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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3/23 20:45:40
Name 아난
Subject [일반] 대체로 야만인과는 거리가 멀었던 수렵채집인들 1 (번역) (수정됨)
농경을 경제적 토대로 하는 국가 속에서 살지 않았던, 소규모의 무리를 구성해 여기저기 유랑하면서 주로 수렵과 채집에 생계를 의지했던 먼 옛날 사람들이 결핍과 폭력이 두드러진 야만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중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티븐 핑커, 에드먼드 윌슨 등 아주 유명한 식자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선사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설이 아닙니다. 현존하는 수렵채집부족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그 학자들과 대체로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핑커의 저작에 대한 비판적 리뷰인 아래 글에 그 얘기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래 글은 먼저 올린

https://cdn.pgr21.com/freedom/91039
남성은 사냥하고 여성은 아이 키웠다고?

의 댓글들 몇개에서 제가 피력한 주장의 연속선상에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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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in Our Time (By Douglas P. Fry)
Steven Pinker offers a curiously foreshortened account of humanity's irenic urges

우리 시대의 평화 (더글라스 P. 프라이)
스티븐 핑커는 인류의 평화 충동에 대해 기묘하게 단축된 설명을 제시한다

* 출처: <북포럼> 2012년 12월/01월
http://www.bookforum.com/inprint/018_04/8575


In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psychologist Steven Pinker stakes out a boldly optimistic view of the world, at a time when his readers are no doubt processing all kinds of bad news. Straining at the bigger picture of the trends afoot in human history, Pinker argues that violence is at an all-time low today—and human rights, social equality, and gender egalitarianism are at all-time highs.

<우리 본성 중의 더 선량한 천사들>에서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세계에 대한 대담하게 낙관주의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의 독자들이 아마 모든 종류의 나쁜 소식들에 대처하고 있을 때 말이다. 인간 역사에서 진행 중인 조류들을 큰 그림으로 펼쳐 보여주면서, 핑커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오늘날 폭력이 가장 적다고 - 그리고 모든 시대를 통틀어 오늘날 인권, 사회적 평등, 성평등주의가 가장 높다고 주장한다.      

With apologies to Shakespeare, we might say that Pinker, who has helped spell out the more arcane findings of his field in best-selling studies such as How the Mind Works (1997) and The Blank Slate (2002), writes not wisely but too well. He is a very clever wordsmith on a sentence-by-sentence basis, but in this newest work, serious problems arise with his central story line.

셰익스피어에게는 안 됐지만 우리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1997)와 <빈 서판> (2002)같은 베스트셀러 연구서들에서 그의 분야의 비밀스러운 발견들을 명료하게 설명하는데 일조했던 핑커가 [이번에는] 잘 쓰기는 했어도 빈틈 없이 쓰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문장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는 매우 명민한 문장가지만 이 최신 저작에서의 그의 중심적인 스토리 라인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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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베니스의 귀족인 그라티아노는 데스데모나의 죽음을 알게되자 오셀로에게 피의 복수를 하지 못하게 할 “더 선량한 천사들”을 제쳐놓는 것에 대해 말한다:
http://coyoteprime-runningcauseicantfly.blogspot.kr/2013/01/the-better-angels-of-our-nature-ho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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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shortcomings are especially unfortunate here since Pinker’s basic claim is itself largely on target: Physical violence has been decreasing over recent millennia. But the operative words in this formulation are physical violence and recent, and the chronology that Pinker adopts in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deftly elides this recent progress with the bulk of the human story—chiefly by his simple failure to acknowledge much of that story’s earlier chapters. In essence, Pinker’s fable of steadily more peaceful human self-improvement starts not at the raising of the curtain, and not even in the middle of the play, but only in the final act.

