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곰입니다. 지난번 글에 이어 두 번째 글을 씁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지난번에 예고했던 대로 작가별 단편집입니다. SF를 여럿 접하다 보면 점차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가를 알아가게 됩니다. 경쾌하고 위트 있으면서도 때때로 생명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끌리는 분이 있겠지요. 냉전 시대를 연상케 하는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러니를 다루는 필립 K. 딕이 마음에 드는 분도 있으실 테지요. 또는 작가 성향은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대모험활극에 가까운 신나는 SF를 그려내는 로버트 하인라인이 딱 좋다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다음에 소개해 드릴 이름은 어떠신가요?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K. 르귄, 레이 브래드버리, 테드 창, 아서 클라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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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 링크 :
여러분에게 SF를 추천합니다 (1.단편집)
https://cdn.pgr21.com/?b=8&n=26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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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로저 젤라즈니
마초적인 주인공이 마초적인 행위를 하는 이야기를 마초적인 문장으로 그려내는 작가. 저는 로저 젤라즈니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 마초라는 게 어떻게 보면 쿨함이고, 어떻게 보면 댄디함일수도 있겠지만, 저는 마초라고 생각합니다.
젤라즈니의 작품은 대개 ‘이 자식 성격은 더럽지만 왠지 멋있잖아’ 싶은 주인공이 갖가지 고난에도 불구하고 활약하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나 근간에 깔려 있는 주인공의 책임감과 시니컬한 개그를 동반한 희생 정신. 이는 흡사 자신의 몸으로 존 코너를 감싸 총알로부터 보호해 주는 T-800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때문에 로저 젤라즈니의 주인공들은 근본적으로 마초일 수밖에 없고, 근본적으로 멋있는 마초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젤라즈니는 지식의 폭이 상당히 넓은 작가입니다. 그래서 지적 유희를 자주 구사하는데, 이 점이 대체로 작품에 분위기를 부여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 극한에 다다른 작품이 바로 신화SF의 걸작인
[신들의 사회]입니다.
다만 젤라즈니는 SF와 함께
[앰버 연대기]로 대표되는 판타지 작품들도 여럿 집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소위 ‘정통SF'보다는 SF와 판타지가 뒤섞인 퓨전SF에 가깝지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그런 젤라즈니의 비교적 초기 단편 중 명작들을 엄선한 작품집입니다. 저는 무인도에 단 한 권의 SF를 들고 가야 한다면 이 책을 들고 갈 겁니다. 여담이지만 이 책, 어떻게 보면 SF단편집이 아니라 로맨스 단편집일지도 모릅니다. 몇몇 엽편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이 사랑을 다루거든요.
정말 고르기 힘들지만, 특히 추천할 만한 단편은 한낱 인간으로서 측량조차 하기 어려운 거대한 힘에 대한 좌절과 극복을 다룬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외계 문명과의 접촉과 신화적인 사랑을 멋지게 버무려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인간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인류의 종말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아담과 이브를 그려낸 ‘프로스트와 베타’입니다. 그리고 남자분들께는 특별히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를 추가로 추천합니다.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바람의 열두 방향] / 어슐러 K. 르귄
어슐러 K. 르귄은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로 ‘SF작가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0순위’라는 평까지 듣는 여성 작가입니다. 한국 나이로 여든 둘이지만 아직도 정정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앞서 언급한 로저 젤라즈니가 마초라면, 어슐러 K. 르귄은 정반대로 페미니스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빼면 이 두 사람은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SF와 판타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는 점이 그렇고, 고난과 극복에 따른 내적 성장을 즐겨 다룬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저는 코윈(앰버 연대기)과 게드(어스시 연작)가 이상하게도 겹쳐 보이더라고요. 물론 성격은 완전히 다르지만요.
SF의 사회적 측면에 주목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심도 있게 탐구하는 점에서 그녀의 작품들은 한결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해 냅니다. 페미니스트와 아나키스트를 자주 다루며, 세계관을 일관성 있게 구축하여 SF의 세계 ‘헤인’과 판타지의 세계 ‘어스시(땅바다)’를 창조하고 이를 배경으로 무수한 작품을 써냈습니다.
참고로 어슐러 K. 르귄은 ‘르귄 여사’, 혹은 K를 빼고 그냥 ‘어슐러 르귄’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작가의 페미니즘적 성향과 연계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단편집 안에 한가득 담겨 있는 명작들 가운데서도 더욱 추천할 만한 작품은 극도로 폐쇄적인 지식 독점 체제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이야기인 ‘명인들’, 인간 복제와 개개인의 존재 의의를 다룬 ‘아홉 생명’, 시간 여행이라는 낡아빠진 클리쉐에도 불구하고 그 소박한 따스함에 애정을 듬뿍 보낼 수밖에 없는 ‘파리의 4월’, 그리고 SF가 아니라 판타지지만 극력 추천할 수밖에 없는 즐겁고 무서운 동화 ‘이름의 법칙’입니다.
