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편 입니다
https://cdn.pgr21.com/?b=8&n=75603
민박집을 나와 모슬포에 도착했다. 마라도행 배가 출항하는 곳이다. 매표소 직원이 오늘은 바람이 강해서 배가 못뜬다고 했다. 날씨를 보니 그럴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 생각이 안났다. 폭설이 내린 사거리 중앙에서 바퀴가 헛도는 트럭이 된 것 같았다. 기분이 센티멘탈한 날이다. 아무 계획도 없이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가 작은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지붕도 있고 의자도 있었다. 해변의 한적한 도로, 버스정류장, 여기에 느릿느릿한 전차만 지나가면 그대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었다.
예전에 연애하던 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누구와도 금새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꽉 막힌 내 심정을 들어주는 사람이라면,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나를 어루만져줄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누구와도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시기였다. 첫 연애는 여자친구 빚을 같이 갚아주다가 끝나버렸다. 그건 연애도 뭣도 아니었다. 생각하면 가슴만 쓰리니 그만두자. 두번째는 동정심에 가까운 감정으로 시작한 사이였는데 결국엔 여자가 먼저 날 차버렸다. 격렬한 열정도 죽을 것 같은 고뇌도 없었다. 마르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성격이 아니라 몸이 차가웠다. 날씬해서 부럽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뭔가 뻣뻣하고 무미건조했다. 그래도 몽정을 할 만큼 욕구불만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아아, 꿈속의 여인. 달콤하고 보드라운 여운이 다시 밀려왔다. 왜 그런 꿈을 꾼걸까. 그녀는 채털리 부인이었을까. 아니면 일출봉에서 만난 그 여자였을까. 젖꼭지 빠는 상상을 했냐고 물었을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제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확신할 수가 없다. 내 눈을 들여다 봤을 때, 빙산 아래 웅크리고 있는 어두운 내 본심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마권을 꺼내 들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제주도에도 경마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 해냈다. 경마장에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간다고 그녀가 거기에 있을까. 만나서 뭘 어떻게 하려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왠지 가야할 것 같았다. 때론 모든 이성적 사고를 정지시키고 본능적 감각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내 성욕과 불면의 비밀이 풀릴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난 말을 좋아하니까. 가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가까운 마트에서 초콜릿을 한 개 사고 경마장 가는 길을 자세히 물었다. 얼른 초콜릿을 입에 쑤셔 넣고 경마장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다행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경마 예상지를 파는 상인에게 눈이 이렇게 와도 말이 뛰나요 하고 물으니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말은 뛴다고 했다. 아니면 경마꾼들 폭동 일어난다고. 평온한 촌구석에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모여들었는지 놀랄 일이다.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건물 내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흰색톤의 깨끗한 마감재, 가지런하게 열이 맞춰진 좌석, 스크린에 빨려 들어갈 듯이 집중해 있는 사람들. 그들은 기묘한 열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외계인이 실험중인 우주선에 탑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번이나 건물을 돌아봐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급격한 허무함과 좌절감이 밀려왔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마권 하나 달랑 들고 경마장에 온 것은 미친짓이었을까. 오늘 같은날은 진짜 흡연자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은 초조하고, 뭔가 빨고 싶고, 빨아야 기분이 진정 될 것 같고. 주머니에 담배만 있다면 몇 대 연속으로 태워버릴 것 같았다. 흡연실 쪽에서 음울한 연기가 가득 밀려왔다. 시체를 태운 것처럼 음습한 기운이 짙게 부유하고 있었다. 뭔가에 끌리듯 흡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카이지에 나오는 절망의 배 에스포와로 호였다. 절망의 연기가 그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호흡이 아니었다. 허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오는 진한 파멸의 날숨이었다. 침침한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녀였다. 음산한 묘지의 까마귀 떼 사이에 홀로 서 있는 고고한 한마리 학이었다. 성스러운 빛이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내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대 드릴까요?"