이 단점들은 핑커의 기본적 주장 자체는 대체로 정확하기 때문에 여기서 특히 유감스럽다: 물리적 폭력은 최근 천년에 걸쳐 감소해 왔다. 그러나 이 정식화에서 조작어들은 물리적 폭력과 최근 천년인데, 핑커가 <우리 본성 중의 더 선량한 천사들>에서 채택한 연대기에는 교묘하게 이 최근의 진보로부터 인간 스토리의 주요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이는 주로 그가 소박하게도 그 스토리의 앞 장들의 상당 부분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핑커가 얘기하는, 꾸준하게 점점 더 평화롭게 이루어져 온 인간의 자기 개선이라는 우화는 막이 오를 때는 물론이고 극 한 중간에서조차도 시작되지 않으며 종막에서야 시작된다.    

This brings us to what readers of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might call Pinker’s Big Lie—or what he leaves out of the human saga. For most of humanity’s existence, humans lived in nomadic bands and did not suffer from the chronic warfare, torture, slavery, and exploitation that Pinker, trailing Thomas Hobbes, imagines to be our species’ nasty and brutish natural state. For one thing, the very nature of nomadic-band social organization makes warfare, slavery, or despotic rule well-nigh impossible. The small social units lack the ability to engage in large-scale slaughter—and since positions of authoritative leadership are also lacking, there is nothing to plunder, tools and weapons are rudimentary, and population density is extremely low. For another thing, the archaeological facts speak clearly, showing for particular geographical areas exactly when war began. And in all cases this was recent, not ancient, activity—occurring after complex forms of social organization supplanted nomadic hunting and gathering. Pinker ignores this evidence. He also makes a big deal about the recent rise in gender equality and human rights, but turns an unaccountable blind eye to the highly demotic character of nomadic hunter-gatherer societies.

이는 <우리 본성 중의 더 선량한 천사들>의 독자들이 핑커의 큰 거짓말 이라고 부를 것 - 또는 그가 인간 스토리로부터 누락하는 것 - 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인류가 생존해 온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인간들은 유랑 무리들 속에서 생활했으며 핑커가 토머스 홉스를 쫓아 우리 종의 역겹고 험악한 자연상태라고 상상하는 만성적 전쟁, 고문, 노예제, 착취를 겪지 않았다. 우선, 유랑-무리라는 사회조직의 바로 그 본성이 전쟁, 노예제, 또는 전제적 통치를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작은 사회단위들은 대규모의 살상을 실행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 권위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지위들이 부재했고 약탈할 만한 것이 없었으며 도구들과 무기들은 원시적이었고 인구 밀도가 극단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고고학적 사실들이, 특정 지역들에서 정확히 언제 전쟁이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면서, 분명하게 [그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모든 경우들에서 이것은 고대의 활동이 아니라 최근의 활동이었다. 즉 전쟁은 복잡한 사회조직 형태들이 유랑 채집/수렵 무리들을 대체한 후에야 출현했다. 핑커는 이 증거를 무시한다. 그는 또한 성 평등과 인권이 최근에 신장된 것에 대해서도 큰 주장을 하지만 유랑 수렵자/채집자 사회들의 고도로 민중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눈을 감는다.          

There’s a well-established body of literature chronicling early humanity’s egalitarian and peaceful past. In The Foraging Spectrum (1995), for instance, Robert Kelly offered this summary of the salient features of hunter-gatherer social life: “small, peaceful, nomadic bands, men and women with few possession[s] and who are equal in wealth, opportunity, and status.” Richard Lee and Richard Daly have likewise observed, in The Cambridge Encyclopedia of Hunters and Gatherers (2000), that nomadic-band dwellers

have lived in relatively small groups, without centralized authority, standing armies, or bureaucratic systems. Yet the evidence indicates that they have lived together surprisingly well, solving their problems among themselves largely without recourse to authority figures and without a particular propensity for violence. It was not the situation that Thomas Hobbes, the great seventeenth-century philosopher, described in a famous phrase as “the war of all against all.”

