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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11/02 11:38:59
Name TossLize
Subject [펌글] 장훈
본명: 장훈
출생: 1940년 일본 히로시마
투타: 좌투좌타
포지션: 외야수 (좌익수)
도에이 플라이어즈 (1959~1972)/닛타쿠 홈 플라이어즈 (1973)/니혼햄 파이터즈 (1974~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79)
롯데 오리온즈 (1980~1981)
귀화안함....한국국적







생애통산 3,085안타, 수위타자 7회, 베스트나인(외야수) 16회의 일본 최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불세출의 대타자가 일본에서 '하리모도(張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의 장훈(張勳) 선수다.
한국계의 가네다 마사이치(김정일 귀화)가 투수 부문 최고기록을 많이 보유하고 있듯이 장훈은 타격 부문에서 여간해서는 경신되지 않을 불멸의 대기록을 세워 놓은 희대의 슈퍼스타다.
텃세가 심한 일본 프로야구 판에서 타격 최고기록과 투수 최고기록을 한국계가 나란히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장훈은 1940년생으로 오사카의 나니와 상고를 졸업했다.
교명을 줄여서 '니미쇼(浪商)'로 불리는 간사이 지방의 야구 명문교로 선후배와 동료 중에는 프로야구계에서 이름을 날린 명선수가 많다.
고교 재학 중에 뜻하지 않게도 야구부 내 폭력사건 중 그를 못마땅히 여기던 감독에의해 주동인물로 지목되어 근신처분을 받은 탓으로 고시엔 대회에는 나가지 못했지만(감독은 조선인을 싫어했답니다.또한 조선인이면서도 항상 당당한그를 싫어했읍니다.) 투수겸 4번타자로 팀을 이끌고 있던 장훈의 명성은 중앙에까지 자자했다.
(이때 장훈에게는 많은시련이 있었읍니다. 하숙을 같이하던 절친 일본인친구와의 여러사건을 겪었읍니다.그뒤 그친구는 야쿠자 보스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읍니다.그리고 장훈은 싸움하나 기가막히게 잘했답니다.)
특히 당장 프로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를 받은 그의 타력은 프로 스카우터의 주목의 대상이었다.









일찍부터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키워 온 장훈은 그 시대 야구소년들이 모두 그랬듯이 오로지 자이언츠만이 목표였다.
실제로 나니와 상고 2학년 때 천하의 미즈하라 거인군 감독이 오사카에 와서 장훈에게 "프로야구 선수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학교를 중퇴하고 자이언츠에 들어오는 것이 빠른 길이다"라는 권유를 받고 크게 감격했으나 형 정렬(正烈)이 중도 퇴학을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도 미즈하라 감독의 거듭된 스카웃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를 싸움꾼으로 잘못 이해한 프론트 고위층의 반대에 부딪혀 두 번 좌절을 맛보았다.










고교 졸업 때는 그를 둘러싸고 9개 구단이 움직였으나 이와모도 감독이 몸소 히로시마의 연립주택을 찾아와 돗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성의 있는 교섭태도를 보인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했다. 당시 야구전문 잡지는 도에이가 장훈을 입단시킨 것을 두고 '도에이의 대홈런'이라고 특보했다.
(여기에는 이야기더 있읍니다,일본은 외국인2명만이 뛰게되어있어서 도에이 구단주는 그를 자신의 양자로받아들여귀화를 제안함니다.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는 고민을 합니다.
또한 역도산도 귀화를 했기때문에 많이흔들렸고 무엇보다 야구를 하고 싶어기때문이었읍니다.그러나 어머니의 완고한 반대"조상를 바꿀바에는 야구를 때려쳐라"로 인해 도에이입단은 사라져가고 있었읍니다.
그때 도에이 구단주가 1945년이후에 일본 출생자는 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일본야구조항에 삽입함으로써 극적으로 도에이입단에 성공합니다.물론그를 위한 조항입니다. 도에이의 정성에 그는 입단 합니다.)









