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삼십년 정도는 된 이야기일거다.
당시 국민학교도 입학하기전의 나이.
휴일없이 과일가게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가끔씩 시골 집이나 가까운 고모 댁에 나를 맡겼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데, 가끔씩 기행(?)을 일삼던 아들내미를 건사하기가 꽤나 힘드셨을게다.
아주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 하나 있다.
며칠동안 함께한 고모와 고모부를 엄마 아빠라 부르고, 정작 나를 찾으러 온 부모님을 고모 고모부라 불렀던 기억.
그만큼 사리분별이 안될 정도로 어렸었지만, 그럼에도 그날의 부모님 표정 만큼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다른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차라리 고모네 집에 맡겨지면 다행이었다.
삼십년전의 깡촌 시골은 뭔가를 하고 싶어도 도대체 할 게 없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유튜브와 pc, 케이블 채널이 있지만 그때는 공중파조차 낮 시간을 쉬었다.
'자연을 벗삼아 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수 있겠지만, 출생이 서울이었던 내게 시골은 거대한 이세계나 마찬가지였다.
산과 들이 놀이터가 아니라, 경계해야할 미지의 공간이었던 것.
(실제로 뒷산에 가면 여전히 뱀이 출몰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시골이 무척 싫었다.
그리고 명절도 싫었다.
한번 명절에 오고나면, 이주 정도는 나 혼자 남겨졌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이제 엄마가 나를 데려오기 까지 X일'이었고, 그마저도 번번히 약속을 어기기 일쑤였다.
분명 이번주 금요일이라고 했는데, 돌아서서 보면 다음주 수요일이 되어있는 기묘한 상황.
그래서일까.
산과 들이 무서웠던 나는 시골집 앞의 코스모스길을 자주 걸었다.
이 코스모스 길이 끝나면 집에 도착하지 않을까.
야, 나 지금 이 길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는 상상함..!
하지만 어림도 없지.
어린 나이에 1키로도 못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나는 어느날, 코스모스 꽃을 꺾었다.
꺾고 꺾어서, 그것들을 한데 뭉쳤다.
워낙에 알록달록한 색감덕분인지, 틀림없이 어설픈 솜씨였음에도 제법훌륭한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꽃다발을 한아름 쥐고서,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항상 혼자남겨진 나를보며 안쓰러워하시던 할머니.
매번 몰래 나만 따로 불러서 용돈을 쥐어주시던 할머니.
나는 할머니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나 할머니 주려고 이거 만들었어!!"
눈에 넣어도 안아플 손주가 길가의 코스모스를 꺾어 꽃다발을 선물한다.
어찌 기쁘지 않을수 있을까.
그러나 할머니의 행복한 표정은 채 몇 초도 가지 못했다.
"이거 줄테니까, 할아버지한테 말해서 오토바이로 엄마한테 좀 태워다조!!응?!"
할머니의 잠깐 행복했던 표정도, 오랫동안 안쓰러워하던 표정도 모두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삼십년이 지났다.
여전히 깡촌 시골은 변한것이 없고, 명절에 가면 할머니가 있다.
무력하게 얼마 걷지 못했던 코스모스길은 이제 차로 십초면 통과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을 추석 코스모스 길을 볼때마다, 그날의 꽃다발이 매번 떠오른다.
엄마가 보고싶다며 목놓아 울고 남몰래 용돈이나 받아가던 손주는, 이제 번듯한 차를 끌고 나타나 빛깔좋은 화과자를 안겨드리는 나이가 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코스모스 꽃다발을 다시 만들어보는건 어떨까.
그러나 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는게 더 아름다운 법이니까.
그리고 꽃다발만큼 알록달록하면서, 할머니를 더 기쁘게 해줄 수 있는게 따로 있으니까.
"할머니!! 이거 할머니 용돈이야!!"
파랗고 노오랗게 잘 익는 종이들.
나는 꽃다발 대신 돈다발을 안겨드렸다.
기분탓일까.
그날의 꽃다발보다 표정이 더 밝아보인다.
할머니.
할머니는 그날의 코스모스 꽃다발을 기억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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