초기 인류의 평등주의적이었고 평화스러웠던 과거를 증언하는 일군의 잘 알려진 문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포리징 스펙트럼> (1995)에서, 로버트 켈리는 수렵자/채집자 사회에서의 생활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작은, 평화로운, 유랑 무리들, 별로 가진 것들이 없고 부, 기회, 지위 면에서 평등한 남녀들.” 리처드 리와 리처드 달리는 <케임브리지 수렵자들 및 채집자들 백과> (2000)에서 유사한 주장을 한다:

유랑 무리 성원들은 권위의 집중, 상비군, 또는 관료제 없이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들을 이루어 생활했다. 그렇지만 증거는 그들이 놀랍도록 잘 어울려 살았음을 가리킨다. 권위 인물들에게 의존하지도 않고 유별난 폭력 성향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대체로 그들 스스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17세기 대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유명한 구절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고 묘사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What this means, in practical terms, is that Pinker’s foundational narrative—holding that humans have lately emerged from a prehistory of widespread carnage into an era of comparative social peace and equality—badly truncates the actual story. Contrary to Pinker’s thesis, the incidence of warfare and mayhem actually describes an n-shaped curve, rather than a steep drop-off all at once with the advent of recent millennia. War was absent to nonexistent over the vast majority of human existence—off to the left of the n curve. But with a gradual worldwide population increase, the shift from universal nomadism to settled communities, the development of agriculture, a transition from egalitarian social structure to hierarchical pecking orders—and, very significantly, the rise of state-level civilization five thousand to six thousand years ago—the archaeological record is clear and unambiguous: War developed, despots arose, violence proliferated, and the social position of women deteriorated. This comparatively recent explosion in state-based violence is represented on the rising left side of the letter n in the curve.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상은, 핑커의 기반 내러티브 - 인간들이 최근에야 살육이 만연했던 선사로부터 비교적 사회적으로 평화롭고 평등했던 시대로 들어섰다고 주장하는 내러티브 - 가 실제의 스토리를 심하게 잘라낸다는 것이다. 핑커의 테제와는 반대로, 전쟁과 신체상해의 빈도는, 실제로는, 최근의 천년이 시작되면서 갑작스러운 가파른 하락이 아니라 n형 곡선을 그린다. 전쟁은 인간이 생존해 온 대부분의 시기 동안 거의 없었다 - n 곡선의 좌측 종단은 이 점을 나타낸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이 애매하지 않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로, 점진적인 전세계적 인구증대, 보편적 유랑생활에서 정착 공동체 생활로의 전환, 농업의 발전, 평등주의적 사회구조로부터 위계적 계층질서로의 이행,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5천 년 전에서 6천 년 전 사이 국가 수준 문명의 발흥과 더불어 전쟁이 발전했고 전제정이 발생했으며 폭력이 번창했고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가 하락했다. 곡선에서 n자의 상향좌측면은 이, 비교적 최근에 폭발한, 국가를 토대로 하는 폭력을 나타낸다.              

Pinker’s conviction that he has uncovered a recent quantum shift in human behavior doesn’t exactly make him humble. “This book is about what may be the most important thing that has ever happened in human history,” he boldly asserts, and then continues: “Violence has declined over long stretches of time, and today we may be living in the most peaceable era in our species’ existence.”

자신이 인간 행동에서 일어난 최근의 획기적 전환을 드러냈다는 핑커의 확신은 전혀 그를 겸손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대담하게 “이 책은 지금까지 인간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는 것에 관한 책이다”라고 단언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폭력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감소해 왔으며 오늘날 우리는 우리 종이 생존해 온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This is bunk. Pinker is only able to make his sweeping claims seem plausible by omitting everything that occurred before the agricultural revolution (circa 10,000 BCE). He is sneaky about this, too, arguing, for instance, that reports of violence from his own self-selected “nonstate” societies from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would somehow reflect levels of violence prior to ten thousand years ago—i.e., a time when all of humanity lived as nomadic foragers.