부푼 꿈을 안고 프로야구에 뛰어들었지만 프로가 생각만큼 무르지 않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실감하게 된다.
입단 첫해 시범경기와 개막초기의 실전을 통해서 마음만 앞서 나갈 뿐 프로의 스피드와 다양한 구종을 무리 없이 다루어 내기에는 아직 미숙한 구석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장훈의 비범한 타격재능을 꿰뚫어보고 있던 이와모도 감독은 꾹 참고 5번타자 자리에 고정시켜 주었다.
그리고 타격이론에 밝은 보스형 코치 마쓰기가 전담으로 타격을 지도했다. 타고난 소질과 부단한 연구 그리고 밤을 잊은 연습으로 차츰 프로 투수에 익숙해진 시즌 중반부터 거물신인의 진가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일본언론이 대서특필한 '18세의 4번타자'에 발탁됐다.
(장훈의 타격부진은 어렸을때 입은 화상으로 오른손과 왼손의 힘의 균형이7:3 이어서 타격시 발란스가 잘 무너지는것이었읍니다. 이를발견한 마쓰기 코치는 오른손으로만 스윙을 하게 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고 그는 하루에300개에서 많게는500개의 스윙을 오른손 하나로 햇읍니다.)





신인답지 않은 안정된 타격으로 중심타자 역할을 훌륭히 해냄으로써 감독의 기대에 보답한 장훈은 그해 신인왕에 선정됐다. 125경기에 출전해 타율 0.275, 13홈런, 57타점으로 신인의 평균수준을 크게 웃도는 좋은 성적이었다.(그느 이때 3할이안되었다고 자책했답니다.)







마쓰기 코치의 열성적 지도와 본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드디어 타격인 생애의 큰 밑천이 된 광각타법(廣角打法) 요령을 조금씩 몸에 익히기 시작한 2년째부터는 순풍에 돛을 단 듯한 항해가 이어졌다.
(그는 시즌이 끝난뒤 홀로 스윙연습을 했다고 합니다.겨울캠프가열리기전까지요)
2년째 징크스는 근처에도 오지 못했고 다른 구단 투수의 견제가 심해졌지만 거기에 위축될 장훈이 아니었다.
꿈꾸던 타율 3할을 돌파했고 장타력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3년째가 되는 1961년에 명장 미즈하라가 도에이 감독으로 부임해 왔다.
(요미우리시절 그를 스카웃하려 했던 장본인입니다.)
전부터 자기기량을 제대로 알아주던 대감독을 맞이한 장훈은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생기에 넘쳤다. 시즌 마지막까지 난카이와 우승을 다툴 수 있을 만큼 팀이 단단해졌을 뿐 아니라 장훈은 영광의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하여 개인적으로도 기념할 만한 시즌이 됐다.
이로써 장훈은 수위타자 7회라는 일본 프로야구사상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향해서 힘찬 첫발을 내디뎠다.

1962년 시즌은 도에이의 해였다. 이해 도에이는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일본시리즈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4승2패로 물리치고 숙원의 일본선수권을 손에 넣었다.
또한 장훈은 페넌트 레이스 최우수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고 그해 가을 센트럴리그의 고쿠데쓰 스왈로즈와 함께 시범경기를 위해서 고국을 방문하여 프로야구 선수로서 대성한 모습을 모국 팬 앞에 자랑했다.









일본 매스컴들은 이 무렵부터 장훈에게 '안타제조기'라는 별명을 지어 붙였다. 그 별명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도에이에서 뛴 17년간(팀명칭을 바꾼 닛타쿠홈 1년, 니폰햄 2년 포함), 그는 13시즌에 걸쳐 꾸준히 3할대 타율을 유지하는 빼어난 타격솜씨를 자랑했다. 타율이 3할에 미달한 시즌이 4번 있었지만 그래도 매번 3할에 가까웠고, 입단 첫해의 0.275가 가장 낮은 타율이었다. 전혀 기복이 없는 그의 타격 행진은 '타격의 신' 가와가미나 노무라 가쓰야, 나가시마, 오- 등 대타자를 능가하는, 유례가 없을 만큼 순조로운 배팅 레이스였다.