[화성 연대기] / 레이 브래드버리
레이 브래드버리는 SF로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왜 시를 안 쓰고 SF를 쓰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감수성이 흘러넘치는 작가지요. 화성 연대기는 화성의 운하가 발견된 직후, 화성에 대한 온갖 추측들이 난무할 때 쓰인 연작 단편집입니다. 그러나 이 작가가 그려낸 ‘첫 접촉First Contact'는 결코 예사롭지 않습니다. 화성인들의 문화를 파괴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 지구인의 모습은 어지 보면 인디언의 문화를 일거에 말살해 버린 서양인들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문명의 미래를 날카롭게 예언하고 있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멸망의 과정을 그리면서도 레이 브래드버리의 탁월한 감수성은 비참함 가운데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냅니다. 혹시 만화
[카페 알파]를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분위기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막을 수 없는 멸망과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물질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이러한 역설이
[화성 연대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작품들 전체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추천할 만한 작품은 위대한 작가 에드거 앨런 포에게 헌정하는 SF 오마주인 ‘어셔2’,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노예들과 그들이 떠난 후 고독하게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하늘 한가운데 난 길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과 그를 창조해낸 인간의 고독함을 이야기하는 ‘긴 세월’입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 테드 창
앞서 언급한 로저 젤라즈니나 어슐러 K. 르귄이 다작을 하는 반면, 극도로 과작을 하는 작가입니다. 데뷔 후 20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8편의 작품이 실린 중단편집 한 권을 달랑 내놓은 상태거든요. 물론 그 외에도 단편 몇 편이 더 있긴 합니다만, 대강 계산해 보아도 단편소설 하나에 2년씩 걸린다고 보면 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실로 엄청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작품을 통해 받은 상의 숫자는 작품의 수를 넘어섭니다. 어디 보자, 휴고 상, 네뷸러 상, 스터전 상, 사이드와이즈 상, 로커스 상, 아시모프 상, 존 캠벨 Jr. 기념상, SF매거진상 등을 받았네요. 게다가 네뷸러 상은 데뷔작으로 역대 최연소 수상이라. 흠음. 이 사람 천재잖아요? 정말이지 'SF 문단에 쏟아진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가입니다.
정제된 과학적 문장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작가지만, 동시에 부드러운 문장도 쓸 줄 압니다. 다재다능하다고나 할까요. 이 중단편집에 있는 작품들은 모두 느낌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같이 대단한 힘을 지난 작품들이지요. 작품 활동을 조금만 더 왕성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있는 훌륭한 책입니다.
추천 작품은 확장된 SF의 외연을 마음껏 활용하여 바빌론 신화와 인간의 도전을 다룬 ‘바빌론의 탑’, 종교와 믿음에 대해 철학적인 사색거리를 던져주는 ‘지옥은 신의 부재’,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현대의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 상기시켜주는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입니다.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 아서 클라크
소위 SF 3대 거장 가운데서도, Science라는 말에 가장 충실한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철저한 과학적 검증 아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에 초심자들이 보기에는 다소 딱딱하고 재미없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딱딱한 과학적 사실만을 나열하는 작가는 아니며, 오히려 과학적으로 철저한 SF를 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3대 거장(Big Three)라는 칭호를 공으로 받은 게 아닙니다.
인류 진화에 대한 신념과 절대 지성에 대한 경외를 주된 테마로 하여 작품을 썼는데, 특히 ‘라마와의 랑데부’나 ‘유년기의 끝’ 같은 작품을 보면 절대 지성 앞에 한없이 나약하고 무력해지는 인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지에 대한 경이와 두려움을 잘 표현하지요. 어떻게 보면 이는 아서 클라크가 그 나름의 방석으로 해석한 절대신과 인간 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아서 클라크의 단편을 모두 모아 놓은 책입니다. 앞서 소개한 다른 책들과는 달리 단편 전집이다 보니, 각 작품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장할 만하지요. 초기작들을 보면 ‘하얀 사슴’이라는 술집을 중심으로 한 연작 작품이 있는데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의외로 위트가 넘칩니다. 반면 후기로 갈수록 인상 쓰고 각 잡고 쓴 작품들이지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겁니다. 저는 후기 작품들이 더 좋습니다. 여담으로,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오버로드와 오버마인드는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추천 단편은 대를 이어 내려가는 부자의 정을 그린 걸작 단편인 ‘하늘의 저편’, 문명의 멸망과 탄생을 동시에 묶어낸 ‘동방의 별’, 미지의 세계를 처음으로 탐험한다는 SF의 고전적 테마를 멋지게 표현한 ‘메두사와의 만남’입니다.
아... 생각보다 쓰는 데 오래 걸렸네요. 피곤해 죽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추천하고 싶은 SF장편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작품들을 하나씩 짚고 넘어갈까 생각 중입니다. 아직 대상을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아래의 후보작들 중 일부를 고를 예정입니다.
[신들의 사회] / 로저 젤라즈니
[라마와의 랑데부] / 아서 클라크
[별의 계승자] / 제임스 P. 호건
[쿼런틴] / 그렉 이건
[어둠의 왼손] / 어슐러 K. 르귄
[스타십 트루퍼스] / 로버트 하인라인
[프라이데이] / 로버트 하인라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 필립 K. 딕
[마일즈의 전쟁] /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영원한 전쟁] / 조 홀드먼
[히페리온] / 댄 시먼스
[강철도시] / 아이작 아시모프
[둠스데이 북] / 코니 윌리스
등등...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