이것은 허풍이다. 핑커는 농업혁명 (대략 서기전 1만년) 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누락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의 거창한 주장들을 그럴듯한 것들로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는 그 주장들을 하면서 음흉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이 직접 선별한 19세기와 20세기의 “비국가” 사회들에서 행해진 폭력 보고들이 여하튼간에 1만 년 전 이전 - 즉 인류 모두가 유랑하면서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시기 - 의 폭력 수준들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The worldwide archaeological record contradicts the presumption that early humanity lived in a Hobbesian war of all against all. There is no evidence of warfare anywhere on the planet older than the ten-thousand- to twelve-thousand-year mark. In addition, numerous archaeological sequences show the birth of war on a regional scale occurred within the last ten thousand years.

세계 전역의 고고학적 기록이 초기 인류가 홉스적인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속에서 생활했다는 가정을 부정한다. 1만 년 전에서 1만 2천 년 전 사이의 경계점을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의 지구 어디에도 전쟁의 증거는 없다. 덧붙여, 계열을 이루는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 들이 국지적 수준에서의 전쟁의 탄생이 지난 1만년 내에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It’s far from clear why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fails to adopt a more sophisticated and intellectually rigorous approach that accommodates these facts. Pinker could have easily maintained his position that human violence has indeed declined in recent millennia without ignoring humanity’s peaceful egalitarian past. This omission is doubly surprising coming from a writer like Pinker, who has long professed a strong interest in evolutionary issues.

왜 <우리 본성 중의 더 선량한 천사들>이 이 사실들을 수용하는, 더 정교하고 지적으로 엄밀한 접근법을 채택하지 못했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핑커는 인류의 평화로웠던 평등주의적 과거를 무시하지 않고도 최근 천년 동안 인간 상호간의 폭력이 정말로 감소해왔다는 그의 입장을 쉽게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누락은 오랫동안 진화론의 쟁점들에 강한 관심을 공언해 왔던 핑커같은 저자가 범한 것이기에 더더욱 놀랍다.  

Pinker’s book is likewise disappointing in its outsize claim to an originality that it does not, on closer inspection, actually possess. Three hundred and fifty years ago, Hobbes pointed out that government can reduce violence. This idea is certainly nothing new. As R. Brian Ferguson commented in Warfare, Culture, and Environment back in 1984: “The point that a strong overarching authority will prevent or diminish internal warfare is valid, but obvious.” Yet Pinker fills pages and pages as he pounds readers over the head with this trite Hobbesian message.

핑커의 책은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것이 실제로는 갖고 있지 않은 독창성을 과도하게 주장한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로 실망스럽다. 350년 전, 홉스는 정부가 폭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아이디어는 확실히 전혀 새롭지 않다. R. 브리안 퍼거슨이 이미 1984년에 <전쟁, 문화, 그리고 환경>에서 논평한 대로: “강한 포괄적 권위가 내전을 저지하거나 감소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맞지만 뻔하다.” 하지만 핑커는 독자들의 머리를 두들겨 대면서 이 진부한 홉스적 메시지로 지면들을 채운다.  

Pinker’s evident fondness for state-based solutions also seems to make for greater analytical confusion as he tries to supply an anatomy of peaceable instincts that may inhere in human subjects apart from the imposition of state control. Pinker proposes that along with self-control, a moral sense, and the capacity to reason, a fourth “better angel” in our nature is empathy. But Pinker can’t seem to make up his mind about empathy. On the one hand, he quotes Charles Darwin in his final chapter’s epigraph, thereby appearing to give a last word to the great natural scientist’s hopeful formulation:

국가에 토대를 둔 해결책들에 대한 핑커의 명백한 애호는 또한 그가 국가 통제의 부과와는 별개로 인간 주체들 속에 내재할지도 모르는 평화 본능의 해부학을 제공하려 함에 따라 분석적 혼동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핑커는 자기통제, 도덕적 센스, 그리고 이성 능력과 나란히 공감이 우리 본성 속의 네 번째 “더 나은 천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핑커는 공감에 관해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그의 최종장 에피그라프로 찰스 다윈을 인용한다. 그 위대한 자연과학자의  낙관적인 정식화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말이다:    

As man advances in civilization, and small tribes are united into larger communities, the simplest reason would tell each individual that he ought to extend his social instincts and sympathies to all the members of the same nation, though personally unknown to him. This point being once reached, there is only an artificial barrier to prevent his sympathies extending to the men of all nations and races.

