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담에 픽션을 가미해서 써봤습니다. 처음 써본 소설이라 분량이 무한히 길어지네요ㅠ
하편은 주말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음란한 표현이 문제되면 자삭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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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고시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결코 합격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체감하면서도 계속 도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강단에서 평생을 보내신 아버지와 언제나 헌신적이었던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였다. 시작과 끝이 둥그렇게 이어진 철길 위에서, 관성 때문에 꾸역꾸역 앞으로 나가는 기차가 된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난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짜고짜 여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백팩에 간단히 속옷, 양말 몇 켤레만 챙겼다. '공부하느라 고생했는데 며칠 쉬고 가지 않구.' 느닷 없이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에 어머니의 눈은 걱정과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구차한 이야기를 늘어 놓고 싶지 않았다. 채점을 해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고 있었으니까. 말 없이 어머니를 껴안아드리고 집을 나섰다. 손이 차가웠고 전보다 야위신것 같았다.
제주도로 향하는 저녁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앞좌석에 달린 작은 테이블을 펴고 공항에서 사온 맥심 잡지를 읽었다. 스튜어디스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독서용 조명을 켜줬다. 빛에 민감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친절이 쓸모 없게 느껴졌다. 드문드문 비어 있는 한산한 비행기 안에서, 따뜻한 느낌이 도는 조명 아래에서, 단아하게 생긴 스튜어디스가 서빙해 준 주스를 마셨다. 창 밖으로 거뭇거뭇한 바다가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비일상적 감각이었다. 비행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졌다.
뜻밖에 제주 공항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득 서글픈 기분과 함께 접이식 자전거를 끌고 일본 여행을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토를 가로지르는 천변의 어느 벤치에서 노숙을 했었는데, 새벽에 큰 비가 내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 하다가 가까운 빌라 입구 우편함 아래서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잤었다. 이제 그때만큼의 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든 빨리 따뜻한 곳에 눕고 싶었다. 공항까지 픽업을 해주는 민박집이 있어서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혼자 오셨나봐요?' 운전석에서 한동안 말이 없던 사장님이 정적을 깼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것이 뭔가 미안해서 먼 곳까지 데리러 와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2월은 비수기여서 왠만큼 먼 거리가 아니면 태우러 갈 수 있으니 언제든 전화하라고 명함을 내밀었다. 크리스마스나 설 연휴는 지났고 개나리가 피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했다. 의도치 않게 딱 좋은 시기에 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민박집에는 나 말고 한팀이 더 있었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파란색 포카칩을 안주삼아 맥주를 두 캔 마셨다.
시험 공부를 하면서 불면증을 얻었다. 낮 동안은 끔찍하게 무기력하다가도 불끄고 누우면 정신이 또렷해졌다. 온갖 방법을 써봐도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도움이 된 것은 정말 두껍고 재미 없는 책을 꺼내 읽는 것이었다. 하루치의 허용량을 초과해 버린 뇌는 새롭게 입력되는 정보를 그대로 흘려보내 버렸지만, 새벽녘에는 다만 몇시간이라도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제주의 해풍이 달싹달싹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 세대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2루타 정도 치는 정도야. 홈으로 불러들이는건 니네들 몫이지'
작년 가을에 아버지와 등산을 갔었는데,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버지에게 돈을 부쳐주면서 한번도 사용처를 물어보지 않으셨다는 큰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은 나의 진로나 학업에 대해 무심할 정도로 간섭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침묵 이면에 숨어있는 거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다. 때론 백마디의 거센 질책보다 침묵 끝에 나온 고요한 한마디가 더 무거운 법이니까. 어느 소설에서 본 것 처럼 바닷 바람과 안개 따위로 만든 천연의 수면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느즈막히 일어나 가까운 해변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해수욕장인지 이름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바람 소리와 파도 치는 소리를 들려줬다. '부럽다고 말해. 빨리 부럽다고 하라고!' 뭐 그런 감정이었다. 정처없이 백사장을 걷다가 추워지면 카페에 들어가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허브 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그런짓을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아침 10시가 넘어서 사장님이 깨워줬다. 얼른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점심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사장님에게 뭐가 맛있는지 물어봤다. 갈치국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식당이 많은 거리로 나가서 손님이 몇팀 있는 곳에 들어가 갈치국을 주문했다. '학생이야? 혼자왔어?' 이 질문만 서너번은 받은 것 같다. '제주도 왔으면 갈치 조림을 먹어봐야하는데.' 여사장님이 아쉽다는듯 혀를 끌끌찼다.갈치국이 하얀색이어서 놀랐고 호박이 들어있어서 놀랐고 매워서 놀랐다. 사장님이 작은 냄비에 갈치 조림까지 만들어 주셔서 또 놀랐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든든하게 밥 한그릇을 비웠더니 기운이 났다. 마트에서 500ml 맥주 두캔을 사서 양쪽 주머니에 꽂고 일출봉 쪽으로 출발했다.
