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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6/20 18:37:20
Name Poe
Subject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16
22. 우리의 소원은 청소, 꿈에도 소원은 청소
우리의 소원은 거창하지 않았다. 막내가 제발 집을 좀 어질렀으면 했다. 원래 아이가 있는 집들은 살얼음판 같아야 정상이다. 가구들의 뾰족한 모서리란 모서리는 전부 보호대로 둥글리고, 서랍이나 책꽂이 아래 칸들은 비우거나 가볍고 부드러운 것들로만 채우고도 불안해서 아가의 동선을 면밀히 지켜야 한다. 첫째와 둘째가 무법자처럼 집을 돌아다녔을 때는 우리도 그랬다. 그랬는데도 아차 하는 순간에 아이들은 밥솥에 손을 데이고, 정수기 물을 바닥에 흥건히 쏟아내고, 내 재산 목록 1호 일체형 컴퓨터를 깨부쉈다.

막내 때는 집에 평화와 안식이 흘러넘쳤다. 모서리 보호대 같은 게 세상에 있다는 건 다른 아기집이나 소아 병원에 가서야 생각이 났다. 서랍과 책꽂이의 짐들을 이동할 필요도, 가전제품을 대피시킬 이유도 없었다. 막내에게는 동선이 없었기에 지킬 것도 없었고, 오히려 혼자 낮잠 자다가 깨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을까 봐(그래서 자폐 증상이 혹시 더 심해질까 봐) 얌전히 있는 아이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야 했다. 이처럼 쉬운 육아가 있을 수가 없었다.

입원 재활을 시작하고서 아내와 막내가 처음 집에 온 건 입원 후 한 달만이었다. 병원의 외박 규칙은 제법 엄격하여, 금요일 밤부터 병원을 나가 주말 내내 집에 머물다가 일요일 밤에 병원으로 돌아오는 일정은 한 달에 한 번만 허락됐다. 대신 토요일에 나가서 하룻밤만 집에서 자는 건 횟수 제한이 없었다. 집이 병원 근처에 있다면 토요일 아침부터 외출을 해도 주말을 충분히 집에서 쉴 수 있었지만, 우리 같은 지방민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내가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아침 일찍 서울로 출발했다가, 아내와 막내를 데리고 다시 충주로 내려와야 했는데, 주말에는 이동 인구가 제법 되기 때문에 사실상 하루를 도로 위에서 보내야만 했다.

한 달을 기다리다 외박권이 생겨 드디어 아내와 막내가 집에 오는 주말,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첫째와 둘째는 ‘환. 영. 합. 니. 다’라는 글자를 색종이로 오려 현관에 붙였다. 어디서 배웠는지 각종 장식으로 글자를 꾸미기까지 했다. 엄마에게 주는 손편지까지 써서 침대 머리맡에 넣어두었다. 나도 아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심혈을 다해 끓여두고(병원식만 먹다 보니 얼큰한 게 무지 먹고 싶다고 했었다), 주말 동안 회사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미리 잠잘 시간을 쪼개 원고들을 써 저장해 두었다. 그리고 아내가 집안 청소와 정리에 목숨을 거는 성격이라 우리 셋은 힘을 합해 집을 최대한 깔끔하게 만들어 두었다.

막내가 금요일 수업을 마칠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갔다가 충주로 내려오니 늦은 밤이 됐다. 아내는 한 달 만에 집에 와 감개무량했지만, 녹초가 돼 있었다. 아이들의 환영 메시지 가득한 현관에서 잠깐 감동했지만 침대가 더 급했다. 침대 맡에 아이들의 손 편지가 있었지만 마음 다해 읽어보지는 못하고 다음 아침을 기약했다. 첫째와 둘째는 엄마가 깨끗한 집을 좀 알아봐 주기를 내심 기대했지만(평소에 청소 문제로 적잖이 혼났기에), 엄마의 피곤함을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나는 주말 내내 막내를 전담하기로 했고, 이것은 이후 입원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 사이의 암묵적 합의로 남아 있게 된다. 난 아내와 다른 방에서 막내와 단둘이 누워, 오래 부재했던 아가 향을 폐 메모리에 깊이깊이 새겨 넣었다.

