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느냐 먹히느냐 문제로 수 억 년이 넘도록 싸워온 건 동물들뿐이 아닙니다. 땅에서 아무리 용을 써 봤자 얼마 못 가고 옴짝달싹할 수밖에 없어서 많은 동물들이 감사합니다 하고 뜯어먹는 신세가 되는 식물들도 생존경쟁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죠.
독일의 그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슈바르츠는 "검다"는 뜻이고, 발트는 "숲"이라는 뜻이거든요. 현 독일의 남서부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 im Breisgau)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국경 따라 꽤 길게 뻗은 이 숲에 "검다"는 이름이 붙은 건, 숲이 하도 울창해서 그렇다는군요. 이 울창한 숲에 아우구스투스 휘하 바루스의 3개 구단이 아르미니우스(Arminius, 원어로 치면 헤르만)에게 제대로 걸려들어서 전멸당한 역사가 있죠. 휘르트겐 숲은 어떻구요. 괜히 "마녀들의 숲"(Spooky Witches' Lair)이라는 별명이 붙었겠습니까(물론 이런 별명이 붙은 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일대에서 벌어진 끔찍한 소모전도 단단히 한몫했습니다만). 하늘을 봐도 본 것 같지 않은 깜깜함을 자랑하는 이런 숲이야말로, 식물들간의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치열한 사투의 현장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람에게도 위험한 게 숲이었지만, 식물의 경우는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문제였다는 거죠. 숲이 너무 빽빽하게 들어서 햇빛이 제대로 들어서지 않다 보니, 키가 작은 식물들은 제대로 햇빛을 못 받고 시들시들 푸석푸석해지는 경우가 다반사죠. 그리고 그런 문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진화한 몇몇 종들이 있습니다. 바로 기생 식물(Parasitic plant)이죠. 물론 방식들은 야생답게 사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뭐 하긴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도록 만든 나무들도 작작 좀 가렸어야지 하는 욕을 얻어먹을 입장이라고는 합니다만(...)
여하간 이 기생 식물들은, 이대로는 답이 없으니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살아야겠다 하고 발버둥치는 놈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악한데 또 어떻게 보면 안쓰러운? 아 물론, 기생 식물들 중에는 정말 악독하게도 지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주제에 남의 것을 뺏는 게 더 편해서 그렇게 자라온(...) 더러운 놈들도 있습니다(이런 식물을 Facultative parasite라고 부릅니다).
몇 가지 예시로 보여 드리죠.
새삼(혹은 토사자(菟絲子),
Cuscuta)
영미권에서 흔히들 Dodder라고 부르는 놈들입니다. 하도 이놈의 식물들에게 당한 놈들이 많아서인지, 굉장히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생긴 게 생긴 거라 그런지 보통 머리카락과 관련된 이름이 많습니다. 머리카락잡초(hairweed), 악마의 머리카락(devil's hair), 마녀의 머리카락(witch's hair), 이외에 거지잡초(beggarweed), 지옥의 덩굴(hellbine), 교살자의 끈(strangle tare) 등등... 이름따나 이들은 희생자 식물들에게 슬슬 접근하다가 덩굴로 확 낚아채서 희생자를 칭칭 감습니다. 감고 올라가면서 희생자의 몸에 관을 뚫어버리죠. 그리고 원래 있던 새삼 뿌리는 버립니다. 그렇게 희생자의 양분을 빨아먹으면서 5~10년 정도 생장하는 거죠.
요렇게요.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Cuscuta 문서) 8번이 바로 문제의 관입니다.