인간이 문명 속에서 전진하고 작은 부족들이 더 큰 공동체들로 통합됨에 따라, 가장 단순한 이성이 각 개인에게 그의 사회적 본능들과 공감들을 개인적으로는 미지인 동일 민족의 모든 성원들에게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이 지점까지 일단 도달하면, 그의 공감들을 모든 민족들과 인종들의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는 데는 오직 인위적 장애만이 있다.  

However, Pinker concludes earlier in the book, after much discussion, that it is actually rights, norms, and policies—not empathy—that are important for protecting people from violence. Pinker also concludes that “empathy can subvert human well-being when it runs afoul of a more fundamental principle, fairness.” If that’s the case, then why isn’t fairness promoted to angel status and empathy demoted? It’s hard to avoid the impression that Pinker is just jumping, halfheartedly, onto the empathy bandwagon in the wake of best-selling treatments of the subject such as Jeremy Rifkin’s The Empathic Civilization (2009) and Frans de Waal’s The Age of Empathy (2009)—both of which are far more thorough and lucid treatments of the subject than one finds in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그렇지만, 핑커는 책의 더 앞부분에서는 장고 끝에 사람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중요한 것은 실제로는 공감이 아니라 권리, 규범, 정책이라고 결론 내린다. 핑커는 또한 “공감은 더 근본적인 원칙인 공정과 충동할 때 인간의 복지를 전복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면, 왜 공정은 천사의 지위로 승격되지 않고 공감은 강등되지 않는가? 핑커가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 문명> (2009)과 프란스 드 발의 <공감 시대> (2009)같은, 공감을 주제로 한 베스트 셀러 저작들을 본떠 공감이라는 시류에 마지못해 뛰어든 것일 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두 책 모두 <우리 본성 중의 더 선량한 천사들>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명료하게 그 주제를 다룬다.    

Distinctions like this might seem semantic to general readers, but enormous consequences actually attend on the way we choose to tell the story of how violence figures into human history. If we focus only on physical violence and recent times, as Pinker does, it’s a fairly straightforward tale: Violence has decreased, and progress will continue to build toward more peaceful solutions to human conflict.

이 같은 구별들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의미론적인 것들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폭력이 인간 역사 속에 등장하는 양태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실제로는 막대한 귀결들을 수반한다. 우리가, 핑커가 그러는 것처럼, 물리적 폭력과 최근 시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꽤 직설적인 이야기이다: 폭력은 감소해 왔고 인간 갈등의 더 평화로운 해결책들을 향한 진보가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But if we follow the Norwegian sociologist Johan Galtung in adopting a wider perspective on violence, then we can readily apprehend that structural violence exists at very high levels in the twenty-first century. This brand of violence extends beyond the formal organization of war making; it stems from unjust political and economic social structures that inflict pain and suffering through extreme poverty, malnutrition, the lack of safe drinking water, the degradation of the planet’s biosphere, the gross inequities in wealth within and among countries, and lack of access to health care, educational opportunities, and social security. Structural violence translates into untold human misery, suffering, and shortened life spans. To adopt Pinker’s focus on physical forms of violence to the exclusion of structural violence of epic proportions is to miss the big picture.

