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유럽각국을 시찰하였습니다. 본래 사절단의 목적은 일본과 서구열강의 불평등조약 개정이었지만, 당사자 본인들도 조약개정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대신 서구열강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보고 또 무엇을 배워야할지 판단하기 위해 여행에 떠났습니다. 정부의 실세 최고지도부가 단체로 2년 가까이 나라를 비우는 일은 세계사적으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인데, 이들의 규모와 일정을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규모: 사절단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으로 총 107명
대사급: 이와쿠라 도모미 (당시 정부 수반)
장관급: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방문국가: 미국(8개월), 영국(4개월), 프랑스(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3주), 러시아(2주),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12개국 방문. 아라비아해,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거쳐 귀국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에 대한 기록도 남김)
소요경비: 약 50만 달러, 현재 환율로 약 100억엔 (당시 국가 예산의 1%)
사절단 평균 나이 32세, 최연로 이와쿠라 도모미가 47세, 최연소는 18세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건 당시 정부 실세들이 대부분 젊은 층이었고, 이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명목상 최고수반이었던 이와쿠라 도모미는 40대 후반이었으나 실제 국정을 좌지우하던 이들은 대부분 30대 중후반이었습니다. 동시에 중국이나 조선의 실권자들에 비하면 굉장히 젊은 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젊음 특유의 에너지 때문인지 아주 정열적이었습니다.
한편 사절단에는 정부관료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유학생들도 동행했는데, 이들은 사절단의 귀국 이후에도 계속 현지에 체류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습니다.
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에 유학을 시켰고, 이들 중 일부는 프랑스의 민권사상에 감화되어 추후 일본의 민권운동을 주도하기도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나카에 초민입니다. 그는 장자크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일본에 소개하고 자유민권운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 또 일부는 군사교관이 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 하버드 대학 등 미국의 유수 대학을 졸업하여 일본에서 의사, 물리학자 또는 법률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쿠라 사절단 귀국 후 쿠메 쿠니타케라는 서기관은 오늘날 단행본으로는 총 5권, 당시 책으로는 100편에 달하는 보고서 겸 시찰일기를 남겼고, 일반 대중에 공개했습니다. 이것이 미구회람실기라 불리는 책이고, 여행지마다 해당 국가의 역사와 지리, 풍속과 강점 등을 소개하였으며 해당 국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와 인상적이었던 점들을 서술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회의원 외유성 해외시찰과 비교하면, 여전히 배울점이 많은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해마다 각종 명목으로 의원외교 한답시고 해외 여기저기 가는데, 보도자료용 1~2페이지 보고서 말고 반드시 상세한 보고서를 남겨 국회 홈페이지에 올렸으면 좋겠네요.
그것이 어렵다면 해외에 주재한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해당 국가에 대한 에피소드 등을 블로그 형식으로 남기는 활동, 또는 특정 국가에 체재하고 있는 우리 언론사 특파원들이 본인들이 업으로 하는 단문 기사 말고, 특집 기획으로 해당 국가의 제반 동향 관련, 본인들이 관찰한 것에 대한 에세이를 최소 1주 단위로 정기적으로 올리면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