장훈은 수위타자 7회, 최고출루율 9회의 타이틀을 차지했고 신인왕·최우수선수 1회, 베스트나인 16회의 표창을 받았으며, 일본 최고기록은 수위타자 7회, 통산최다안타 3,085, 1이닝최다2루타 2, 퍼시픽리그 기록은 시즌최고타율 0.383, 통산최다고의4구 223, 경기최다실책(외야수) 3이다. 타이틀과 기록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 알맹이는 모두가 천만량짜리다.
그러나 평소 수비불안이 자주 지적되던 그답게 경기 최다실책(외야수) 3은 일본 타이기록이다.








그가 터득한 광각타법 즉 부채꼴타법이란 투구의 코스를 거스르지 않고 당기고 되받아 치고 미트해서 좌·중·우 어느 쪽이건 투구코스 방향으로 타구를 날려 보낼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의 타법이다.
은퇴 후에는 각팀이 다투어 그를 강사로 초빙해서 비법을 배우려고 애를 쓸 만큼 타격술의 교과서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장훈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그 광각타법을 손색없이 이어받은 타자는 오릭스의 천재타자 이치로뿐이다.
그가 타고난 또 하나의 천분은 좌투수에게 강한 타격솜씨다. 좌타자는 좌투수에 약하다는 것이 통념이지만 장훈만은 완전한 예외다. 그가 날린 안타가 야구장 곳곳으로 고르게 퍼져 날아갔듯이 좌·우 어느 투수에게서나 골고루 안타를 쳐 낼 수 있는 빼어난 타격술이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장훈의 독보적 영역이다.
이로 미루어 타격이란 소질과 노력 그리고 자신감이 밑받침돼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좌타자는 좌투수에 약하다는 따위의 통념이나 선입견은 약자의 핑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가끔 시도해서 성공을 거둔 세이프티번트는 타율을 벌어 들이는 전술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강타자답지 않다는 시기의 시선도 없지 않았다.
장훈의 타격을 이야기할 때 대타자에 대포수인 노무라와의 타격경쟁을 빼놓을 수 없다. 장훈이 프로에 입문했을 때 노무라는 이미 프로 6년차로 장타력을 지닌 올스타급 선수로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장훈이 수위타자를 차지한 1961년 전후까지만 해도 노무라는 뒷날의 전성기처럼 맹위를 떨치지는 못할 때였다.
서로 상대의 능력을 존중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식하면서 양보 없는 타격경쟁을 벌이는 사이 장훈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고도의 타격술을 익혀 수위타자 7회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노무라는 장타력을 연마하여 마침내 일본 최초의 타격 3관왕과 함께 홈런왕·타점왕을 독식할 만큼 대성하게 된 것이다.









노무라 자신도 장훈과 같은 두려운 경쟁상대가 있는 덕분에 타격연습에 더욱 열중했고 더 많은 연구를 한 끝에 타격인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장훈은 1976년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마침내 어릴 때부터 꿈꿔 오던 거인군 유니폼을 입었다. 그곳에서는 프로 동기생으로서 또 동병상련의 외국혈통 선수로서 흉금을 터놓고 사귀어 온 벗 오-와 더불어 팀 주포역할을 맡아 우승에 공헌하기도 하면서 비로소 명문팀 선수의 인기의 본질을 체험하게 된다.









1980년에 가네다 마사이치가 감독으로 있는 롯데 오리온즈로 트레이드된 그는 1981년 5월 가와사키 구장의 대 한큐 경기 4번째 타석에서 우월홈런으로 일본 프로야구사상 최초로 꿈의 3천 안타를 기록한 뒤 다음 해 시즌까지 85안타를 추가하여 통산 3,085안타라는 전고미증유의 일본 최고기록을 수립하고 23년에 걸친 긴 선수생활에서 영광스럽게 은퇴했다.











