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와 스크롤 압박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오늘날 케이건 드라카의 생애를 총람할 수 있는 호사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의 독자들이 탐색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네 권의 양장본과 그 부록뿐이다. 키탈저 사냥어에 따르면 케이건은 흑사자이고 드라카는 용인데, 그러므로 그의 본명이 무엇이었는지는 가히 알 수 없다. 나가 살육자에 대한 전설이나 옛 아라짓 왕국의 군주들을 기록한 계보에서도 그런 정보는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케이건 드라카라는 남자가 아라짓 왕국의 21대 국왕으로 즉위할 뻔했지만 고사했고, 나가들과의 화합을 위해 바라기를 훔쳐 달아났으나, 결국 나가들에게 아내를 잃고 나가 살육자가 되었다는 것 정도가 단단히 합의되어 있는 사실일 것이다.
다만 케이건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위의 세 가지 사실 사이에는 한 가지 사건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 바라기의 실종으로 인한 아라짓 왕국의 혼란과 나가들의 침공으로 인한 몰락이 그것이다. 케이건은 바로 그때부터 자신이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 살육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나가들이 그의 아내 ‘여름’에게 접근했고, 여름은 나가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그들에게 갔다가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매우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비극으로 끝나는 탓에 몰입하기도 쉽다. 그러나 매혹적인 서사가 으레 그렇듯이, 이런 인식은 기억의 정립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교묘히 재구성된 대안적 역사일 공산이 크다.
물론 케이건 드라카에 대해 가장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케이건 드라카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케이건의 모든 주장이 실체적 진실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자료는 편향을 내재하며, 때로는 편향을 의도하지 않았을 때조차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가들이 정보의 검증을 중시하는 이유이며, 그 검증은 대체로 서로 다른 출처에서 공통된 부분만을 취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이러한 작업이 언제나 성공적일 수는 없고 케이건 드라카의 과거처럼 단서가 소략한 사안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케이건이 무엇을 숨겼고 무엇을 왜곡했는지에 대해서는 이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케이건의 탈주 경위와 그 이유[A]“나는 육친의 마음보다 적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했고 친우에게 줄 것보다 적에게 줄 것을 고민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행동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보다 적들이 내 공격에 대해 보여줄 반응이 더 궁금했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위대한 전사라 말할 때, 그들은 내가 적을 더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구원자라는 찬란한 이름을 선물할 때, 나는 복수심에 찬 약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상실했다. 나 또한 약자였기 때문이다.”
괄하이드와 병사들이 놀란 눈으로 베미온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서 있던 륜은 베미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묘했다. 먼 과거를 바라보는 눈길이었고 즐거웠던 날을 회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약자로 남지 않겠다. 내가 가진 순간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강자가 되리라. 나는 잃지 않아야 했던 것을 찾을 것이다. 내 잃어버린 극을 되찾을 것이다. 이 넓은 세상 어디에 그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나는 세상의 모든 곳을 잇겠다. 그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내가 그를 찾아 달려갈 수 있도록. 이곳, 판사이의 탑, 왕의 방에 남겨두는 이 말은 내 과거에 대한 유언장이다. 이것은 어리석음 때문에 오라비를 잃어야 했던 누이동생의 마지막 말이다.”
(4권 24쪽. 강조는 인용자.)
[B-1]그 나가의 말은 정말 친절하게 들렸습니다. 제가 들었던 그 어떤 목소리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 나가는 말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정말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 슬픈 사태를 해결할 방도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그 나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매한 침묵으로 저를 설득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침묵과 더불어 제시된 손짓의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왕국 아라짓에서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한 그 손짓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 놈들은 인간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가 너무 분명합니다! 예. 간단한, 너무도 직설적인 손짓이었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살육밖에 모르는 누이를 비난하고 그녀의 검을 훔쳐 그녀를 떠났습니다. 제 누이를 떠나는 길에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누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득의양양하여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가들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저 저주받을 아라짓 전사들은 정체성의 수수께끼를 느껴야 할 것이다.
(4권 294-295쪽. 강조는 인용자.)
