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5/04/26 20:42:00
Name 두괴즐
File #1 그리고_세계는_멸망했다.jpg (9.2 KB), Download : 669
Link #1 https://tobe.aladin.co.kr/n/404065
Subject [일반] [독서 에세이] 정치의 종이 되는 생각 없는 과학 (『20세기 소년』)


정치의 종이 되는 생각 없는 과학 (『20세기 소년』)

-과학이라는 신화와 과학자라는 생활인





<1> 친구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1999~2007)은 정치적 사유가 부재할 때, 과학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확인한다.



만화 속 주인공인 켄지는 편의점 점장일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적 친구였던 동키의 부고를 받는다. 죽은 동키는 편지를 남겼고, 그의 사망을 둘러싼 정황이 조직적인 살해로 의심된다.



다른 한편, 전 세계에서 세균으로 인한 의문사가 국지적으로 발생한다. 켄지는 점점 심상치 않은 일들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 배후에 신흥종교 교단인 ‘친구’가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벌어지는 일들이 켄지가 어릴 적에 재미 삼아 적었던 ‘예언의 서’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들을 벌이고 있는 이는 그 예언을 아는 사람일 것. 도대체 ‘친구’는 누구인가?





<2> 만국박람회



『20세기 소년』을 작동하는 주요 동력은 만국박람회다. 1970년에는 오사카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고, 이는 특히 일본의 소년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켄지와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만국박람회는 인류의 진보와 조화를 상징하지만, 과학 기술의 위험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 켄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위험에 관한 것이다.



켄지의 예언은 인류 종말을 향해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가 바로 ‘바이러스’다. 세균 병기야 말로 가장 효과적인 학살의 기술이다. 20세기의 마지막 날, 악의 조직은 원자력 거대 로봇을 통해 사방에 세균을 뿌리며 세계정복을 시도한다. 이에 대항하여 9명의 전사가 일어나 지구의 평화를 위해 싸우게 된다. 이것이 어릴 적 켄지가 예견한 허무맹랑한 ‘예언의 서’다. 문제는 당사자인 켄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 공상이 실제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모든 허무맹랑함이 작동될 수 있었던 건, 결국 과학 기술의 진보 덕분이다. 정의의 용사가 등장하기 위해선 악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최신 생의학 지식을 활용한 치명적 바이러스의 인위적 발명이다.





<3> 바이러스의 발명



이 기획을 실행하기 위해 ‘친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분과가 미생물학이다. 켄지의 동창이자 ‘친구’의 친구였던 야마네는 어릴 적부터 학문적으로 탁월했다. ‘친구’는 이를 눈여겨보았고 이후 이용한다. 야마네는 연구와 학업적 성취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기에 ‘친구’는 그를 적극 후원했고, 동시에 자극한다. 결국 야마네는 인류의 99%를 멸절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를 만들어 낸다. 그는 자신의 발명에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 감탄하기도 했지만, 종국의 사태를 사유하지는 못했다.



사실 야마네가 자신의 연구에 몰입하고 친구의 자극대로 탁월한 과학적 성취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켄지의 누나인 엔도 키리코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마네는 전에 없는 바이러스를 만들어 내고, 이에 대항하는 백신을 키리코가 만든다. 그러면 다시 야마네는 그 백신이 통하지 않는 신종 바이러스를 만들고, 또 키리코는 백신을 만드는, 이러한 작업을 계속 반복했다.



이 연구가 인류의 진보와 조화를 위한 작업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몰입했던 키리코는 어느 날 알게 된다. 15만 명이 학살된 피의 그믐날의 세균이 자신의 연구소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자신이 써온 연구비와 그 출처에 대해 의심하고 이를 추적한다. 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친구’이며, 자신들이 해온 프로젝트의 용처와 목적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키리코는 야마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 세계의 1%만 살아남으면, 나머지 59억 4천만 명은 어떻게 되지? 우리의 밀실게임이 인류를 멸망시키고 있단 말이야!!”



키리코와 야마네는 이후 ‘친구’에 저항하는 삶을 살지만,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4> 국가와 과학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분야는 과학이다. 과학은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며 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는 가정이 오랫동안 공유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학은 정치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호출되어 복무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장편영화 <오펜하이머>(2023)는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오펜하이머의 시대는 과학사적으로 분기점이 되는 시기였다. 우주를 해석하는 새로운 제안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의 주류 관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었는데, 젊은 일군의 과학자들이 여기에 도전한다. ‘양자역학’의 등장이다. 영화의 초반에 오펜하이머가 유럽으로 가서 했던 공부가 바로 양자역학이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이들이 양자역학의 거인들이다.



실험물리학이 되었든, 이론물리학이 되었든, 글로벌 과학공동체는 양자역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지를 함께 탐구한다. 이들은 이론 내에서 혹은 이론 간에서 서로 경쟁하지만 모두 동료다. 인류의 앎이 또 한 번 큰 걸음을 내딛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갑자기 공중분해 된다. 국가의 부름이 있는 탓이다. 이들은 곧 다른 공동체로 개편된다.



우주에 대한 탐구이자, 우리 자신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대량살상무기 개발로 전환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세계시민이던 과학자들은 삽시간에 애국 투사가 되어 타국의 파괴자가 된다. ‘불확정성 원리’를 구축하여 양자역학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의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Uranverein)의 주요 멤버가 된다. 탁월한 이론물리학자였던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맨해튼 계획의 수장이 되었고, 종국에는 핵무기의 아버지가 된다.





