로 설계를 진행하게 되었다. 록히드에서 파견 된 인력들은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계획을 세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때문에 앞서 얘기한 동시 공학 기법들이 적용 되었으며, 이를 통해 2000년 4월까지 초기 6개월간 약 600여개의 도면이 배포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체 필요 도면 수 6000개의 10%에 불과해서, 이제 남은 6개월 간 정말 월 1천개의 부품을 설계 제작 해야만 했다. 그러나 2000년 5월이 되자 정말 모든 관련 인원들의 헌신과 숙련도 향상으로 도면의 배포 숫자가 급증해 월 1천개의 도면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6월이 되자 이제는 도면 1천개가 아니라 부품 1천개 제작이라는 목표가 주어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개발 일정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해내야 했다. 이 때 부터 전 박사는 낮에는 설계 개발 활동을 하고 저녁이 되면 현장, 생산 기술, 생산 관리, 치/공구 기술, 자재, 품질 등 생산 관련 부서 회의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하는데 전념하여 2000년 6월 29일 드디어 1천개 부품 제작에 성공했으며 이 페이스는 무려 5개월 이상 지속 되었다. 이로 인 해 사업 일정을 계획 대비 무려 3개월이나 앞당기게 된다.
[쫓겨나다…..]
이렇게 일정이 당겨지니 가장 신난 것은 우리의 K-상사, 사업부장이었다. 사업부장은 매일 도면 몇 장 그렸는지만 체크하며 채찍질하고 있었다. 만약 도면 출도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난리가 났다. 아마 위에다 사업 일정 단축을 자기 업적으로 보고 할 생각에 신이 났으리라.
그러나 전 박사는 이렇게 당겨진 일정으로 항공기 성능 개선에 쓰고 싶었다. 사실 T-50의 무게는 촉박한 일정 탓에 전 박사가 설정한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항공기에게 있어 무게란 성능의 알파이자 오메가 같은 것으로 무게가 적을 수록 같은 엔진 추력에 비해 기동성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가격도 줄어들게 된다. 또한 추후 항공기 성능을 확장하기에도 용이하다.
T-50은 출시되면 당장은 경쟁 상대가 없겠지만 항공기란 최소 30년 씩 운영하기 마련이니, 이 후에는 반드시 경쟁자가 출현할 터였다.
이런 것까지 생각한다면 어렵게 마련한 3개월은 무게나 계통에 대한 최적화 설계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한 번 설계가 확정 되면 더 이상 설계를 변경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사업 부장을 설득했지만, 상대는 K-상사, 이게 먹힐리가 없었다. 최적화 설계를 하면 이후 지상 시험이나 시험 비행 때 시간을 줄여 일정에는 차이가 없다고 설득했지만 그런게 먹힐리가…...
이 사람은 까라면 까야지 워래 토를 다는 걸 극혐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본인이 엔지니어링을 모르기에. 그리고 미국물 먹은 강 상무 보다는 상명하복의 군 출신의 전 박사가 그나마 나아서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었을 뿐…..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 좋은 쪽으로 전형적인 K-상사에게 이제는 전 박사의 효용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있었다. 즉 설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계만 완성되면 제작은 KF-16등을 통해 충분히 경험을 쌓았기에 전 박사가 없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업 부장은 전 박사를 점점 엔지니어링에서 배제 시키기 시작했고 급기야 '평가실장'이라는 직책을 급조하더니 전 박사를 엔지니어링에서 손을 떼 도록 했다.
그러더니 결국 조직 개편 때 전 박사를 고문으로 물러 나도록 했다.
사실상 실무에서 배제한 것이었다.
전 박사의 괴로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T-50은 그에게 있어 그의 일생이나 다름없는 과업이었다. 아이디어의 창시 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 할 때도 혼자서 뚝심으로 밀어 붙여 이루어 낸 사업이었으며, 수많은 승진과 출세의 기회를 마다하고, 조직의 배신자가 되어가며 오로지 이 사업 하나만을 위해 인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한 사업이 착실히 진행되고 결실이 나타남에 따라 국방부나 공군에서는 전 박사에 대한 평판은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전 박사로서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군인 출신이고,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처리할 방법은 몰랐다.