2006년 사이언스 논문(Science. 2006 Sep 29;313(5795):1964-7)에서 밝히기를, 이놈이 희생자를 찾는 방식은 휘발성 가스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새삼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토마토와 그렇지 않은 밀을 놓고 새삼에게 선택하게 했더니 새삼이 토마토 쪽으로 덩굴을 뻗더라는 논문이었습니다. 토마토의 생리로 나오는 가스를 새삼이 알아차린다는 거죠. 누가 사악한 식물 아니랄까봐 희생자를 찾는 능력은 발군이라 해야겠네요. 다만, 당하는 쪽에서도 그냥 당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서, 자스민산이나 살리실산(아스피린 합성할 때 쓰는 그겁니다)을 합성해서 새삼의 공격에 대응하거나, 털이 많은 줄기로 미끌미끌하게 만들어서 새삼이 잘 타고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 정도라네요. 아직 이런 대응에 대해서는 많은 게 연구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놈이 진짜로 골치아픈 것은 한 놈이 들어오면 퍼지는 게 완전히 순식간인데다 한 새삼이 여러 풀을 공략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그야말로 밭 전체의 농사를 망치거든요. 그래서 씨앗 단계에서부터 새삼이 있는지를 검사하고 몸을 수색하며, 만일 새삼이 탐지되었다면 몇 년간은 새삼이 먹을 수 없는 식물들을 심는 것으로 대응한다고 합니다. 아스파라거스나 벼목(벼, 밀, 보리 등) 같은 많은 외떡잎식물들이 그 주인공이죠. 그래서 많은 국가에서 아예 법적으로 새삼 씨앗을 가져오는 걸 금지하기도 합니다.
겨우살이(
Viscum, a. k. a. Mistletoe)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밑에서 연인들이 키스를 한다는 속설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겨우살이! ...입니다만, 이놈도 기생 식물입니다. 심지어 얘는 숙주가 없으면 살아남지도 못하는 식물이죠(분류하기를, 이렇게 숙주 아니면 살 수 없는 놈들을 통틀어서 Obligate parasite라고 분류합니다). 글쎄, 광합성으로 자기가 먹을 양분을 일부 만들어내기는 한다는데, 그걸로는 모자라서 다른 식물의 것을 훔쳐내는 것이죠. 이렇게 지도 어느 정도 노오력은 하는데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이 부족해서 남의 것을 뺏어야만 하는 식물들을 가리켜서 반기생식물(Hemiparasitic plants)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근데 좀 웃기는 게, 진짜 조금만이라도 지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죄다 반기생식물로 몰아넣어버리는데, 이 겨우살이의 종 일부는 양분을 만들기는 합니다... 딱 지가 숙주에 붙을 때까지만요. Viscum minimum이라는 종이 대표적으로 그렇다는군요. 그래서 얘들한테 광합성은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수준이라나요? (2차 출처 영문 위키백과, 원 출처 Visser, Johann (1981). South African parasitic flowering plants. Cape Town: Juta. ISBN 0-7021-1228-3)
살아가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숙주의 목질 가지를 꿰뚫어 빨아먹을 관을 연결하는 것이죠. 우유에 빨대 꽂듯이 말입니다. 가지에 기생하는 방식이라 겨우살이 하나 달렸다고 숙주가 죽지는 않지만, 가끔 숙주가 겨우살이에 뒤덮여서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기는 있다더군요. 종에 따라서 이처럼 정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70~100종 가까이 되는 이 겨우살이과의 식물 백이면 백 모두가 기생 생활을 하죠.
퍽이나 희한한 것은 겨우살이의 씨앗이 퍼지는 방식인데, 유럽에서는 겨울지빠귀(Mistle thrush), 북아메리카에서는 딱새(정확히는 그 일부인 Phainopepla nitens),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꽃새(Flowerpecker, 역시 정확히는 그 중 일부인 Dicaeum)가 본의 아닌 희생자 역할을 합니다. 얘가 겨우살이 열매를 먹고 씨를 배출하는데, 이 씨가 정말 무진장 찐득거리거든요(!). Viscin이라는 물질 때문에 그렇다는데 어찌나 찐득거리는지 아예 금방 달라붙어 굳어버릴 정도라 하네요. 별수없이 화장지가 없는 새들은 나무에다가 엉덩이를 부비대는 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데 이 때 씨앗이 나무에 달라붙으면서 발아하고 금방 숙주를 찾는 거죠.