케이건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나가의 제안에 넘어가 누이인 극연왕을 비난하고 바라기를 훔쳐 떠났다. 인간과 나가 사이의 갈등이 멈추려면 아라짓 전사들의 살육이 중지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바라기가 사라져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탈주 사건은
[A]에서 언급된 극연왕의 기록에서도 드러나므로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한 케이건의 진술은 하나가 더 있다. 그리고 하인샤 대사원에서의 진술은
[B-1]과는 세부 사항이 다소 다르다.
[C-1]“언젠가 나가들은 나에게 어떤 제안을 한 적이 있소. 그 제안 자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나 또한 바라마지 않던 제안이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다행히도 내겐 당장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이 남아 있었소. 나는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소. 그들은 모든 나가의 생명을 걸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보장했소.”
“그렇다면······.”
“그 제안은 속임수였소. 나는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소. 아니, 한 가지는 얻었다고 해야겠군. 내게는 모든 나가의 생명을 좌우할 권리가 생겼소.”
티나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2권 324쪽. 강조는 인용자.)
[B-1]에서 케이건은 자신이
“고매한 침묵”에 의해 설득당했다고 말했다. 반면에
[C-1]에서는 침묵 대신에
“모든 나가의 생명”이라는 설득 수단이 등장한다. 일단 조화시켜 보자면
[B-1]에는 제안의 내용이 나타나 있고,
[C-1]에는 제안의 담보물이 나타나 있으므로 제안의 전체 형태를 복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나가의 생명”은 담보로 내어줄 수 없으며, 강제집행할 수도 없으므로, 실질적으로 아무런 보장도 되지 못한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약속이 존재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는 자가 케이건뿐인 이상, 나가들이
“모든 나가의 생명”을 걸었다는 서사는 나가 살육의 명분으로 훗날에 발명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케이건이 바라기를 훔쳐 탈주한 주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적 신념 때문이며, 나가들이 내건 담보는 부차적이었거나 허구적인 이유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케이건의 탈주 시점과 150년의 평화기[D-1]극연왕 6년, 칼리도에 한 어르신이 출현했다. (···) 도착한 것은 레콘이었다. 레누카라는 이름의 그 레콘은 극연왕이 훗날 4대 경이라 불리워진 건설을 하던 도중 왕의 친구가 된 자였다.
(3권 386-387쪽. 강조는 인용자.)
[D-2]21대 극연왕 (434-512)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극연왕은 이후 78년이라는 아라짓 역사상 가장 긴 기간 동안 왕국을 통치했다. 왕위를 이을 예정이었던 그녀의 오라비가 그 자리를 고사했기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가장 긴 재위 기간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치적으로도 유명하다. 새로이 세력을 키우고 있던 나가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남쪽으로 멀리 몰아내었고······.
(4권 411쪽. 강조는 인용자.)
[E-1]극연왕이 전쟁을 장악한 상태에서 자신의 사업을 벌였던 것에 반해 독서왕과 탐미왕은 자신의 사업에 바빠 전쟁을 무시해 버렸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대확장 전쟁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추풍왕 이전의 백오십여 년만큼 전쟁과 무관했던 시절도 드물다. 바라기는 바로 그런 시기에 사라진 것이다. 독서왕과 탐미왕이 방치해 둔 나가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던 추풍왕에게 그것은 실로 커다란 재난이었다.
(4권 9쪽. 강조는 인용자.)
케이건은 전쟁의 참화에 회의를 느껴 탈주한 것이므로, 탈주의 시점은 극연왕이 재위 초반에 나가들과 전쟁을 벌이던 도중이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A]에 따르면 이 탈주 사건은 극연왕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하여 그녀의 건설 사업이 촉발되었다. 따라서
[D-1]에서 극연왕 6년에 이미 건설 사업이 시작되어 레누카가 극연왕의 친구로 등장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케이건의 탈주 시점은 극연왕 1년(434년)부터 5년(438년) 사이의 어느 시기로 좁혀진다.