"아뇨, 아뇨. 전 안피워요."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 개구진 표정을 지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는 나가자고 말했다. 정말 너무너무 반가웠다. 전에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검정색과 회색이 교차된 체크무늬 스커트에 검정색 면 폴라, 아이보리 빛이 들어간 흰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단정하고 근사했다. 오늘따라 마권이 많이 맞았다고 아이처럼 웃었다. 순간적으로 꽉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꿈 탓일까. 잠깐 만났지만 오래 알고 지낸 것 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의 반가움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비밀이 많은 여자는 매력적이다. 봄철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밀려드는 햇살처럼, 따스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것 같았다. '아, 고단하고 지루한 내 삶을 너의 환한 빛과 향기로 채워 줄 수 있다면...' 감정선이 미쳐버린 것 같았다. 시험, 여행, 여자, 경마, 담배. 아무런 연관성도 연결고리도 없이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 경주로가 잘 보이는 쪽에 자리를 잡았다. 몇 경주를 구경했더니 약간 지루해졌다. 룰을 모르면 백날 들여다 봐도 즐길 수가 없으니까.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이건 뭐하는 거냐. 벌레들의 전쟁이냐' 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그녀에게 베팅 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단승식, 쌍승식, 복승식, 복연승식. 수학 용어처럼 생소한 용어들 때문에 머리가 쑤셨다. 거기다 1000m, 1200m, 1500m 등등 거리도 달랐고 뛰는 마리 수도 적게는 8마리에서 많게는 15마리까지 생각 외로 복잡했다. 마킹 용지를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그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런걸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아세요?"
"아, 저도 남편 때문에 알게 됐어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리는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척 하려 했지만 눈동자는 풍랑 속의 돗단배 같았다. 아, 진짜. 이 여자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걸까. 진짜 미칠 것 같았다. '하하하 그러셨어요. 좋은 남편이시네요.'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난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그녀는 나의 안색을 보고 왜요? 왜요? 하고 물었다. 열나는 아이 머리를 짚어 보는 엄마 같은 표정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억지 웃음으로 덮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오늘은 솔직한 내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꽁꽁 감추려 해도 다 드러날 것 같았다.
"하아, 남편이 있으신지 몰랐어요..."
"아...그...지금은 없구요. 전 남편, 전 남편."
뭔가 위로를 하려고 한 말일까. 난 영문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나에게 뭔가를 약속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왜 배신감을 느끼는 걸까. 배신한 사람은 없는데 배신 당한 사람만 있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멍하게 앉아서 말이 뛰는 모습을 바라봤다. 탄식을 하는 사람,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욕지꺼리를 하는 사람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뭐가 재밌어서 이걸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출발해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뿐인데. 눈 가리고 뛰는 말이나 내 모습이나 별 다른게 없는것 같아서 약간 서글퍼졌다.
경마가 끝났다. 그녀는 돈을 약간 딴 모양이었다. 나에게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 진짜 아무 생각이 안들었다. 그냥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런 심정이었다. 술집이 있을만한 곳으로 차를 타고 나왔다. 제주도 흑돼지 파는 식당에 가서 된장찌개에 소주나 3병쯤 마시고 빨리 뻗어버리고 싶었다. 나를 이끌고 간 곳은 지하의 어느 조용한 바였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구석에 부스처럼 만들어진 자리가 있어서 거기에 앉았다.
그녀는 이름모를 칵테일을 마시겠다고 했다. 나는 독한 위스키를 마시겠다고 했다. 이렇게 입맛이 씁쓸한 날에는 위스키가 달게 느껴질 것 같았다. 온더락스요? 하는 말에 네? 하고 반응했는데 웃으면서 얼음에 타서 먹을거냐고 물었다. 온더락스가 얼음에 타먹는 거였구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그녀도 위스키를 같이 마시겠다고 하고 병으로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 만지작 거렸다.
"왜 분홍색을 샀어요?"
내 핸드폰이 분홍색인걸 보고 그녀가 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약정에 매이는 것은 죽어도 싫었고 새걸 사기에는 돈이 아까웠으니까. 인터넷에서 중고로 산 폰이었다. 기능만 잘 돌아가면 상관 없었기 때문에 디자인은 신경써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중고로 샀어요. 싸더라구요."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앞으로는 중고 폰은 쓰지 말라고 했다. 전남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런 스몰 토크도 정말 즐거웠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쓰렸다. 술이 나왔다. 얼음은 넣지 말고 글라스에 절반쯤 술을 채워달라고 했다. 그녀와 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크게 한모금 꿀꺽 삼켰다. 뜨끈한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가슴이 또 쓰렸다.
"오늘 경마장에는 왜 오신거에요?"
가볍게 위스키에 입술을 적시면서 그녀가 물었다. 이제와서 뭘 어떻게 더 하겠는가. 내 감정을 숨김 없이 말하고 싶었다.
"그냥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입가에 옅은 미소가 묻어 있었다.
"저는 저 또래이거나 어리신줄 알았어요. 결혼 하신줄은 진짜 몰랐습니다."