꽤 유명한 매체에서 겨우살이가 등장한 바 있었죠. 대표적으로 해리 포터가 있구요. 국내 번역판은 불사조 기사단 3권인가 그랬을 겁니다. 롤에서도 등장하죠. 국내명은 산타 르블랑으로 좀 엉뚱하게 번역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그 스킨의 영문 이름이 Mistletoe LeBlanc입니다.
교살자 무화과(Strangler Fig,
Ficus의 일종)
Ficus라 하면 무화과속(属)을 의미합니다. 종속과목강문계 할 때 바로 그 속이죠. 이 무화과속의 식물들 중 일부는 참으로 특이한 방식으로 자라는데, 그게 바로 이 교살자 무화과입니다. 앞서 제가 글머리에 숲이 어쩌구저쩌구 했었죠? 바로 이게 그 숲과 직결되는 내용입니다. 새들에 의해서 나무의 높은 부분에 닿은 씨앗이 거기의 틈새 사이에서 발아하는 퍽이나 별난 발아로 일생을 시작하는 이들은, 뿌리가 그 나무를 타고 땅으로 쭈~욱 내려갑니다(!!). 그렇게 땅으로 내려가면서 아주 나무를 죄어붙이는 거죠(교살자 무화과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입니다). 나무의 몸통에 자기 뿌리를 붙이고 내려 삽니다. 그렇게 위로는 햇빛을 확보하고 아래로는 토양에서의 무기질을 공급받는 것이죠.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들이 썩거나 해서 얻는 유기물 부식은 덤.
이렇게 된 이유는, 이야기했듯이 숲 아래에서는 충분한 양의 햇빛을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얘들은 역으로 간 거죠. 밑에서 시작해서 제대로 자랄 수 없다면 위에서 시작하면 되지! 그러다 보니 얘들은 그냥 타고 내려갈 나무만 있으면 되지 꼭 굳이 구태여 숙주의 몸에 관을 뚫고 죽이려 들 필요는 없는 좀 희한한 애들입니다. 이렇게 남의 몸에 달라붙어서 자라는 애들을 가리켜서 에피파이트(Epiphyte)라고 하죠. 기생 식물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은, 얘들은 "물리적으로 달라붙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반드시 타고 올라갈 숙주를 죽이거나 피해를 끼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개중에는 이 교살자 무화과처럼 위에서부터 타고 내려오는 애들도 있는데 얘들은 또 헤미에피파이트(Hemiepiphyte)라고 특이한 놈으로 마크해서 분류하죠.
항상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위치가 위치기도 하고, 또 햇빛을 강탈당하는 입장이다 보니 교살자 무화과가 조여붙인 나무가 죽는 일도 종종 생기긴 합니다. 그리고 교살자 무화과 자체가 뿌리가 자라면서 나무를 점점 세게 조이기도 하며, 목졸려 죽은 나무(물론 수사적인 표현일 뿐 나무가 진짜로 목이 졸려 죽는 일은 없죠)가 부식 등의 여러 이유로 사라지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옵니다. 아주 오래 된 교살자 무화과의 허리를 갈라보면 속이 뻥 뚫려 있는 거죠. 죽은 자의 온기... 아니 공간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좀 특이한 놈이긴 한데, 엄밀히 말하면 나무에게서 양분이나 물을 빼앗아오는 건 아니라서 기생 식물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피파이트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이구요.
