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진전이 없을 때, 보고서 작성시 뭔가 집중이 되지 않을 때면 가끔 메모장을 띄우고 글을 씁니다.
꿈 이야기라거나, 설레였던 추억 같은... 요즘은 주로 아이 관련된 색다른 경험들을 적곤 하고요.
아, 물론 욕을 하고 싶어서 메모장을 열었던 기억은 아직 없네요.
전에 틈틈이 끄적거려 놓은 메모장의 내용을 정리할 일이 생겨 적어 봅니다.
작년 여름 결혼식 건으로 대구 내려간 김에 부산에도 들러 아내의 할머니가 계시는 병원을 방문했다.
요양 병원 인근에 살고 있어 평소에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시는 둘째 고모가 아내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평소에는 볼 일이 없다가 이럴 때만 보게 되는 게 요즘 우리네 일상이라 어색함을 지우기 힘든데, 이렇게라도 보니 그나마 반가움이 더 생기는것인지 서먹하지만 화기애애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물론 아이들 덕분에 침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약간은 밝게 유지된다.
병실에 들어서자 처 할머니는 누워 계시다가 고모가 침대 아래 손잡이를 돌려 매트를 들어 올리자 우리를 바라보시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신다.
듣던 대로 2년 전에 병원을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첫 만남때보다는 더더욱.
큰 아이가 3살 되던 해 여름휴가때 세 식구를 데리고 합천의 처 조모댁에 방문하여 사실상 처음 아내의 할머니와 대면했다.
결혼식 때는 안 오셨으니, 이후 처가에 갔을 때 친인척들을 보긴 했지만 할머니는 안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합천 본가를 지키며 사시던 분은 장인어른의 남동생이 되는, 아내의 작은아버지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두 남매-아내의 사촌들-를 키우셨는데 장성한 아들이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비록 처음 방문했지만 집안은 그 전과 완전히 다른 꼴이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 자리에 작은아버지는 안 계셨고, 작은어머니와 할머니, 사촌 동생 이렇게 셋이 있을 때 우리 부부가 3살 짜리 딸을 데리고 간 것이다.
당시 할머니의 기운은 강렬했다.
어느 시골이나 다름 없겠지만, 커다란 밥그릇에 밥을 고봉으로 떠 주시고 이런저런 반찬들을 내 앞으로 가져다 놓으셨는데, 엄청난 밥의 양을 거절 못하고 끝까지 다 먹었다.
초면에 손주 사위한테 배푸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호의를 어찌 거절하겠는가.
밥을 다 먹어갈 때쯤 더 권하시는 할머니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많이 먹었다는 답을 하자, 그 쪼매 먹고 우야냐는 면박 아닌 면박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며느리에게 얼른 밥 더 주지 않고 뭐하냐고 구박을 하시기까지 했으니...
수년 전 느꼈던 강한 기운은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기억을 많이 간직하고 계셨던 이전 방문 때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모는 당신의 엄마에게, 조카와 조카 사위, 손주들을 마치 아이에게 설명하듯 반복해서 차근차근 소개하셨다.
할머니는 끄덕이며 당신의 머릿속에 꼭 담으시려는 듯 우리들을 한명 한명 차근차근 바라 보신다.
그러고는 재차 당신의 딸에게 물어 보신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고모는 금방 알아채곤 다시 우리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신다.
큰 아이는 할머니를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고, 할머니의 상태가 양호했던 시절에 병원 왔던 기억이 있어 그나마 익숙해 하는 눈치이지만, 둘째 녀석은 낯가림을 좀 하는 편인 데다가 입원실이 있는 병원도 처음이고, 생전 처음 보는 두 할머니들이 있으니 쭈삣쭈삣 거리며 할머니와 고모의 눈길을 피해 소심하게 침대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아이들이 지루해 하는 것 같아 잠깐 병실 밖을 나가 복도를 돌면서 조금 놀고 오니 어느새 낯가림이 사라졌는지 침대 곳곳을 보며 신기한 것들에 대해 물어본다.
병원에 처음 온지 20~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아내는 울음을 참으며 떠날 채비를 하고, 고모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갑자기 둘째 녀석이 그런 엄마를 보고 해맑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엄마, 왜 울어?"
아들의 뜬금 없는 물음에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쏟아지며 대답을 못하고 훌쩍거리기만 하니, 재차 질문을 한다.
"이제 다시 못 볼 거니까 우는 거야?"
그 말에 아내와 고모는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어 흑흑 소리를 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흐느껴 울었고, 나는 병실 안에 있을 수 없어 열려 있는 문 밖으로 잠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 얼굴을 가리는 탓에 줄곳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아이가 너무 궁금해서 못참고 던진 질문.
그런데 그것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물음으로 들렸다.
돌아가실 날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지만, 아이의 말을 들으니 이제 정말 아내는 할머니를 더이상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성큼 다가왔다.
다행히도 그로부터 몇달 뒤에 장인, 장모님과 처남네 식구들과 같이 병원을 다시 찾을 수 있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어머니가 병실에 계시는 모습을 처음 본 장모님은 한스럽게 우셨지만, 우리는 더이상 침울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 전쯤 할머니의 위독 소식을 들은 뒤 마음의 준비를 했고, 아내는 회사에서 부산 출장길에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으며, 우리는 일주일 뒤인 지난주 금요일 정식으로 이별할 수 있었다.
병원의 요양기간이 길었음에도 고모들과 장모님을 포함한 여자 어른들은 장례 절차가 시작될 때 큰 소리를 내며 오열하셨고, 가장 오랫동안 모시고 사셨던 아내의 작은어머니는 담담하게 눈물을 닦으시는 것으로 심정을 대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