전남편 이야기에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녀가 술 잔을 내밀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몸도 피곤하고 빨리 취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분이 경마를 좋아하셨나봐요."
"엄청 싫어했어요."
아까 경마장에서는 남편에게 경마를 배웠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마학교 출신이었는데 결국 기수는 못되고 말 조교사를 했죠. 저는 경마장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어요. 약간 다혈질이긴 했지만 가정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말 끝을 흐렸다. 경마학교에 조교사라. 진짜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신기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갑자기 전 남편의 캐릭터가 궁금해졌다.
"근데 어쩌다...헤어지신 거에요?"
"죽었어요."
아, 이 여자. 나를 몇번 놀라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 괜한 이야길 꺼내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이제 지나버린 일인걸."
자책하는 표정으로 술잔만 들이켰다. 술기운이 슬슬 올라왔다. 그녀가 말했다.
"옛날 이야기 궁금하세요? 들어보시겠어요?"
난 이런 이야기 듣는게 너무 재미있었다.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뜻밖에 그녀의 어머니는 어느 지역에서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점쟁이라고 했다. 복채로 벌어드리는 수입도 상당했고 여러 유력가들이 점을 보기 위해 몇달 전부터 예약을 할 정도로 용한데가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부모님이 무속인이면 학창시절 친구들이 피하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가끔 밥을 사줄 정도로 사교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한가지 힘들었던 것은 다른 사람 손이 탄 물건을 절대 쓰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어떤 귀신이 붙은 물건인지 모르기 때문에 물건은 거의 새것을 사서 쓸 수 밖에 없었다.
대학교에서도 원만한 교우 관계를 가졌었는데 과제 때문에 친구 책을 빌려 온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 어머니가 친구의 책을 태워버렸다는 거다. 그 일이 좋지않게 소문이 나서 학교를 휴학하고 몇년을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 지인의 소개로 전 남편과 만남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관상도 좋고 서로 기운이 잘 맞으니 일찍 결혼하라고 부추겼다. 한동안 외롭게 지냈던 그녀는 어머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다. 갑자기 그렇게 기운이 잘 맞는다던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졌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거에요?"
"아뇨. 말 훈련시키다가 말에서 떨어졌어요. 머리부터 떨어졌는데 하반신에 마비가 왔다고 하더라구요. 그 후로 남편은 침대에 누워서만 지냈어요."
그녀는 잔에 술을 삼분의 일쯤 붇더니 그대로 삼켜 버렸다. 술기운이 버거운듯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렇게 몇개월이 지나고 남편이 친정에 잠시 가 있으라고 해서 집에 내려와 있었어요. 시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창문으로 투신 자살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하아..."
피곤과 술기운에 절어가던 정신 순간적으로 확 깼다. 그녀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시울이 붉어져있었다. 안타까워서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비밀이 많은 여자 같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를 아득히 넘어선 수준의 비밀들이었다.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나지 않게 할 방법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주보고 눈물을 닦아주는 것 뿐. 이상하게 가슴이 쓰렸다. 진짜 이 좁은 가슴이라도 괜찮다면 안겨서 엉엉 울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몸을 추스르고 다시 미소를 찾았다. 아직 눈에는 물기가 가득 했다.
"저 푼수같죠. 혼자 말하고 혼자 울고."
"아뇨, 아뇨. 저도 예전 여자친구 생각하면서 혼자 많이 울어요. 오늘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마음이 너무 애잔하네요."
"경마장에서 말 뛰는 모습도 보고 돈도 조금 잃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서요. 저 나름에 위령제인 셈이죠."
한동안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 없이 술 잔만 기울였다. 술기운 때문에 눈 앞이 핑핑 돌았다. 하드밥 풍의 느릿한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앉은 부스는 자욱한 담배 연기에 감싸져 있었다. 이 공간만 다른 물리법칙 속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잔을 들고 그녀의 옆자리로 잽싸게 옮겨 앉았다. 그렇게 술이 취한 와중에도 긴장이 확 됐다. 시집온 새색시 처럼 무릎을 모으고 술 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도 쳐다 봤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미인이신거 같아요."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킥킥 웃었다. 난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와락 껴안아 입을 맞춰 버렸다. 진한 담배 맛이 났다.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 아아, 천국의 맛이다. 아련하게 장작 타는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겨울에 빈 논에서 연을 날리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큰집으로 돌아올 때 맡은 그 냄새였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봤다. 입은 약간 벌어져 있고 눈은 촛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입술 가에 침 자국이 번들번들 빛났다. 너무 요염했다. 미칠 것 같았다. 다시 입을 맞추고 혓바닥을 깊숙이 집어 넣었다. 찢어진 호떡 꿀 속으로 혓바닥을 쳐박는 기분이었다. 너무 따뜻하고 끈적끈적하고 달콤했다. 정신 없이 입을 맞추느라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양손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밀며 제지했다.