일출봉 정상에는 토끼가 있었다. 정말 뜬금 없는 토끼였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아득히 먼 수평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경치를 구경했다. 아무 생각도 안나고 너무 좋았다. 걱정도 근심도 없이 집이나 한 채 지어놓고 평생 바람이나 맞으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망이 괜찮은 쪽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해풍 덕분인지 맥주가 진짜 달콤했다. '와 씨X 졸라 맛있다!' 이렇게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때 어떤 여자분이 점퍼 주머니 위로 비죽이 튀어나온 캔을 가리키며 말을 걸어왔다.
"그 맥주 저한테 파시면 안될까요?"
약간 당황했으나 돈을 받고 맥주를 나눠 먹는 일 따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난 신사답고 관대한 사람이니까.
"드, 드리겠습니다."
지갑을 꺼내려는 여자분에게 엄청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안주셔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내가 건넨 맥주를 받아들었다. 주위를 배회하며 경치를 보다가 근처에 앉아서 맥주 캔을 땄다.
"맥주를 진짜 맛있게 드셔가지구요. 같이 마셔도 되죠?"
그렇게 하라고 했다. 누군가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딱히 할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만 이어지는 와중에 토끼 한마리가 뛰어들어왔다. 여자는 쭈그려 앉아서 그 녀석을 데리고 놀았다. 관광객들 손을 많이 탄 놈인지 도망가지 않았다. 구세주 같은 녀석이었다.
"아래쪽 식당에서 갈치국 드셨죠?"
"네? 어떻게...?"
"아까 식당에서 봤어요."
"아 그러셨구나.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어서 궁금해졌다.
"혼자 오신거에요?"
"네, 혼자왔어요."
"저도 혼자 왔습니다. 3일째 됐어요."
"아 그럼 어디 어디 보고 오신거에요? 아무 계획도 없이 와가지구... 좋은 곳 있으면 알려주세요."
추천 해줄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름 운치 있었던 해변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
"저도 이쪽 지리를 잘 몰라서요, 마라도 같은데 가보시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마라도 꼭 가봐야겠네요. 일출봉 꼭대기까지 맥주 사오신거 보고 진짜 여행 제대로 하시는 분이라고 알아봤어요. 저도 다음부턴 맥주 사가지고 다니려구요."
여자는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저기...혹시 뭐하는 분이세요?"
여자들이 원하는 배우자 직업 순위에서 광부보다 아래에 있는 것이 고시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여자랑 결혼할 생각이 있는건 아니었지만 고시생 보다는 일출봉 정상에서 목숨처럼 소중한 맥주를 나눠 준, 너그럽고 관후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쪽이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는 나를 급하게 제지했다.
"잠깐, 제가 맞춰볼게요. 저 이런거 잘 맞추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감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기운 같은 것이 있어서 정말 맞춰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가벗겨진 것 같은, 거짓말을 하다가 들켜버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예술 같은거 하시는 분 맞으시죠? 그림이나 글 쓰시는분?"
너무 황당해서 피식 웃었다가 결국엔 '하하하하' 소리내서 크게 웃어버렸다. 한참을 웃었더니 경계심이 약간 무디어진 것 같았다. 긴장했던 몸도 조금 이완됐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날 웃겨버렸으니 내용이 어떻든 탓하지 않겠다.
"저 고시생입니다. 이번에 시험 치고 여행 온거에요."
"아 그러시구나. 너무 신기해요. 저 고시 하시는 분 처음 만나봐요. 공부 엄청 잘하셨나보다."
"아, 아뇨 그런건 아니구요."
눈을 대빵만하게 뜨고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표정이 다양한 사람을 보고 있으면 즐겁다. 불만은 많고, 책임 질만한 일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 험담이나 늘어놓는 인간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면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표정만 짓게 되니까. 자주 웃고, 자주 울고, 가끔은 화를 내는 사람이 좋았다.
입이 트였는지 본인 신변잡기를 늘어놓았다. 집이 서울이라는 것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아무 계획도 없이 왔다는 것 그리고 방 계약이 오늘 밤까지여서 내일은 숙소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수다쟁이들이 좋았다.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좋고 적당한 타이밍에 '진짜야? 너무 재밌다' 이런 리액션만 해도 즐거워 하니까.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멜로디만 연주하는 단선율의 음악같이 들렸다. 문득 제주도 온 첫날 민박집 사장님에게 받았던 명함이 생각났다. 여자에게 민박집을 소개시켜 주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고민이 됐지만 난 추천만 하는 사람이고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니까. 그녀는 명함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고맙다고 했다.
바닷가는 해가 짧았다. 온세상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빛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그녀의 볼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긴장이 될 만큼 예쁘지도 않았고 밉게 생기지도 않았다. 전체적으로 포근한 인상이었다. 청바지에 캔버스화 차림이었는데 묘하게 나이를 가늠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다른 옷을 입었어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원래 그런건 잘 못맞췄으니까.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가 날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제 젖꼭지 빠는 상상 하셨죠?"
"??????????????????????"
정말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다. 새파랗게 질려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저 그게..."