장훈은 23시즌 동안 2,752경기에 출전해서 9,666타수 3,085안타, 504본루타, 1,676타점, 타율 0.319라는 눈부신 통산성적을 남겨 놓고 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기록 가운데서 수위타자 7회와 통산최다안타가 불멸이라고 해도 무방한 가장 값진 기록이다.
장훈에게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 있다. 공식기록원의 부당한 판정으로 개인의 영예와 영구불멸의 대기록이 물거품이 된 일이다.











자이언츠로 이적한 1976년 시즌 막바지에 그와 주니치의 야자와 겐이치(谷澤健一)는 모(毛)를 다투는 치열한 타격경쟁을 벌였다.
자이언츠 최종경기인 나고야 구장의 대 주니치 전. 장훈의 안타성 강습타구가 2루 캔버스와 유격수 사이를 꿰뚫었다. 타구는 필사적으로 슬라이딩한 유격수 글러브 끝을 스치면서 중견수 앞으로 빠져나갔다. 의심 의 여지없는 안타였으나 잠시 주저하는 시간이 흐른 뒤 빨간 실책표시등이 켜졌다.
3루측 자이언츠 벤치가 발칵 뒤집혔다. 코칭스태프와 주력선수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기록원석을 향해 항의를 하고 기자석에서는 격렬한 야유가 터졌으나 판정이 번복될 리 만무했다.
얼마 전 다른 경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리한 판정을 받은 일이 있는 장훈의 분노는 자못 컸다.
1루 캔버스 위의 주자 장훈 옆에 서 있는 주니치 1루수가 얄궂게도 바로 경쟁상대인 야자와였다. 그래도 장훈은 그 시점에서 타율이 약간 앞서 있었지만 다음 경기에서 야자와가 3타수 3안타를 치면 1모 차로 역전될 형세였다.
3타수 3안타란 참으로 어려운 숙제지만 막판에 안타를 몰아치면서 맹추격을 벌이고 있는 야자와의 기세로 미루어 일말의 불안이 없지도 않았다. 주니치의 다음 경기는 시즌 최종경기로 히로시마 구장의 대 히로시마 전이었다.

히로시마의 재일동포 투수 가네시로 모도야스(金基泰)는 마치 '쳐 주십시오' 하듯이 야자와에게 스피드를 죽인 직구를 한가운데로만 던지고 내야수는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지 않는 따위의 낯뜨거운 더티플레이로 기어이 3안타를 만들어 주어 수위타자 타이틀은 야자와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의 그 타구가 안타로 처리됐더라면 야자와는 남은 한 경기에서 5타수 5안 타를 쳐야 하는 절망이나 다름없는 궁지에 몰리게 돼 있었다. 아니 설령 야자와가 5타수 5안타를 쳐서 역전이 되더라도 수위타자 7회의 관록을 자랑하는 장훈은 군말 없이 물러앉아 야자와에게 축하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실책판정이 장훈에게서 수위타자 타이틀을 빼앗아 가는 개인적 피해를 끼친 데 그치지 않고 일본 프로야구사 자체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만약 장훈이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하면 페넌트 레이스 최우수선수에 선정될 공산이 확실했던 만큼 수위타자와 함께 최우수선수마저 놓치게 됨으로써 수위타자 기록의 연장뿐 아니라 양리그에 걸친 최우수선수 수상이라는 프로야구사상 미증유의 금자탑이 될 수도 있는 대기록을 말살당하고 만 것이다. 장훈은 그때 그 판정만은 지금껏 체념을 못하고 있다.