케이건의 탈주 이후 전쟁이 얼마나 더 지속되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비록 그가 바라기를 훔쳐 달아났지만, 극연왕은 이미 여러 전투에서 아라짓 전사들을 이끌었으므로 바라기가 없더라도 전쟁을 지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연왕이 오라비의 탈주로 인해 전쟁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D-2]에서 나타나듯 이미
“나가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남쪽으로 멀리 몰아”낸 뒤라면 전쟁이 더 확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E-1]에 따르자면 그 뒤로 150여 년은
“전쟁과 무관했던 시절”이었다. 이 평화는 아무리 늦어도 극연왕 6년(439년)부터는 시작되었을 것이므로, 대략 439년부터 589년까지는 평화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F-1]24대 추풍왕 (583-611)
······탐미왕의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했던 것은 추풍왕 시절에 일어난 나가들의 대공세 때문이기도 하다. 극연왕에 의해 극도로 위축되었던 나가의 세력은 백오십여 년이 지난 후에야 복구되었다. 하지만 다시 되살아나게 되자 나가들은 북부를 향해 무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사람들은 거의 잊고 있었던 적들에 대한 기억을 힘겹게 되새겼지만, 이미 사라진 아라짓 전사는 되살릴 수 없었다. 추풍왕은 나가들을 막아섰던 가장 용맹한 전사들이 없는 상황에서 나가의 대공세를 맞이해야 했다.
(4권 412쪽. 강조는 인용자.)
이 150년의 평화기는
[E-1]에서 발췌된 『왕국의 몰락』과
[F-1]에 인용된 『고대 아라짓 왕국의 계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이다. 케이건의 탈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전쟁이 중지되었으므로, 나가들이 케이건에게 제안한 바는 결과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평할 수 있다.
[B-2]“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라짓 전사들의 혼란을 틈타 나가들의 반격이 아라짓을 거세게 강타했습니다. 바라기를 잃은 제 나라는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케이건은 다시 침묵했다. 그는 이제 아라짓의 무력한 몰락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영웅왕의 검 아래에 이룩되었던 강력한 왕국은 그 검을 잃고 초라하게 시들어갔다.
(4권 295쪽. 강조는 인용자.)
물론 케이건 자신이 심장탑에서 진술한 내용에는 이러한 평화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B-2]의 주장은
[B-1]에서 곧바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 서사대로라면 나가들은 거의 바라기가 실종되자마자 반격을 개시한 것이 된다. 하지만 다른 어떤 자료와도 교차검증되지 않는 이러한 진술을 취신하기란 어렵다. 나가들의 반격은 바라기의 실종 직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150년 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케이건이 사실을 왜곡하여 진술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바로 ‘여름’의 존재이다.
3. 여름의 사망 시점과 케이건의 화신화 시점[G]“어떻게 아라짓의 왕자가 키탈저 사냥꾼이기도 한 거지?”
“누이에게서 도망친 다음 그 분이 자신의 몸을 의탁한 곳이 바로 키탈저 사냥꾼들의 품이기 때문입니다. 키탈저 사냥꾼들은 도망쳐온 흑사자의 자손을 용의 자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분이 아내를 만난 곳도 그곳이었습니다. 아, 용의 자손이라는 것은 키탈저 사냥꾼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모순의 힘을 믿었던 것도 모순이 용의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4권 206쪽. 강조는 인용자.)
[G]에 따르면, 케이건은 탈주 이후에 키탈저 사냥꾼들에게로 가서 결혼을 했다. 그의 배우자는 통상 ‘여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혼을 했다는 것은 케이건 자신도 두 차례의 진술에서 이미 인정한 부분이다.
[C-2]“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모든 것을 잃은 나에게 한 여인이 다가왔소. 그녀를 사랑했소. 그 무엇보다도 더. 그녀는 내 생에 의미를 돌려주었소. 그녀는 내게 생명을 되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소.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주려 했소. 이미 나를 부활시킨 거나 다름없는데도, 그녀는 더 주길 원했던 거요. 나는 그녀가 주려 했던 것의 백분의 일도 주지 못했는데. 결국 그녀는 나가의 제안을 받게 되었소.”
“제안이라고?”
“그렇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제안, 그러나 결국 나를 파멸시키고 말았던 그 제안이 그녀에게 건네어졌던 거요.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소. 두 가지 이유에서지. 첫 번째 이유는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오. 두 번째 이유는 보다 흥미로우면서도······ 참신하지는 않은 거요. 나가들은 그녀에게 모든 나가의 생명을 걸고 그 제안의 사실성을 보장했소.”