다음 날 우리는 한 달 전처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막내를 귀여워하고, 같이 집안일을 했다. 아내나 우리나 할 이야기가 많았다.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막내가 수업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 어떤 수업들이 있으며 막내의 반응이 어떤지, 얼마나 활동적으로 변하고 있는지 아내는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동안 뭘 먹고살았는지, 이웃집에서 어떤 반찬들을 가져다주었는지, 그동안 어떤 엄마 음식이 먹고 싶었는지 콸콸 쏟아냈다. 아내는 막내만 보며 살았고, 우리는 그 둘만 그리며 살았던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토요일이 참 짧았다.

우리가 부엌에서 한창 수다를 떨 때, 막내는 거실 매트에 혼자 누워있었다. 거실에는 아내가 입원 직전에 주문한 모형 나무 장식들이 있었다. 우리 집 인테리어 담당은 아내이기 때문에 그 나무 장식들은 배송된 상태 그대로 거실에 있었던 것일 뿐, 거기가 제자리는 아니었다. 막내가 한 달 전 집안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나무들은 상당히 낯선 것들일 게 분명하나, 막내에게 그런 수준의 인지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겨우 배밀이 정도 하는 아이가 방을 낯설어한다고 해서 그걸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한 기대감은 당시 우리에게 너무나 먼 이야기, 꿈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거실에서 뭔가 둔탁한 소리가 났다. 둔탁했지만 수다의 음파를 뚫어낼 정도로 예리하긴 했다. 우리 넷은 너나 할 것 없이 거실로 뛰었다. 놀라운 광경이 준비돼 있었다. 나무 하나가 쓰러져 있고, 그 옆에 막내가 앉아서 모형 이파리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 모형에 아이가 부딪히지 않았다는 안도감은, 한참 후에나 찾아왔다. 그 장면을 이해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마 막내가 혼자 앉아 그 나무를 쓰러트렸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누가 저 나무 눕혀 뒀어?”
인테리어 담당께서 추궁했다. 우린 서로 쳐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누가 장식 나무를 일부러 눕혀 두나, 하는 반문도 없었던 건 담당자의 위엄 때문만은 아니었다. 침묵이 길어지며, 그 누구도 나무를 쓰러트리지 않았다는 게 점점 우리 각자의 머릿속에서 현실화됐다. 그렇다면 범인은 저 조그마한 놈밖에 없을 터였다. 우리는 짧은 시간 속에서 시선을 바삐 나눴다. 누군가 “설마...?”라고 한 것도 같다. 그게 환호의 트리거가 됐다. 한 명은 막내를 안으러 무성한 인조 나무속으로 뛰어들고, 한 명은 촬영을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한 명은 입을 틀어막고 가만히 서 있었다. 누가 누구였는지는 그 당시를 떠올릴 때마다 바뀐다. 아마, 그 누가 어떤 역할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막내 앞에서 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리라.

사실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음에도 우리는 겨우 다음 날이 되어서야 장식 나무들을 거실에서 빼내 자리를 찾아줬다. 그날은 그 자리에 그대로 뒀다. 우리의 수다 장소도 거실로 고정됐다. 막내가 스스로 일어나 나무를 쓰러트리는 걸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우리는 수다를 떨고 있음에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몰랐다. 아무 말이나 하고 아무 대답이나 했다. 시끌시끌했으나 조용한 분위기, 화기애애했으나 긴장감 넘치는 상태였다면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다 한 순간, 누워 있던 막내가 뒤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무 쪽을 쳐다봤다. 엎어져 나무 쪽으로 배를 밀었다. 쭉쭉 전진했다. 나무 앞에 도착해 다시 앉았다. 잎사귀 하나로 손을 뻗었다. 잡아당겼다.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걸 그대로 받아 아이 위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 아이는 우리 모두에게 둘러싸여 뽀뽀 세례를 받았다. 누가 선창을 했는지, 잘했다, 잘했어, 너무 잘했어,라는 단순한 단어들로 만들어진 즉흥곡이 거실에 울려 퍼졌다. 인테리어 담당자께 결제를 받지 않았으므로 난 속으로만 ‘얼마든지 깨고 부숴라. 내가 다 치워줄게’라고, 다른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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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래
25/06/20 21:48
수정 아이콘
막내 응원합니다. 
25/06/20 21:57
수정 아이콘
응원합니다
25/06/20 22:01
수정 아이콘
댓글을 다는 건 처음인데 잘 읽고 있습니다.
포 님 가족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막내 자체도 사랑스럽지만 막내로 인해 가족의 중심이 변하고 변화한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상호작용과 사랑이 생겨나는 것 같아서 참 행복해보이고 가족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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