장훈은 1940년 히로시마에서 가난한 집안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 시대 재일 한국인들이 다 그랬듯이 장훈 생가도 전시 하 일본인의 심한 차별 속에 가난을 운명처럼 여기면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장훈은 물정도 모르는 4살 때에 모진 화상을 당했다.
오른손이 거의 불에 녹아 뭉개져서 손가락 셋이 엉겨 붙는 중화상이었다. 어린 몸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재앙이었으나 모친 고 박남전(朴南田) 여사의 지극한 간병으로 어렵게나마 상처가 더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던가! 다음 해에는 원자폭탄 세례를 받아 삶의 터전인 집마저 태워 없애고 큰누나를 잃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재난에다 종전 후의 아수라장 속에서 모친 박 여사는 살림을 꾸려 나가고 남은 세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 말 못 할 고생을 겪어야 했다. 장훈도 불구가 되다시피 한 오른손이 늘 어린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만한 일로 기가 죽을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모진 가난의 시련 속에서 싹이 튼 반골기질과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강한 성격 탓인 듯했다. 모친 고 박남전 여사는 정규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큰 체구에 남자 못지않은 굳은 심성과 유별나게 강한 생활력을 지닌 여장부였다. 그리고 한 집안의 기둥으로서 오직 자녀들을 위하는 일념으로 자신의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혼자 힘으로 세 자녀들을 바르게 길러 낸 굳센 어머니였다.










특히 민족의식이 투철한 여성으로 자녀들에게도 항상 한국인임을 잊지 말도록 가르치면서 몸서리 치는 차별 속에 자칫 흔들리기 쉬운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데 정성을 쏟았다.
그녀의 꿋꿋한 조국관과 엄격한 자녀교육은 모국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 한국인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대다수 재일교포와 달리 장훈이 거리낌없이 한국인임을 내세우는 떳떳한 자세라든지, 뒷날 심한 갈등을 느끼면서도 일본으로의 귀화를 결심했다가 결국 단념한 배경에는 이러한 모친의 교육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훈은 근신처분 때문에 고시엔 대회 출장을 사퇴한 1958년 여름 모친이 권유에 따라 재일교포 고교야구단 일원으로 모국을 방문했다. 한국의 올드팬들은 그때 장훈이 보여 준 그 호쾌한 타격과 불 같은 타구, 활기 넘치는 베이스러닝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때 그는 눈에 뜨는 한국선수를 보았는데 제일교포와의경기에서 유일하게 2안타를친선수..바로 백인천 이었답니다.)








장훈은 중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처음에 진학한 마쓰모토 상고와 전학을 한 나니와 상고에 이르기까지 줄곧 투수겸 4번타자로 팀 중추역할을 해오면서도 고민은 언제나 부자유스러운 오른손이었다.
왼손잡이가 된 것도 그 때문이지만 오직 연습만이 오른손의 결함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어릴 적부터 잘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장훈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연습에 매달렸다. 학생시절은 물론 프로에서도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연습을 되풀이했다.
도에이 시절 베팅 케이지에 한번 들어갔다 하면, 본인이 싫증을 느낄 때까지 타격연습을 한 뒤에야 다음 선수와 교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밤에는 손바닥 굳은살이 헤져서 배트 손잡이가 피로 물들고, 스텝한 앞발로 인해 여관방 돗자리가 헤질 때까지 연습으로 지샌 밤이 수없이 많았다.










스윙연습에서 생긴 손바닥 굳은살이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은퇴한 지 16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손을 맞잡았을 때의 그 딱딱한 촉감은 혹독한 연습으로 주위와의 피나는 경쟁,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진정한 프로의 휘장처럼 느껴졌다.
출중한 타격자질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 반복연습과 실패를 교훈삼아 기필코 되갚음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끈질긴 투혼 그리고 수많은 일본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도 오직 그만이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광각타법 등이 '안타제조기'로서 일세를 풍미하고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일본 최고기록의 금자탑을 세운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야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야쿠자'가 됐을 것이다." 이 말은 장훈이 자주 입에 올리는 진솔한 고백이다.
야쿠자의 필수조건인 싸움솜씨는 자신 말대로 어릴 적부터 주위가 알아주었다.
프로에서도 이 주먹 때문에 두어 번 말썽을 빚기도 했지만 모두가 '조센징', '마늘냄새' 어쩌고 하는 데서 비롯된 차별에 대한 울분이었지 결코 개인감정에 의한 싸움이거나 주먹자랑이 아니었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여느 심약한 사람 같았으면 일찍 체념했을 신체적인 결함을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기적처럼 극복하고 냉혹한 프로세계의 생존경쟁에서도 멋지게 승리해서 자수성가한 그는 지금 도쿄 근교의 최고급 주택단지인 덴엔조후(田園調布)의 번듯한 저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