"아하하하. 미안해요. 미안해요. 너무 재미있게 생기셔서. 킄킄."
여자는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와 이런 미친...'
좋았던 기억이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이런 농담을 하는게 요즘 트렌드인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약간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힘껏 구겼다. 빠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도 분위기를 알아챈듯 주섬주섬 일어설 준비를 했다.
"오늘 맥주 잘 마셨어요. 다음에 만나면 제가 술한잔 살게요."
'다음에 언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남은 기간동안 여행 재미있게 하시구요."
엉덩이를 툴툴 털고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여자는 민박집 명함을 지갑에 꽂아 넣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나를 불러세웠다. 메모지 크기의 흰색 종이였다.
"이게 뭔가요?"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맥주값이에요. 그거 마권인데 나중에 경마장 가시면 바꿔 쓰세요."
'서울 경마 공원 제X경주' 라는 문구가 보였다. 경마장에 가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마권이 그렇게 생긴건지 처음 알았다. 길게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신기한 사람들이 진짜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작별을 고했다. 약간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쳐버려서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샤워를 하는 내내 까닭 모를 후회가 찾아왔다. '아씨, 그때 재치 있게 받아 쳤어야 하는건데...'
정서적으로 잔뜩 들뜨는 체험을 한 날에는 더욱 또렷한 불면의 밤이 찾아온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끔찍한 공허함과 자학의 시간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민박집 책꽂이에서 가장 재미 없어 보이는 책을 골라 방으로 들어갔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이었다. 의외로 재미있었다. 몰입해서 읽다가 새벽에 한두시간 깜빡 잠이 들었다. 깼을때는 이미 새벽의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한라산을 등반하기 위해 일찍 민박집을 나섰다. 날씨가 우중충해서 걱정이 되었는데 성판악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산 관리하시는 분들이 청바지를 입고 이어폰을 꽂은 내 모습을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꼴로는 입장 못시키니까 돌아가라고 했다. 간곡하게 사정을 하자, 매점에 가서 우의와 아이젠이라도 사오라고 했다.
정말 우의와 아이젠 값이 아깝지 않았다. 그곳은 눈의 세계였다. 새하얗고, 정돈되어 있고, 은은한 빛이 있었다. 좁고 어두운 방,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책상과는 평행한 다른 우주 같았다. 깨끗한 냉기에는 아직 겨울 냄새가 남아 있었다. 이런 날은 걸어도 걸어도 전혀 힘들지 않다. 눈을 먹으면서 수분을 보충했다. 눈가루에 마약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랜덤으로 설정해 놓은 플레이어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침 듣고 싶은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루야!' 온몸에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백록담은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가려져 있어서 더 보기 좋았다. 보일듯 보일듯 보이지 않는 모습이 더 신비감을 주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등산객들이 많았다. 가방에서 맥주를 꺼내 경치를 보면서 마셨다. 부러워하는 분들도 있고 미친놈 쳐다보듯 하는 분들도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진달래 산장에서 육개장 사발면으로 속을 풀었다. 진짜 그릇까지 핥아 먹고 싶었다.
민박집에 돌아와서 한라산에 갔다왔다고 했더니 '이 날씨에 그렇게 입고 가신거에요?' 라며 경악했다.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사장님에게 혹시 새로오신 손님 있냐고 물어봤는데 전혀 없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약간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다 읽지 못한 책을 뽑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전쟁통에 하반신 불구가 되자, 부인이 불륜을 저지르는 이야기였다. 어쩌겠는가, 운명을 탓하는 수밖에. 사랑이란 내로남불인 것을. 채털리 부인이라는 고리타분한 제목 답지 않게 성애 묘사가 생생했다. 완전히 빠져들어서 읽었다. 정확히 말하면 채털리 부인의 상대역으로 나온 사냥터 지기 캐릭터에 몰입해버렸다.
그날 밤 꿈을 꿨다. 거의 몇년만에 꿈을 꾼것 같았다. 꿈속에서 어떤 여인과 격렬한 섹스를 나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얼굴을 알아 볼수가 없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속에 나오는 그런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다. 고깃덩이처럼 풍만하고, 완숙하고, 마음이 푸근해지는 몸이었다. 우린 꽈배기처럼 기묘한 형태로 살을 맞대고 있었다. 두툼한 그녀의 가슴을 양손으로 잡고 사정없이 젖꼭지를 빨기 시작했다. 진짜 정신이 나간듯이 계속 빨았다. 너무 따듯하고 포근한 가슴이었다.
눈을 떴을때는 거의 12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렇게 깊게 잠들어 본 적이 몇년 만이던가. 정말 꿀맛같은 잠이었다. 머릿속이 너무 깨끗해서 한동안 천장을 보고 멍하니 누워있었다. 속옷이 끈적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속옷을 갈아입고 화장실로 갔다. 거울 속에 나이를 서른 가까이 쳐먹고 제주도까지 와서 몽정한 팬티를 빨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정말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면서도 어쩐지 만족스럽고 마음이 푸근해졌다. 뭔가 어제보다 내 자신에게 더 솔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下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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