크리스마스 트리(
Nuytsia floribunda)
이 나무에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이름이 붙은 건, 얘들은 꽃을 크리스마스 시즌에 피우거든요. 주황색 꽃을 피우는데 생긴 것만 예뻤지 성질은 좀 난폭합니다. 주 목격 장소는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요렇게 생겨먹었죠.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Nuytsia 문서)
얘들 역시 기생 식물은 기생 식물인데, 앞서 이야기한 겨우살이와 같은 반기생식물(Hemiparasitic plant)입니다. 일부 종에 대해서는 이름만 반기생식물인 겨우살이와 달리 얘들은 의외로 번듯하게 자라죠. 겉보기에는 남의 식물을 해하는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음흉한 놈들이 기생하는 비밀은 바로 뿌리에 있습니다. 뿌리가 다른 종의 식물들을 찾아 헤메이다가, 다른 뿌리가 발견되면 즉시 잡았다 요놈을 시전하고 자기 뿌리를 강제로 꽂아버립니다. 그리고는 물과 영양분을 강탈합니다. 그렇게 메리 크리스마스, 얘들아! ...아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시작되는 거죠(...) 심지어는 땅 속의 전화선까지(!!!) 습격한 일도 있다는군요. 괜히 제가 난폭하다고 표현한 게 아닙니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발아 후 1~2년 정도는 무진장 잘 자라는데도 충분히 성숙할 때까지 키우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재배가 무진장 까다롭다는군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대충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기생 식물(Parasitic Plant) vs 에피파이트(Epiphyte) - 일반적으로 숙주에게 피해가 가느냐 가지 않느냐. 후자의 예가 교살자 무화과.
반기생식물(Hemiparasitic Plant) - 지 스스로 조금이라도 광합성을 할 능력이 있는가. 예시는 겨우살이와 오스트레일리아 크리스마스 트리.
기생 방식 - 줄기에 기생하느냐, 뿌리에 기생하느냐. 겨우살이와 오스트레일리아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분하는 기생 방식이죠.
분류할 때 여기에 처음에 이야기했던 지 스스로 살 수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라는 기준을 끌고 옵니다. 좀 난잡한데,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1) 자기 스스로 살 수 있다 vs 없다 : 살 수 있으면 Facultative, 살 수 없으면 Obligate.
2) 뿌리에 기생한다 vs 줄기에 기생한다 : 뿌리면 Root가 붙고, 줄기면 Stem이 붙습니다.
3) 눈곱만큼이나마 지 스스로 양분을 만들 수 있다 vs 양분을 모조리 빼앗아와야 한다 : 전자의 경우가 Hemiparasite, 후자는 Holoparasite. Holo-라는 접두사는 전체(whole)를 의미합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양분을 모조리 빼앗아와야 하는 놈이 지 스스로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Holoparasite의 경우는 2)와 3)만 고려합니다. 이 예가 바로 처음에 이야기했던 새삼이죠. 줄기를 타고 올라가며 줄기에 관을 뚫어 기생하기 때문에 새삼은 Stem holoparasite가 됩니다.
양분을 만들 수는 있는데, 그걸로는 한참 모자라서 결국 남의 양분을 무조건 빼앗아와야 하는 식물들은 자기 스스로 살 수 없죠. 이런 식물들 앞에는 Obligate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겨우살이나 크리스마스 트리나 다 그런 종류죠. 다만 겨우살이는 줄기에 기생하고, 크리스마스 트리는 뿌리에 기생하기 때문에 둘은 각각 Obligate stem hemiparasite와 Obligate root hemiparasite로 구분됩니다.
아니 그럼 지 혼자서 살 수 있는 식물이 있긴 있는 거요? 하고 물어보신다면, 네, 있기는 있습니다. Rhinanthus minor, 꽃이 생긴 것 때문에 노란 딸랑이(Yellow rattle)로 통하는 식물들이 바로 그것이죠.
그 외에 기생 식물로 분류되는 애들은 초종용(Broomrape, 학명 Orobanche), 라플레시아(Rafflesia), 히드노라(Hydnora - 남아메리카 및 남아프리카에서 자생하는데 특이하게도 잎조차 없고 생긴 게 무지무지 괴악한 식물입니다. 진짜로 괴물 눈깔처럼 생겼죠. 어쨌든 이상 전기생 식물), 카스틸레야(Castilleja, 일명 Indian Paintbrush. 초종용과의 식물. 러시아 최서북단의 콜라 반도 및 알래스카에서 안데스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자라며 잔디 및 잡초 뿌리를 공격) 등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영문 위키백과를 뒤져가며 이야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