효자로 이름난 그는 한때 형에게 재산관리를 몽땅 맡겼을 만큼 우애가 두텁고 국위를 선양한 공적으로 재일교포로는 유일하게 본국 정부의 체육훈장을 받기도 했다. 야구해설자 중에서 타격분석의 제일인자로 꼽히고 있는 그는,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능란한 화술로 그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활약을 하고 있으며 1990년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일찍 명예전당에 헌액됐다.








PS:
장훈 선배가 들려준 얘기중 한 토막은 그의 극일정신과 정제된 프로정신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장훈 선배는 현역시절 타석에 들어서면 "빠가야로"는 보통이고 "야 김치냄새 난다. 너희 나라에나 가서 야구해라"는 야유를 듣곤 했었다.
그러면 그쪽을 한번 째려본 뒤 꼭 안타나 홈런을 때렸다고 한다.
나중엔 약올리면 안타친다고 해서 야유가 줄었다고 웃으면서 얘기해줬다. 화상입은 손으로 통산 최고타율 최다안타부문서 불멸의 기록을 남긴 장훈 선배.

강연을 갈 때면 꼭 장훈 선배의 얘기를 인용하고 있다. "난 불구의 손으로 일본을 제패했다. 그런데 정상적인 몸을 가진 당신들이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정상에 올라설 수 있지 않은가." 장훈 선배는 아직도 나의 우상이다
〈mbc 야구해설가〉 허 구 연


엠팍에서 시작된 글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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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1/02 11:58
수정 아이콘
이봉주선수도 평발로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가 되었지요. 그 외에도 찾아보면 정말 힘든여건을 이기고 세계정상급에 올라 선 스포츠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믿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분들을 보면 가끔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모 스포츠업체 광고가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시즈더데이
04/11/02 12:01
수정 아이콘
어릴때 봤던 질수없다(허영만 저) 란 만화가 생각나는군요. 다시 보고 싶습니다. 장훈 선수의 일대기를 그렸는데, 이 글 내용과 너무나도 비슷하군요.
김희성
04/11/02 18:59
수정 아이콘
시즈더데이님이 먼저 언급하신 허영만의 [질 수 없다]
명작입니다. 허영만 선생께서 수많은 명작을 양산하던 80년대 중반의 시절, 그 많던 명작중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이었죠.
Kim_toss
04/11/03 01:11
수정 아이콘
감동적인 글이네요. 본 받아야겠습니다.
정승인
04/11/03 03:39
수정 아이콘
장훈선수가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가네다선수와 그 유명한 역도산의 괴롭힘이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더군요. 귀화한 한국인들이 빨리 귀화해라고 자꾸 재촉했다는데 위 두사람이 특히 심했다고 하더군요.
달라몬드
04/11/03 11:06
수정 아이콘
장훈선수에게는 안타성 타구를 실책을 처리한 것이 더 있었습니다.

언젠가 일본 연속안타타이기록까지 세우고 신기록 달성해야 하는 게임에서, 세상에 초강습 투수 가랭이 사이로 빠진 것을 투수 실책으로 처리하더군요. 투수 글러브도 맞지 않고 빠져나간 것을요...그날 또하나의 안타성 타구를 실책으로 결국 두개나 도둑맞고서야 어떻게 신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어려운 점을 잘 극복한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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