티나한의 벼슬이 꼿꼿하게 곤두섰다. 케이건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젖기 시작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소. 그녀는 나에게 말하지 않고 홀로 나가들에게 갔고······, 기다리고 있던 나가들은 그녀를 잡아먹었소. 사려 깊게도 그들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내 눈 앞에서 그녀를 찢었소. 그렇소. 그들은 나를 유인하기 위해 그녀를 유인한 거였소. 그녀의 죄는 나를 사랑했던 것, 그리고 나가를 신뢰했던 것뿐이었소. 그녀는 그 죄가 그렇게 큰 것인 줄 몰랐지.”
티나한은 가슴 한 구석이 무섭도록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케이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그 후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던 권리를 종신으로 연장받게 된 셈이오.”
(2권 324쪽. 강조는 인용자.)
[B-3]“예. 저는 한계선 근처에서 힘없이 어슬렁거리는 나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았습니다. 그것으로써 저는 제 두 번째 장례식을 스스로 주관했습니다. 사랑했던 것을 잃었고, 사랑하고 싶었던 것도 잃었습니다. 나가의 고기가 제 목을 넘어갈 때 저는 제 속에서 울려퍼지는 단말마를 들었습니다. 처음 몇 번 동안은 그 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속의 무엇이 완전히 죽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모의 눈에 은루가 고였다. 고통스러운 추억에 이르른 케이건은 빠르게 말했다.
“제 고통을 아는 자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제 아내, 왕국의 도둑을 받아들인 그녀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별비의 가슴을 헤치고 그 간을 꺼내어 씹었던 그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라기의 완전한 회수와 골칫덩이가 된 배신자를 제거하길 원했던 나가들은 저를 추적하는 대신 제 아내를 추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아내는 그 비늘 덮인 차가운 동물들을 사랑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제가 한 때 그것을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갔습니다. 제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를 옛날의 케이건으로 돌려놓으려 했습니다. 나가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자로. 기다리던 나가들은 제 아내를 붙잡아 찢어 죽였습니다.”
(4권 296-297쪽. 강조는 인용자.)
이때
[C-2]에서 케이건은 결혼의 시점을 그가
“모든 것을 잃”은 뒤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즉 왕국의 몰락 이후로 놓고 있다. 한편
[B-3]에서는 결혼의 시점이 상대적으로 불명확하다. 다만 두 진술 모두에서 케이건은 아라짓 왕국이 몰락한 뒤에 아내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E-1]과
[F-1]을 다시 상기한다면, 이러한 일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케이건이 왕국의 몰락을 목격한 이후 아내를 잃기 위해서는 150년 이상을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실의 선후관계를 반대로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왕국의 몰락이 150년 일찍 도래하는 것은 불가능한 반면에, 여름의 죽음이 150년 일찍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으로서 150년을 생존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지만, 만일 화신이 된 이후라면 150년을 생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케이건이 탈주 이후 150년을 더 살아 왕국의 몰락에 상심할 수 있었다면, 그는 먼저 여름의 죽음에 상심하여 화신이 되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여름의 죽음은 케이건의 탈주한 뒤로부터 평화기가 도래하기 이전까지의 어느 시점에 발생했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B-3]에서 케이건 자신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나가들은
“바라기의 완전한 회수”를 위해 케이건을 제거하기를 원했다. 바라기의 회수를 원했다는 점에서 이때의 나가들은 분명 150년 후의 나가들이 아닌 극연왕 시기의 나가들이었을 것이다.
[B-3]에 따르면 나가들이 택한 방법은 케이건의 아내를 추적하는 것이었으며,
[C-2]에 따르면 여름은 케이건이 받은 것과 동일한 제안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두 진술 모두에서 케이건은 여름이 남편이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가들에게로 갔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진술은 묘사의 시점을 439년 이전으로 조정해 읽을 경우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를 고려했을 때, 여름은 케이건이 아직 이상주의자였을 시점에 그와 결혼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그녀가 케이건의 사상에 공감하지 않았더라면 선뜻 나가를 만나러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들은 여름을 만난 직후에 그녀를 붙잡아 케이건을 유인하고자 했고, 실제로 케이건이 도착하자 그의 눈앞에서 여름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H-1]“사과할 방법을 몰라도 화내지 않겠다고 말했어.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 부인을 뜯어먹은 것에 대해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
“서른 명이었어. 서른 명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뜯어먹었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더군. 가까스로 그녀들을 물리치고 나서 아내의 유해를 돌려받았지.”