그러나 우리가 노르웨이 사회학자 요한 갈퉁을 따라 폭력에 대해 더 폭넓은 시각을 채택한다면, 우리는 구조적 폭력이 21세기에 매우 높은 수준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폭력 부류는 전쟁 발달의 형식적 조직 저 너머로 확장되어 있다; 그것은 극단적 빈곤, 영양실조, 안전한 식수의 부족, 지구 생물권의 열악화, 커다란 국내적 및 국제적 불평등, 그리고 보건 및 교육상의 기회들을 향유하고 사회 안전망을 제공받을 권리의 결여를 통해 고통을 가하는, 정의롭지 못한 정치적 및 경제적 사회구조들로부터 비롯된다. 구조적 폭력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인간적 비참함, 고통, 그리고 짧아진 수명으로 이어진다. 핑커처럼 저마다의 몫을 지닌 부분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전체 이야기 중에서 구조적 폭력을 배제하고 물리적 폭력 형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큰 그림을 놓치는 것이다.    

Nor should Pinker’s book lull us into a sense of complacency that the world is becoming a safer place, when global challenges such as climate change and nuclear proliferation continue to threaten every person on earth. We endorse a foreshortened, and ultimately damaging, view of the question if we fail to understand that the problem area of violence must also include global problems that endanger the lives of everybody. For millennia, our ancestors survived only through cooperation and sharing. The twenty-first century world, with its threats of oceanic pollution, biodiversity loss, and global warming, absolutely requires cooperative solutions to shared problems—of the same sort that had been worked out in our ancestral hunter-gatherer past. If Pinker had not swept that past from the pages of his book, he might have discovered a new angel or two.

핑커의 책은 우리를 달래 세계가 안전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는 만족감에 젖게 해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기후변화와 핵무기 확산 같은 전지구적 변화들이 계속해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협하는 한 말이다. 폭력의 문제영역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전지구적 문제들 또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문제에 대해 안목이 짧은, 그리고 궁극적으로 파괴적인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천년 여 동안 우리 조상들은 협동과 공유를 통해서만 생존했다. 대양이 오염되어가고 있고 생물다양성이 상실되어가고 있으며 전지구적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세계는 그러한 공동의 문제들에 대한 협동적 해결책들 - 우리 조상들이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았던 과거에 안출되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해결책 - 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의 책의 지면들로부터 그 과거를 지워 없애지 않았다면, 핑커는 새로운 천사를 하나나 둘 발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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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glas P. Fry is the author of The Human Potential for Peace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Beyond War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and War, Peace, and Human Nature (Oxford University Press, forthcoming).

