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03/22 10:36:03
Name 쉬군
Subject [일반] 그럼에도 사랑하는 너에게.
엊그제는 참 정신없는 날이었어.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 아빠는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집에서 공룡이야 들이랑 핑크퐁이랑 놀고 싶은데 억지로 끌려서 따라 나온 것도 이미 속상한데,

엄마·아빠 볼일 보는 동안 잠깐 쥐여준 휴대폰 유튜브도 지겹고, 신나게 먹고 있던 롤리팝도 손이랑 얼굴이 찐득해진다며 먹고 있던 사탕을 엄마가 야속하게도 뺏어가 버렸어.

너의 속상함이 그때부터였을까.

시간도 때마침 점심시간이 살짝 지나서 배도 고프고,

신나게 먹고 있던 사탕도 뺏기고,

거기에 낮잠 시간도 다가오니 졸리기도 하고, 충분히 속상할 만하지. 맞아.

아빠는 부랴부랴 네가 좋아하는 돈까스를 주문해놓고 좋아하는 그림자놀이 유튜브도 틀어줬지만 이미 배고프고 졸리고 뿔이 잔뜩 난 너는 속이 많이 상했을 거야.

다음 달이면 세 번째 생일 파티를 해야 하는 너지만 아직 조금 느리기에 속상한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니 속상함과 답답함에 엉엉 울음이 날 수밖에.

다른 아기들보다 목소리가 크다 보니 식당이 울음소리로 울리고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기 시작해서 아빠는 어쩔 수 없이 널 사람이 없는 마트 구석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어.

우선은 식당 손님들께 폐를 끼칠 순 없으니 조용한 곳에서 울음이 그치길 기다려 봤지만, 여전히 속상한 마음에 발까지 동동 구르며 한참을 서럽게 우는 널 안았다가 바닥에 내려놓고 같이 바닥에 앉았다가 하지만 좀처럼 울음이 가라앉지 않더라.

그렇게 한참 지나고 엄마한테 주문한 돈까스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가서 유튜브를 다시 후다닥 세팅하고 돈까스를 한입 먹이니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기분이 풀렸는지 까르륵 웃어가며 밥을 먹기 시작했어.

네가 귀여워서 다행이야. 안 그랬다면 두어대는 쥐어박지 않았을까? 싶은 순간이었으니까.

주위 다른 아기 부모님들이랑 어르신들도 네가 울음을 그치고 돈가스를 한 입 집어 먹으니 그제야 다행이라는 표정들을 보여주셨지.

하지만 네가 우는 그 짧은 순간에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은 아빠를 많이 긴장하게 만들고, 우리와 비슷한 가족들의 그 현실감이 몸으로 느껴졌었어.

걱정과 불편함과 동정이 담긴 그런 시선들이, 그리고 사정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의 그 수군거림이 하나의 돌덩이처럼 내려앉는데 그 무게가 생각보다 무겁더라고.

앞으로도 네가 열심히 자라서 또래 친구들과 비슷해질 때까지 이런 무게감을 엄마, 아빠는 계속 짊어지고 지내야겠지.

하지만 아빠는, 아니 우리 가족은 네가 조금 느리게 자라도 아주 문제없다고 생각해. 조금 느리지만, 하루하루 성장하는 모습만 봐도 대견하거든.

가끔 오늘처럼 힘들기도 하고 조금은 슬퍼질 때도 있지만 그건 찰나의 속상함이니까 그런 거로 네가 싫어지거나 미워할 이유가 될 순 없지.

그래도 많이 사랑하니까 괜찮아. 아기들은 다 그렇게 자라는 거니까.

조금 느려도 언젠가는 엄마, 아빠를 불러줄 거고, 친구들이랑도 사이좋게 지낼 거고 더 많은 세상을 보기 위해 훌쩍 자랄 테니까. 엄빠 기대보다 더 크게 자라려고 하다 보니 준비가 오래 걸리는 거라고 생각해.

심지어 작년에는 자폐 의심 진단까지 받았던 니가 지금은 자폐가 아닌 조금 느릴뿐이니 걱정하지말라는 소견을 받았으니 훨씬 발전한 거지!