(2권 237쪽. 강조는 인용자.)
[H-2]케이건은 모든 것을 기억했다. 나무에 묶인 채 울부짖던 그녀, 제발 오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외치던 목소리, 격노처럼 나부끼던 잎사귀들, 미친 듯이 달려들던 나가 여인들. 갑자기 끊어진 비명, 초록의 대지 위로 흘러내리던 빨간 피, 그리고, 끔찍했던 격투. 쓰러진 나가 여인들의 가슴을 가르고 갈빗대를 들어내고 그 위장을 찢을 때의 소름끼치는 느낌들. 케이건은 모조리 기억했다.
(2권 239쪽. 강조는 인용자.)
[H-1]에 따르면 여름은 단순히 살해되는 것을 넘어 뜯어먹혔으며, 여기에 참여한 나가는 30명에 달했다.
[H-2]에 의하면 이 당시의 장면은 케이건에게 유달리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데, 이는 여름의 죽음이 그에게 커다란 정신적 외상(trauma)으로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나가와의 화합을 위해 바라기를 훔쳐 달아난 직후였던 당시의 케이건에게 이러한 배신은 더할 나위 없이 충격적인 사태였을 것이며, 따라서 이때의 경험이 즉각적으로 화신화(化神化)를 촉발하는 것은 충격의 정도로 보아 있음직한 일이다. 그리고
[H-1]에서 케이건이
“서른 명”의 나가와 싸워 이겼다는 사실은 그가 화신의 힘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종합하자면 케이건은 바라기를 훔쳐 탈주한 직후 키탈저에서 여름과 결혼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나가들은 바라기를 탈취하고자 여름을 납치해 케이건을 유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름의 처참한 죽음은 케이건의 화신화를 촉발하였고, 이에 나가들은 바라기를 탈취하지 못하고 몰살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B-3]에서 언급된 한계선에서의 나가 살육은 여름의 죽음 이후 케이건이 나가 전체에게 복수를 시작한 뒤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복수행은 이후 150년 이상 계속되었다고 여겨지며, 케이건이 150년 동안 생존한 까닭 역시 복수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화신의 힘을 사용해 노화를 지연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4. 왕국의 몰락 원인과 바라기의 실종[I]“대족장이 한 이야기는 발케네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발케네에는 영웅왕의 왕국 아라짓을 훔친 도둑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요.”
“그게 무슨 말이야? 영웅왕의 왕국은 나가들이 점령한 거잖아.”
“음. 발케네 사람들은 어떤 도둑이 나가들의 의뢰를 받고 영웅왕의 왕국을 훔쳤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2권 305-306쪽. 강조는 인용자.)
[H-3]어떻게 된 건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도난당했다면 어딘가에서 나타나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어. 게다가 누가 이것을 훔치겠느냐. 지금은 내 손에 들어와 있지만. 역사가들은 그것을 ‘바라기의 실종’이라 부르며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한다. 아라짓 전사들은 거듭되는 전쟁 때문에 결국 쓰러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왕국은 나가들을 상대로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해서 멸망한 것일 수도 있고. 나가들이 대확장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소드락과 심장 적출법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설명하기 위해선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바라기의 실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2권 58쪽. 강조는 인용자.)
물론 앞서
[B-2]에서 케이건이 주장한 왕국의 몰락 원인은 다른 자료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I]에서 언급되는 발케네의 전승에 따르면 아라짓 왕국은 나가들의 의뢰를 받은
“어떤 도둑”에 의해 몰락하였다. 또한
[H-3]에서 소개되는 역사가들의 견해 역시
“바라기의 실종”을 왕국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F-1]을 고려한다면 이는 바라기의 실종이 아라짓 전사의 실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며, 이 점에서 케이건의 탈주는 왕국의 몰락에 일정한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 된다.