다음날, 결국 그는 사업 부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사업부장은 별로 붙잡지 않았다.
전 박사는 서울 본사로 가서 부사장에게 인사를 드렸다.
"전 박사, 목 수술을 했다면서?"
사장에게도 인사를 했는데 비슷한 반응이었다.
"전 박사, 몸이 많이 안 좋다면서?"
"이젠 제가 없어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사직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사업 부장이, 전 박사가 몸이 아파 회사를 그만 둔다는 식으로 얘기를 퍼트렸으리라…..
그러나 전 박사가 그만 두었다는 사실에 공군과 국방부가 발칵 뒤집어졌다. 아마 국과연까지 포함해서도 전 박사를 좋아하던 미워하던 그간의 진행 과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T-50' = '전명훈'이었다. 그가 결코 스스로 그만 둘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 박사의 거취는 한 동안 최고의 화젯 거리가 되었으며, 공군은 사업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성토하기 시작했다.
전 박사는 사업 부장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올랐지만 누구에게도 그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고 조용히 파묻혀 살았다. 괜히 이 문제로 T-50 사업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부장도 한국 항공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뒤 T-50은 초도비행에 성공하고 전 박사는 초대장을 받아 이 순간을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라 손님일 뿐이었다. 전 인생을 바쳤지만 그 과실을 스스로의 손으로 끝까지 이루지는 못 했다. 이후 전영훈은 항공 산업계로 복귀하지 못했다.
[마치며….]
이 글의 개발사 부분은 '전영훈' 님이 쓰신 'T-50 끝없는 도전' 이라는 책을 요약한 것입니다. 사실 책 내용을 함부로 옮기는 것이 좀 걱정 되기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기 개발사 같은 책은 별로 사 볼 사람이 없을 것 같고, 이렇게라도 이 분이 좀 알려지면 좋겠다 싶었던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사실 엔지니어이자 공돌이로서 인터넷 같은 곳에서 떠도는 우리 나라 무기 개발사를 몇 개 본 적이 있는데 하나같이 참 대단한 내용이었죠. 그러다 보니 T-50 개발에 관한 책이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사서 보기까지는 좀 그래서, 몇 년 째 그냥 있다가 우연히 작년에 사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별 기대는 안 하고 사 보았던 책이었는데,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충격적이어서 언젠가 한 번 꼭 소개글을 쓰고 싶기는 했었습니다. 전 글에도 언젠가 썼지만 당연히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 오로지 한 개인의 집념으로 이루어 진 것이어서 정말 이건 만화 아닌가 싶더라구요. 책 서문이나 추천사를 써 주신 분들이 전에 전 박사님과 같이 일하신 공군 참모 총장이나 방사청장이어서 글 신뢰도는 문제 될 거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참 서글프고 허망한 헬피엔딩까지…...
참고로 저도 pgr에서 처음 알았는데, 이 분이 KFX를 T-50 베이스로 개발 하자고 하신 것은 물론 잘못 된 의견이시긴 합니다만 당시 국회에 불려가셔서 증언 하신 건 이미 야인이 된지 10년 정도 된 때라, 업계나 연구소 책임자급도 아니고 KAI나 국과연 상황을 정확히 알고 계신 것은 아닌 상황에서 본인 의견 얘기 해 보라고 해서, 경제성이 문제라면 T-50 베이스로 하면 된다 한 것을 크게 뭐라 할 만한 건 아닌 것 같다는 제 개인적 의견입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좋은 국가는 이런 분들이 인정 받고 대접 받는 나라라 생각합니다. 과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공이 일개 개인의 수준을 한참 차고 넘칩니다. 단지 워낙 일반적으로 알려지기 힘든 기술 분야라 이런 분의 너무나 거대한 업적이 묻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전영훈의 유산]
개인적으로 이 분이 대한민국에 남긴 유산은 T-50이 아니라 항공 산업 자체, 그리고 첨단 전투기의 개발 프로세스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KFX 계획이 수없이 사업 타당성 조사에서 빠꾸(?)를 맞았음에도 진행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소요군인 공군의 철썩 같은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실제로 KFX가 본 궤도에 오르기까지, 공군은 무조건 적으로 이 계획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ROC를 F-16+ 급이라고 엄청나게 모호하게 한 단어로 규정했을 뿐이에요. 그냥 다 너희 한테 맡길테니 알아서 잘 만들어 줘. 이런 뜻이죠. 심지어 단발이고, 쌍발이고 우린 상관 안 하니까 제발 국내 개발만 빨리 좀 해 줘…... 라는게 공군의 입장이었지요.