아! 그래도 다음 달 네 생일파티에는 엄마 아빠를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자그마한 바람은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서 같이 노력해보자.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너에게 그럼에도 사랑하는 아빠가.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세인트루이스
21/03/22 10:40
수정 아이콘
진짜 귀여워서 봐줌.
21/03/22 14:08
수정 아이콘
후 너는 정말 귀엽지 않았으면...
21/03/22 14:11
수정 아이콘
안귀여우면 안봐주는 겁니까? 흐규규.. 그래서 제가 어릴 때 엄마한테 많이 맞았나봐요
세인트루이스
21/03/22 15:14
수정 아이콘
화이팅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입니다 ??
피잘모모
21/03/22 10:42
수정 아이콘
제가 꼬맹이였을 때 저의 아빠도 같은 심정이셨겠죠?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21/03/22 14:09
수정 아이콘
부모가 되보니 다 같은 마음인거 같아요.
아버님도 같은 마음이셨을거라 생각합니다.
21/03/22 10:52
수정 아이콘
아부지... 화이팀입니다!!
21/03/22 14:09
수정 아이콘
화이팅입니다 ㅠ
Cazellnu
21/03/22 13:44
수정 아이콘
혹시 감통 놀치 언치 같은거 하시나요?
21/03/22 14:10
수정 아이콘

언치 놀치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감통은 거리가 좀 있어서 못받고있네요.
이라세오날
21/03/22 14:57
수정 아이콘
저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조카들 어릴 때 같이 움직인 기억으로 말씀드리자면

아이를 데려가는 식당은 보통 아이를 데려가는 장점이 있으니 비슷한 아기를 가진 가족이 많잖아요?

한 아이가 울면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데 그게 어떤 힐난이 아니라 서로 칼라로 연결되는 공감 뭐 그런거라 본문글을 보면서도 미소가 지어집니다.

오늘도 화이팅 하세요!
21/03/22 17:55
수정 아이콘
최근에 저도 겪은 일이라 남일 같지 않네요
삼십미터 밖에서 들어도 내 새끼 울음소리라...
금방 말 트여서 제발 좀 조용히 하라고 하는 날이 올 겁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1044 [일반] 독일군의 9000억 짜리 박물관 전시용품 구매기 [33] 한국화약주식회사11197 21/03/23 11197 12
91043 [일반] [13] 여행을 준비했으나 가지 않았다. 딴길로 샜다. 타카이5947 21/03/23 5947 3
91042 [일반] 재미로 알아보는 자동차 브랜드 가계도... [41] 우주전쟁13138 21/03/23 13138 4
91041 [일반] 더 현대. 서울 근황 [65] Leeka16634 21/03/23 16634 0
91040 [일반] 차세대 중형위성 1호 발사성공과 이런저런 이야기들 [11] 나주꿀10086 21/03/23 10086 6
91039 [일반] 남성은 사냥하고 여성은 아이 키웠다고? [77] 아난16083 21/03/23 16083 2
91038 [일반] [외교] 미국 외교일정 vs 중국 외교일정 (업데이트) [43] aurelius12460 21/03/23 12460 1
91037 [일반] 美 콜로라도 총기난사 경찰관 포함 10명 사망 [26] Rorschach10410 21/03/23 10410 1
91034 [일반] 금일 발생한 안드로이드 앱 실행 장애 해결 방법 (카카오톡 등) [33] Leeka16040 21/03/23 16040 10
91033 [일반] 영국에서 새로운 국방백서가 발표되었습니다. [8] elaborate9358 21/03/23 9358 1
91031 [일반]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 [14] 及時雨8553 21/03/23 8553 13
91030 [일반] [외교] 중국, EU 의원 10명 제재한다고 밝혀 [61] aurelius14089 21/03/23 14089 8
91029 [일반] 코로나에의한 한일 입국체험기 (현지 상황 설명) 1편 [10] 마지막천사9692 21/03/22 9692 10
91028 [일반] [번역]66%짜리 J&J 백신대신 95%짜리 화이자 맞고 싶다고? [39] 나주꿀21058 21/03/22 21058 54
91027 [일반] [외교] 알라스카 미중회담을 통해 보는 중국의 세계관 [53] aurelius14000 21/03/22 14000 13
91026 [일반] [13] 10년전의 배낭여행 [8] emonade6388 21/03/22 6388 13
91025 [일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미국 임상 3상 시험 결과 공개 [99] 여왕의심복19195 21/03/22 19195 63
91024 [일반] 소의 방귀를 줄여 지구를 구하려면 '이것'이 필요하다 [39] 나주꿀12007 21/03/22 12007 2
91022 [일반] 2차 테러를 당했습니다. [58] Lovesick Girls18129 21/03/22 18129 49
91020 [일반] 누가 저스티스 리그를 죽였나 [68] roqur11948 21/03/22 11948 5
91019 [일반] 그럼에도 사랑하는 너에게. [12] 쉬군7555 21/03/22 7555 15
91018 [일반] [칼럼] 대만에서의 위기가 미국패권을 종식시킬 것인가? [34] aurelius14120 21/03/22 14120 12
91015 [일반] [팝송] 시아 새 앨범 "Music - Songs From and Inspired By the Motion Picture" [7] 김치찌개6981 21/03/22 6981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