케이건이 심장탑에서 진술한 서사에 따르자면 이러한 설명은 매우 매끄럽다. 반면에, 케이건의 화신화가 439년 이전에 여름의 죽음을 겪으며 일어났다고 보는 경우에는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케이건이 이미 극연왕 치세에 나가들의 제안이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는 왜 누이에게 바라기를 돌려줌으로써 나가들의 음모를 무위로 돌리지 않았는가? 정합적 해석에서 커다란 난관이 될 수도 있었던 이 질문은 다행히도 케이건이 심장탑에서 극연왕에 대해 회상한 덕분에 적절히 답변될 수 있다.
[J]하텐그라쥬의 심장탑, 혹은 심장탑의 잔해 위에 우뚝 선 채, 케이건은 극연왕을 떠올렸다.
재위 전반기에는 나가들에게 맹공을 퍼부어 대확장 전쟁에서 나가들이 거둔 성과의 대부분을 무효화시켰고, 후반기에는 그런 자신을 까맣게 잊은 채 북부의 모든 극을 잇는 것에 평생을 바쳤던 왕.
케이건은 그의 누이를 생각했다.
케이건이 떠난 이후 극연왕은 세상의 모든 극을 이으려 했다. 그녀는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의 격언을 듣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길은 방랑자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방랑자를 따라갈 수는 없다. 모든 길이 누이에게로 통했지만 케이건은 누이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지은 죄가 너무도 가증스러웠기에.
(4권 208쪽. 강조는 인용자.)
[J]에 따르면, 케이건은 극연왕의 건설 사업으로 여러 도로가 개통된 시점에 이미
“그가 지은 죄가 너무도 가증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여름의 죽음이 439년 이전에 일어났고, 이로 인해 케이건이 이상주의를 버리고 나가를 맹렬히 증오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로 인해 케이건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지나친 죄의식으로 인해 누이에게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처벌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살펴본
[A]에 따르면 극연왕은 사실상 케이건을 용서하고 그의 귀환을 바랐다고 여겨지지만, 정작 케이건 자신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케이건의 심리를 고려하더라도, 극연왕을 만나지 않는 것과 바라기를 돌려주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임이 분명하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바라기를 은밀히 돌려주거나, 대리인을 통해 돌려주는 등의 방법으로 속죄와 처벌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름의 죽음으로 복수귀가 된 당시의 케이건에게 이러한 냉철한 사고는 아마도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심장탑에서 케이건이 왕국의 몰락을 두고 스스로를 책망한 까닭은 이 지점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5. 왕국의 몰락 기간과 케이건의 죄의식 강화[F-2]31대 권능왕 (689-701)
······이 참혹했던 시절, 왕국의 사람들에게는 단 두 가지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 다가오는 만민회의와 왕국의 북부를 지키고 있던 용장 후사린 규리하가 두 희망이었다. ······50년 만에 개최된 만민회의는 어이없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후사린 규리하가 왕국을 위해 목숨처럼 지키던 명예를 버리고 변경백령을 떠났지만, 왕국의 몰락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4권 412-413쪽. 강조는 인용자.)
앞서 살펴본
[F-1]과 위에 인용된
[F-2]에 따르면, 아라짓 왕국의 몰락은 추풍왕부터 권능왕까지 1백 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나가들의 반격이 시작되기까지도 150년이 걸렸고, 그것이 완전히 성공하기까지는 또 100년 이상이 소요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심장탑에서 케이건이 진술한 내용에서 이 기간의 시간 관념이 대단히 모호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B-4]“믿기 어려웠습니다. 살육귀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이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국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증오의 기억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깊은 마음속으로는 제가 나가에게 속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쓰러져가는 조국의 이름은 제 머릿속을 불태우는 악몽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저는 나가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사랑하는 조국이 멸망했습니다. 아라짓의 가장 가증스러운 배신자. 왕국을 훔친 도둑. 그것이 저였습니다. 결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조국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전사의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영웅왕의 나라는 병자처럼 볼품없이 말라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케이건의 얼굴에 갑자기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손은 떨림을 멈춘 채 서서히 가슴으로 올라왔다. 사모는 그 움직임을 불안 속에서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어깨 뒤로 손을 넘겨 바라기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가들을 잡아먹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받아들인 키탈저 사냥꾼들의 방식이었습니다. 용의 자손인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4권 295-296쪽. 강조는 인용자.)