T-50 써보고 만족 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공군이 하는 건 사실 의아했었어요.
그러나 이 책을 읽고서야 의문이 풀렸습니다. 이 역시 전 박사의 유산으로 T-50 개발 과정에 항상 공군을 깊숙히 참여 시킴으로서 이 사업이 내 사업이다. 반드시 되게 해야만 하겠다라는 분위기를 전 공군에 만들었죠. 게다가 전 박사의 초인적인 노력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집단이 공군이고, 그 결실로 만들어지는 국과연과 업체를 아우르는 항공 산업과 그 설계 능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죠.
공군 생각은 아마 그랬을거에요. 아니 진짜 맨땅에 헤딩하는 T-50도 되는 걸 우리가 옆에서 다 봤는데, 기반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KFX쯤이야 안 될리가 없지.
물론 공군의 절대적 지지도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실제 항공기를 개발 하는 곳은 국과연(ADD)와 업체(KAI)죠. 이 두 곳 역시 전박사가 뿌려 놓은 씨앗이 절대적입니다. 전 박사 개인에게는 안타깝지만 전박사가 국과연의 배신자가 되는 바람에 국과연과 업체 두 곳 모두가 탄탄한 항공기 설계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업체가 더 상세한 설계 능력을 가지지만 국과연이 무기 개발의 큰 축을 담당하는 한국의 실정 상 국과연 인력들도 상당한 수준의 설계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갑이 잘 모르고 뻘 소리하면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거든요.
KFX 개발 과정을 보면, 정확히 T-50의 개발 프로세스를 따라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록히드 대신 인니 투자 받고(이건 좀 문제긴 하지만…), 국과연이 탐색 개발을 하면서 전체적인 성능과 형상을 결정하고, 업체가 이를 이어 받아 체계 개발을 했지요. 그리고 T-50 때 처럼 based on miracle인 한국만의 엄청나게 빠른 일정으로 개발을 성공적으로 진행 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면상 제 글에는 많이 생략했지만, KF-21의 개발 과정 하나 하나가 다 전 박사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최근까지도 우리 나라가 전투기 개발은 좀 무리 아닌가? 하고 생각하셨을 거고 어찌 보면 그게 합리적인 추론인데….. 그게 말이 안 되게 만든 분이 이 분이라 생각합니다.
[21세기의 미니 F-16을 꿈꾸며…..]
최근에 FA-50의 폴란드 수출이 거의 결정 되었죠. (사실 아직 본 계약은 못하고 MOU긴 합니다. 곧 본계약이 될 것 같긴 하지만요).
지나가는 뉴스에는 폴란드가 AIM-9X나 암람 뿐만 아니라 공대함 미사일까지 포함해서 8종의 미사일 인티그레이션을 요청했다고 하더군요. 인티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스나이퍼 포드에 AESA 레이더를 통한 공대공, 공대지 능력에 이어 공대함까지…...
경전투기라고 하기에도 좀 오버스러운 스펙이 되어 버리는데…....
원래 FA-50이 21세기의 F-5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많이 있었고 저도 동의하는 편이었는데요.
사실 F-5는 low 급이어도 정말 엄청나게 많이 팔린 베스트 셀러죠. 이 정도만 되어도 감지덕지긴 한데.
그러나 성능이 정말 떨어졌던 F-5와는 다르게 FA-50은 정말 F-16이 하는 건 다 할 수 있는 기체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해요.
물론 F-16 보다 기동성, 폭장량, 항속 거리 등에서 차이가 나지만 정말 F-16이 하는 건, 나도 다 하긴 해… 이런 느낌?
잘만 하면 21세기의 F-5가 아니라 미니 F-16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것도 같네요.
전명훈 박사님을 비롯해 실낱만도 못하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