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첫 글로 자가격리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3월 27일 시카고에서 출발, 3월 29일에 입도하여 자가격리를 한 지 거의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컨디션도 좋아지고 시차 적응도 되어서 글을 쓸 짬이 나네요.
#1_텅 빈 거리
3월 21일 17:00부로 시카고 시장 J.B. Pritzker가 행정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른바 “stay-at-home” order라고 합니다. 식료품을 사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이 아니면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명령인데, 다운타운 길거리는 정말 텅텅 비어서 홈리스와 비둘기들만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대낮에 스산한 거리를 걷다 보니 마치 좀비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재밌는 것은 단독 산책과 개와 산책하는 것은 허용하더랍니다). 영상 제작이 취미라 산책을 핑계로 '시카고 다운타운을 좀비시티 컨셉으로 찍어볼까'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학교마저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학기 중이긴 하지만 온라인 강의로 전환되었고, 졸업식은 취소된 데다, 작업공간이 있는 학교까지 락다운 되어버리니 있을 시카고에 있을 이유가 없더군요.
#2_텅 빈 터미널
며칠 뒤 카카오톡으로 가족회의를 한끝에 귀국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27일 금요일 시카고발 비행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900달러짜리 비행편을 찾았지만, 잠시 버벅대더니 6,000달러로 뛰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표를 구하러 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결국 가족들과 같이 씨름한 끝에 시카고 - LA - 타이베이 - 서울 노선을 1,300달러에 살 수 있었습니다. 집은 되는대로 급하게 정리하고, 대만 친구로부터 N95 마스크 4장을 급하게 빌렸습니다. '지금 우리 가족이 보낸 마스크가 나중에 도착할 텐데, 그때 이자 쳐서 더 가져가라'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습니다.
의외로 오헤어 공항에서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국내선 터미널이 텅텅 비어서, 덕분에 공항에서 교수님께 크리틱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알래스카 항공의 A320에는 저 포함 열댓 명의 승객만 탑승했습니다. 나중에 화장실을 갈 때 보니 객실 승무원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뭔가 미묘하면서 차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죠. 이때까지는.
#3_엑소더스
LA에서 대만행 비행기로 환승하는 시간은 두어 시간 남짓이었습니다. 짐을 미리 다 부쳤기 때문에 여유롭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환승 편 탑승권을 발급받으러 터미널로 도착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터미널 전체가 아시안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특히 남방항공 같은 중국 쪽 항공사에 대기인원이 많았습니다. 남녀노소 방호복, 고글 바이저 등으로 무장했는데, 분진 마스크, 우비, 의사 가운, 심지어 발까지 보호신으로 덮었더군요. 뭔가 웃기기도 한데 살짝 불안해졌습니다(이때부터 병적으로 세정제로 손을 씻고 이곳저곳을 소독했네요). 여차여차 프런트에 가보니 갑자기 표 발급이 안된다고 합니다. 대만 정부가 어떠한 국제 환승도 허용하지 않도록 결정했기 때문에 공항을 찍고 가는 것도 안된다는 겁니다. 멘붕이 왔습니다. 항공사 직원이 짐을 건네주며 예약한 곳에서 환불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젠장맞을. 급한 대로 대한항공에 가서 무작정 물어봤습니다.
저기... 표 좀 살 수 있을까요?
혹시 예약하고 오셨나요?
아니요...
아, 네(대충 뜨악한 표정), 이쪽에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시간은 9시 53분. 프런트 마감 7분 전이었습니다. LA - 서울 직항 1,500달러 표가 있더랍니다. 넵, 하고 카드를 건넸는데, 아차, 제 데빗카드에는 158달러밖에 없었습니다(...).. 신용카드는 일 년 전에 만료되어서 전날 집 정리할 때 다 잘라서 버렸습니다. 가족 카드로 결제하면 안 되냐고 물어봤더니 본인이 같이 와야 결제가 된다고 하더랍니다(...). 결국엔 표를 구하지 못하고 프런트를 떠났습니다.
다행히 가족들이 곧 새로운 비행편을 구해줬습니다. 이번엔 LA - 시애틀 - 서울 이 노선이었습니다.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시애틀행 새벽 비행기를 탔습니다. 시애틀 공항에서 게이트로 가보니 온통 한국인이었습니다. 이제야 안도감이 조금 들더군요. 그렇게 또 14시간의 기나긴 비행을 하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4_집이다!
인천공항에서 내리자 입국심사를 받아야 했는데 자가격리 앱을 깔아야 보내주더군요. 김포까지 가는 특별 수송편이 있다고 안내받고 갔지만, 버스회사와 공항 간 혼선이 있었습니다. 뭐 어쨌든 잘 도착했지만, 시스템이 조금 어수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여차여차 김포에 도착하고 무사히 제주도까지 도착했습니다. 마스크는 어머니의 강권으로 (오헤어 - LA) (LA-시애틀) (시애틀-인천) (김포-제주) 이렇게 총 4개를 교체해가며 썼네요. 저녁에 도착해서 따로 마련한 거처에서 자고, 다음날 선별 진료소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벚꽃길, 널브러진 유채꽃밭과 해안도로를 지나쳤는데, 그제야 고향에 온 느낌을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고, 다음 날 음식들을 지원받았습니다. 검사 과정은 생각보다 매끄러웠고(시골이라서 제가 유일한 검사자였을 것 같네요), 식료품 지원은 생각보다 꽤 괜찮아서(채소 같은 신선식품은 없었지만, 저질 식료품은 전혀 없었습니다), 뭐랄까, '우리나라 좋은 나라여~'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격리중 보고에 대해서는, 자가 진단 보고 시간을 안 지키면 칼같이 전화가 옵니다. 코로나 초반에는 헛발질도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잘 선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은 격리기간 잘 마무리해서 저도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를 위해 불철주야 힘쓰고 계신 공무원들과 의료인들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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