<5> 과학자라는 생활인



과학사회학자인 로버트 머튼은 과학자들이 서로를 공통의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전통을 공유하는 동료로 인지하여 ‘과학자 공동체(scientific community)’를 형성한다고 봤다. 머튼에 따르면 16세기 이후 과학이 ‘공인된 지식의 확대(extension of certified knowledge)’라는 제도적 목표를 성취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과학자사회가 경험적 증거, 논리적 일관성, 체계적인 예측과 같은 인지적 규범과 공유성, 보편성, 조직화된 회의, 그리고 탈이해관계라는 사회적 규범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박희제, 「과학자사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과학기술학의 세계』, 휴먼사이언스, 2014, 30)



하지만 『20세기 소년』과 <오펜하이머>에서 보듯, 이러한 탈이해관계는 권력에 의해 정치화될 수 있다. 게다가 머튼 이후, 실제 과학자 사회의 구체적 사례를 연구한 이들은 다른 주장을 한다. 머튼이 말한 ‘과학자 공동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과학자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껏해야 20세기 초반 선진국의 연구대학에서 부분적으로 발견된 이상적 과학자사회를 무리하게 일반화했다고 본다. 실제 과학자사회에서는 규범에 의해 통제되지 못하고 비밀주의, 자료조작, 특수주의에 입각한 평가 등 일탈적 행위가 만연하기도 했기 때문이다.(앞의 책, 34)



과학자도 사회의 구성원이며, 먹고 사는 문제와 정치적 신념, 권력 관계, 개인적 성향 등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시민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연구와 배경, 지원금의 출처와 지향하는 바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선의의 연구를 지향해야겠지만, 항상 시대의 한계 안에서 그 작업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면, 켄지의 누나처럼 될 수가 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중립이고, 순수하게 연구하고 있어.”라는 장담은 위험하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장, 연구의 지향점, 연구자금의 출처에 대해 철저히 노출하는 게 안전하다. 어떤 연구를 한다는 행위자체가 가능한 여러 다른 연구는 누락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편향이 없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 일반이 아니라, 특정 과학에 대해 물어야 하며, 어떤 과학기술과 함께 갈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사회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일상 지배력이 점점 높아지는 현재 더욱 이러한 통찰이 요구된다. 『20세기 소년』는 선의라고 믿은 과학 연구가 어떻게 ‘괴물’을 낳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줬다. 그리고 누구나 알 듯, 괴물은 만화에만 있지 않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일반] [공지]자게 운영위 현황 및 정치카테고리 관련 안내 드립니다. [28] jjohny=쿠마 25/03/16 16325 18
공지 [정치] [공지] 정치카테고리 운영 규칙을 변경합니다. [허들 적용 완료] [126] 오호 20/12/30 301114 0
공지 [일반] 자유게시판 글 작성시의 표현 사용에 대해 다시 공지드립니다. [16] empty 19/02/25 355421 10
공지 [일반] 통합 규정(2019.11.8. 개정) [2] jjohny=쿠마 19/11/08 358109 4
104121 [일반] [팝송] 알레시아 카라 새 앨범 "Love & Hyperbole" 김치찌개475 25/04/27 475 0
104120 [일반] [독서 에세이] 정치의 종이 되는 생각 없는 과학 (『20세기 소년』) 두괴즐1286 25/04/26 1286 2
104119 [일반] 일본 정부부채는 정말 심각할까? [28] 기다리다4616 25/04/26 4616 4
104118 [일반] 최근 chatGPT와 함께 놀다가 마지막에 나눈 대화 [32] Quantum217467 25/04/25 7467 5
104117 [일반] 미 공군의 A-10 썬더볼트 II는 올해 한국에서 철수합니다 [58] Regentag8509 25/04/25 8509 0
104116 [일반] 트럼프-달러패권 그 뉘앙스은 어떻게 잡는가 [20] Q-tip6438 25/04/25 6438 2
104115 [일반] 아래 간짜장 글을 보고 써보는 글입니다. [16] 덧물5961 25/04/25 5961 0
104114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9 [6] Poe3932 25/04/25 3932 23
104113 [일반] 챗gpt와 함께 읽는 "희랍어시간" [1] 아빠는외계인4146 25/04/24 4146 2
104112 [일반] 숙박앱에서 저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18] 국힙원탑뉴진스8905 25/04/24 8905 3
104111 [일반] (스포일러 포함) 영화 <야당> - 빠르다... 진짜 빠르다!! [22] Anti-MAGE7688 25/04/23 7688 4
104110 [일반] 사학처럼 문학하기: 『눈물을 마시는 새』 시점 보론 [6] meson4680 25/04/23 4680 13
104109 [일반] 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2) - 미완의 꿈, 제무왕 유연 1 [8] 계층방정5411 25/04/23 5411 8
104108 [일반] 트럼프 사실상 경제정책 항복? [100] DpnI15944 25/04/23 15944 7
104107 [일반] 무선 블루투스 송/수신기 사용기 [7] 스물다섯대째뺨6121 25/04/23 6121 3
104106 [일반] 제대로 하는 간짜장은 귀하다. [102] 인민 프로듀서11398 25/04/22 11398 26
104105 [일반] 오늘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56] 승승장구9491 25/04/22 9491 41
104104 [일반] 오랜만에 자작곡 올립니다. [4] 포졸작곡가2458 25/04/22 2458 11
104102 [일반] 최근 1년동안 했던 게임들, 소소하게 평가를 해봅니다(2) [26] 공놀이가뭐라고7245 25/04/21 7245 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