더글라스 P. 프라이는 <인간의 평화잠재력>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2005), <전쟁 너머>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2007), 그리고 <전쟁, 평화, 인간본성>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근간)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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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자바
21/03/23 20:50
수정 아이콘
개인적 생각은... 과거에는 자연의 동물들과 싸워야 되니 인간끼리 내분을 일으킬 이유가 딱히 없었다 정도?
-안군-
21/03/23 21:14
수정 아이콘
2번의 세계전쟁을 겪은 후, 강대국들은 거대한 국가권력간의 충돌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고찰하게 됐고, 그로인해 세계대전급의 슈퍼파워들끼리의 충돌을 꺼려하게 됐죠. 때마침 나타난 핵무기로 인해 한번의 전쟁으로 순식간에 전 인류가 공멸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갖게 되었고요.
그러나 현재까지도 지구 곳곳에서는 국지적인 내전, 국가권력을 능가하는 범죄조직의 등장, 극단주의적 종교인들에 인한 학살 등이 벌어지고 있는데, 언론 및 학자들은 이를 애써 무시하는 듯도 합니다. 자선단체들이 보여주는 것 역시 그러한 나라들에 사는 사람들의 고달픈 현실 뿐이지 전쟁 자체의 참혹함은 빠져있죠. 아프리카의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호물자를 보내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내전을 종식시키고 정상적인 정부를 출범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국제 구호단체들이 물자를 나눠주는 곳은 반드시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반군이나 테러단체 등이 습격하지 못하도록),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영상이나 사진 등엔 그 군인들이 절대 나오지 않죠.
21/03/23 21:32
수정 아이콘
20세기에 자행된 물리적 폭력은 규모에서든 조직화된 성격에서든 인류문명의 역사상 최고의 것이고 말씀하신 사태들도 명확히 물리적 폭력 성격이 강해서 최근 1,000년 동안 적어도 물리적 폭력은 감소해왔다는, 리뷰어도 동의하는 주장에도 사실 일말의 거부감이 들죠. 그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소위 '문명'이 시작된 이래부터 1,000년 전까지 인간들이 서로에게 자행한 물리적 폭력이 그 만큼 지속적이고 빈번했다는 얘기겠지만 말이죠. 사실 우리가 문명의 역사의 어두운 면면들을 세세히 실감나게 배웠을 리는 없죠..
두부빵
21/03/23 21:20
수정 아이콘
농업혁명으로 정착한 사람들에 수렵인들이 상대적으로 덜 폭력적이었다는 내용인거 같은데요.
덜 폭력적이라고 수렵인이 야만인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주장은 좀 이해가 가지 않네요.
lightstone
21/03/23 21:40
수정 아이콘
(수정됨) 그래프로 그리자면 상방과 하방이 매우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 시대라고 부르는 것의 단위도 각자가 다 다를 것같구요.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의 주식을 주봉, 월봉, 년봉으로 나누어 보면 그래프가 많이 달라지죠. 이 처럼 긴 인류역사에 기초했을 때 지금 현 시점이 상승장에 있을 수 있겠으나 100년 단위로 끊어서 본다면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포함되어 있는 시대인 지금은 야만성이 인류역사의 평균 이하일 수도 있겠네요. 이것이 결국 우상향인가 하는 것은 짧은 개인의 인생에서 긴 인류의 역사를 더듬는 일이라 어렵겠군요. 글 잘 봤습니다.
여름별
21/03/23 22:28
수정 아이콘
정치경제적 불평등 같은 구조적 폭력까지 따지자면 현대인들보다 수렵채집인들이 더 egalitarian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초기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보면서, 농업혁명 이후로 끊임없이 고도화된 인류사회에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었던 사회적 불평등이 사실은 우리 본성에 내재된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한 발전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기본적으로 현실주의나 자유쥬의나 기본 가정들이 Hobbesian하다 보니, 농업 혁명이 다른 양태의 사회발전을 촉발시킨 평행 세계도 보고 싶네요. 그런 세계가 있다면, 거긴 상시적인 물리적 폭력에 수반되는 사회적 불안정성을 위계 권력 말고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도 궁금하네요.
21/03/23 23:43
수정 아이콘
딱 하나만 물어볼게요.
이 문제를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까지 몰두할 필요가 있나요?
증거 자료도 빈약하고 좀 더 생각하시고 글 쓰시는 게 어떨까요.
요즘 아난님께서 최신 외국 기사나 논문 번역하셔서 올리시는 것도 시의적절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보는데요. 부처께서 그리 가르치시진 않았을 거고 참...아난존자라니...
여수낮바다
21/03/23 23:51
수정 아이콘
핑커의 해당 책을 본지 너무 오래 되어(다시 읽기엔 너무 두꺼운..) 기억이 명확치는 않으나(죄송합니다ㅠㅜ) 핑커 책에선 선사시대 유골의 폭력 흔적, 현존하는 수렵채집사회의 폭력 빈도 등을 토대로 주장을 폈었습니다.

이 글에선 뭉뚱그려 (과거 유적에선 안 그랬다) 하는데, 사실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침팬지만 해도 집단 패싸움, 죽음에 가까운 린치 등이 보고되며, 침팬지끼리의 살상이 잘 안된건 기술이 부족해서이지 의지가 부족해선 아녔는데 말이죠.

보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놓고 다시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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