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유학자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은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은 인격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율곡 이이선생은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하여 당시에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습니다. 또 율곡 이이선생은 시를 잘 지으셨는데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지은 시가 너무 뛰어나서 '화석정'이라는 정자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선비와 시인들은 이같은 놀라운 시를 지은 율곡 이이선생을 대단히 칭찬했다고 합니다. 아래에 율곡 이이선생께서 여덟살에 지은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거진 숲 정자에 가을이 짙어,
글 읊는 사람 마음 설레게 하네
먼 물빛은 하늘에 닿아 함께 푸르고,
단풍잎은 가을 볕에 붉게 타누나.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하고,
강물은 만 리를 잇는 바람을 머금었네.
아아, 추워 뵈는 기러기는 어디로 가나.
처량한 울음 소리 구름 속에 사라지네.
1548년에 율곡 이이선생이 열세살이 되던 해에 진사시험이 열린다는 방(榜)이 붙었습니다. 방이 붙은 것을 확인한 율곡 이이선생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시험준비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율곡 이이선생이 과거시험장에 들어서자 과거시험에 참여한 선비들은 깜짝 놀랐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그런 율곡 선생을 보고 수군거리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의 답안지를 내고 오후에 시험관이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어린 율곡 이이선생이 장원급제를 하였습니다.
과거시험의 시험관은 어른들을 제치고 당당히 과거에 합격한 율곡 이이선생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또 다른 나이든 선비들도 입을 모아 어린 율곡 이이선생을 칭찬했고, 나라안에 소문이 모두 퍼져서 율곡 이이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율곡 이이선생은 성장하고 성인이 되신 후에 다시 과거에 급제하시고 혼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곡 이이선생은 안동 도산서원에 가서 평소에 존경하던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선생을 만나뵈었습니다. 안동은 퇴계 이황선생의 고향이고, 안동 도산 서원은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 왕이 이름을 지어 준 서원)입니다.
율곡 이이선생은 23세에 안동 도산서원에 가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퇴계 이황선생을 만나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율곡 이이선생은 토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도착할 무렵에 퇴계 이황선생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재주를 지녔으나 학문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또한 학문하기를 원하나 재주가 모자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학문하길 원하고 재주도 있으니, 뜻을 품고 노력하여 성공하기 바랍니다." 그후에도 퇴계 이황선생은 가끔씩 율곡 이이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율곡 이이선생은 그 때마다 감사의 뜻을 담긴 시를 지어 보내 보답을 하였습니다.
율곡 이이선생은 퇴계 이황선생의 격려를 받고 더욱 분발하여 학문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조선의 수도인 한성으로 돌아온 율곡 이이선생은 과거의 하나인 별시에 응시하였습니다. 별시는 나라의 기쁜 일이 있을 때 특별히 치루는 과거를 말합니다. 별시의 문제는 천도(= 하늘의 도리)에 대한 이치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거시험에서 율곡 이이선생은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책문을 지어 또다시 장원을 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에 2500여자의 역사적으로 빼어난 책문을 써서, 시험관들은 율곡 이이선생을 참으로 천재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시험관들은 율곡 이이선생이 쓴 '천도책'의 섬오한 내용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고 '천도책'은 당시 학계를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이후 율곡 이이선생은 '동인'과 '서인'으로 패를 나눈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외적의 침입에 미리 대비하자는 '10만 양병설'을 내놓았습니다. 율곡 이이선생의 선견지명대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였고 조선은 어려운 고비를 겪었지만 무성(武聖) 이순신장군과 여러 의병장들의 활약과 조선 백성의 노력과 힘으로 국난을 막을수 있었습니다.
율곡 이이선생은 태어나실때 강릉(江陵) 오죽헌(烏竹軒)에서 출생하셨는데, 강릉 오죽헌은 현재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죽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뜰 안에 오죽(烏竹) 즉 검은 대나무가 있어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저는 율곡 이이선생께서 태어나신 강릉 오죽헌과 강릉 오죽헌의 뜰에 있는 검은 대나무를 생각하면서 한국(KOREA)형 주류모델(5)인 '오죽주(烏竹酒)' 즉 '검은 대나무술'을 구상하였습니다.
원래 대나무술은 대나무로 빚은 술로서 쌀에 효모를 넣고 숙성시킨 후 숙성된 술에 대나무를 10여 일가량 담가 만든다고 합니다. 내가 구상한 '오죽주(烏竹酒)' 즉 검은 대나무술과 같은 경우에는 강릉 오죽헌에서 자라는 것과 같은 오죽(烏竹) 즉 검은 대나무를 사용하고 자체적인 연구를 거치고 과학적인 주류제조법을 사용하여 한국 전통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오죽주'를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국의 전통주(傳統酒)가 더욱 널리 알려지고 율곡 이이선생의 높은 학문정신과 애민(愛民)정신이 널리 전파되길 바랍니다.
율곡 이이선생께서 어릴 적 다섯살때에 이웃에 사는 아이가 발갛게 잘 익은 석류 몇개를 담아 왔습니다. 율곡 이이선생의 외할머니께서는 탐스럽게 익은 석류 한개를 어린 율곡 이이선생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린 율곡 이이선생은 눈을 지그시 감고서 옛시 한 구절을 외웠다고 합니다.
"은행은 껍질 속에 푸른 구슬을 머금었고,
석류는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을 감쌌구나."
다섯살의 나이로 어려운 시를 읊는 어린 율곡 이이선생을 보고 외할머니는 반드시 율곡 이이선생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조판서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던 율곡 이이선생은 항상 가난에 쪼들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율곡 이이선생은 평생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그가 죽은 후에 남긴 것은 주머니 속의 부싯돌 한 개였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온 나라가 슬퍼했고, 율곡 이이선생의 친구였던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우계 성혼선생이 말하길 "이이는 공자(孔子)와 견줄 만한 대학자이며, 진실로 백성을 사랑한 참된 정치가이며, 예언자였다. 그를 하늘에 뺏긴 것은 우리가 복이 없음이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편 율곡 이이선생과 우계 성혼선생께서는 두분 모두 돌아가신후에 동방18현(東方十八賢)으로 문묘에 배향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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