"다른 사람들이 봐요."
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다른데로 가요."
그녀의 손을 끌고 계단을 오르면서 딱 한가지 생각 밖에 안들었다. 제발 근처에 깔끔한 모텔이 있었으면. 모텔이 많을 것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인기척이 없어서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에 대문짝만하게 모텔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기로 들어갔다.
난 원래 씻는 것을 좋아했다. 여름이면 하루에 네번, 다섯번씩 샤워를 했다. 딱히 깔끔해서라기 보다 물을 맞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정성들여 씻어야 할 것 같았다. 뭔가 성스럽고 거룩한 일이 있을 것만 같으니까. 이런 날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된다. 가장 멋진 성찬은 햐얀 식탁보가 깔린 작은 테이블에서 은제 식기와 따뜻하게 뎁혀진 그릇에 담아서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법이다. 느리게 또 느리게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를 침대에 앉혀 놓고 씻고 오겠다고 했다. 옷을 빠르게 벗어서 창가쪽 의자에 걸쳐놓았다. 씻으러 들어갔던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녀에게 이리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머리가 젖으면 안되는데 라고 투정을 부리면서 옷을 하나씩 벗었다. 미리 물을 따뜻한 온도로 뎁혀놨다. 정성들여 씻어 줄 예정이다. 그녀의 몸에서 과일맛이 났으면 좋겠다. 그녀는 머리에 수건을 감고 들어왔다. 뽀얗고, 매끈하고, 풍만한 몸매였다. 아랫배에는 수술자국이 보였다. 이제 그런건 놀랍지 않았다. 그녀를 천천히 인도해 따듯한 물로 온 몸을 헹궈줬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반죽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살이 말랑말랑해서 친구들이 쉴새없이 괴롭혔다. 심지어 내가 1반일때 10반에 있던 친구가 쉬는 시간마다 날 괴롭혔다. 샤워 타월로 그녀의 구석구석을 닦아주면서 여자의 몸은 정말 보드랍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피부가 정말 뻑뻑하고 거칠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손으로 머릿 수건을 잡고 있었다. 뽀얀 겨드랑이와 분홍빛 유두가 눈에 들어오자 스프링처럼 발기가 됐다. 정말 부러질 듯이 딱딱하게 발기가 됐다. 비누 거품이 묻은 채로 그녀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쳐박고 낼름낼름 핥았다. 보드레하고 따듯한 감촉 때문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렇게 온 몸을 구석구석 핥았다.
같이 씻고 나와서 그녀를 침대에 앉혀 놓고 완전히 불을 껐다. 이불 속에서 그녀의 젖꼭지를 빨았다. 절대 허기가 가시지 않은 아이처럼 계속 빨았다. 달콤한 즙이 나오는 것 같았다. 포들하고 따듯했다. 그대로 몇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능숙한 기수가 말을 타듯이 나를 탔다. 어둠 속에서 뽀얗고 동근 그녀의 유방이 달랑 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아, 이것이 쾌락이구나. 이대로 죽는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사정해버렸다. 몇년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쓸쓸함, 황량함 같은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온 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어버렸다. 너무 따뜻하고 포근한 가슴이었다.
아침에 뒤척이는 느낌 때문에 잠시 잠에서 깼다. 그녀가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녹은 치즈처럼 나른했던 나는 다시 잠에 빠져 버렸다. 눈을 떴을때 그녀는 가고 없었다. 일어났을때 너무 황망해서 한동안 멍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약쟁이들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을때처럼 무기력하고 억울한 기분이들었다. 나는 옷을 입고 모텔을 나왔다.
그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경마장을 찾았다.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예정했던 여행 기간이 다 되었다. 경마장에서 그녀가 준 마권을 환급받으려고 했다. 경마장 직원이 그 마권은 적중되지 않은 마권이라고 했다.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자취방 문을 열었을때 찌든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장작 타는 냄새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시험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고 말씀드렸다.
- the end -
---------------------------------------------------------------------------------------------
처음 완성시켜 본 소설이라 너무 감격스럽네요.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론: 가슴이 최고야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