[B-4]에서 케이건의 태도는 앞서 살펴본
[J]와 언뜻 비슷해 보인다. 죄의식 때문에
“결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가 지속된 극연왕 치세에 미복귀했던 것과 전쟁이 재개된 추풍왕 이후의 시기에 미복귀했던 것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 극연왕 시기에는 최소한 케이건의 부재가 왕국에 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추풍왕 이후의 시기에는 케이건이 미복귀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왕국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케이건이
“조국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면 이는 무책임할 뿐 아니라 스스로의 죄를 증가시키는 행동이며, 따라서 해당 진술의 사실성은 매우 의심스럽다. 케이건이 정말 자신의 탈주로 인해 왕국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늦게라도 왕국에 바라기를 돌려줌으로써 나가에 맞설 힘을 더해주는 것이 올바른 태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만일 케이건이 ‘왕국의 몰락을 촉발시킨 죗값을 치르기 위해 왕국의 몰락을 가속화했다’고 본다면, 케이건에게 왕국의 몰락이란 절대적인 저지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처벌하기 위한 유용한 명분에 불과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케이건이 통상적인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고 왕족으로서 왕국의 멸망을 막고자 했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면,
[B-4]의 서사를 취신하기란 어렵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진술은 케이건 자신이 아라짓 왕국의 몰락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왕국의 몰락을 인지했다면 케이건이 100년 동안이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은 케이건이 아라짓 왕국의 몰락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키탈저로 탈주했고 또 한계선에서 나가 살육에 매진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가능성은 실제로 존재한다.
[K]수십 판의 윷놀이에서 전패한 아라짓 전사가 마침내 격노하여 키탈저 사냥꾼에게 외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왕의 은혜에 감사하라! 너희 발칙한 놈들이 지금껏 멸망하지 않은 것은 왕께서 아직 그것을 내게 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키탈저 사냥꾼은 윷가락을 주워모아 아라짓 전사에게 건네며 태연히 말했다.
“왕을 사랑하나 본데, 그렇다면 내게 감사하게. 자네 왕이 지금껏 살아있는 건 내가 아직 그를 사냥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아라짓 전사는 폭소를 터뜨린 다음 다시 윷가락을 던졌다. 그리고 또다시 패했다.
(1권 334쪽. 강조는 인용자.)
[E-2]이토록 암울했던 시절, 왕에게 도움이 되고자 찾아온 손길이 있었으니 저 용맹한 키탈저 사냥꾼들의 만민 회의 참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성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저 권능왕은 감히 이 용맹한 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했으니, 키탈저 사냥꾼들은 그 모욕에 대꾸하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이 만민 회의장을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1권 446쪽. 강조는 인용자.)
[K]에 따르면 키탈저는 아라짓 왕국의 통제가 잘 미치지 않는 지역처럼 묘사되며,
[E-2]에서도 나타나듯 권능왕 치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왕국을 돕기 위해 만민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는 키탈저 사냥꾼들이 왕국의 위기에 대한 소식을 상당히 늦게 접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키탈저 사냥꾼들은 권능왕에게 모욕을 받자 조력을 취소하고 키탈저로 돌아가 버렸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당시 만민회의에 참석한 키탈저 사냥꾼 무리에는 케이건이 없었을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왕국의 몰락에 대한 정보는 키탈저에도 늦게 도착했고, 한계선에서 주로 활동하던 케이건에게는 더더욱 늦게 도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케이건이 왕국이 몰락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나가들을 잡아먹을 수는 있었”다고 주장하는
[B-4]의 진술은 사실상 교묘한 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케이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나가들만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나가들을 잡아먹느라 왕국의 몰락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케이건이
“저 때문에 쓰러져가는 조국”,
“저 때문에 사랑하는 조국이 멸망했습니다”,
“아라짓의 가장 가증스러운 배신자” 등의 표현으로 스스로를 질타한 까닭은 바로 이 관점에서 독해할 때 명확히 이해된다. 그리고 나가를 살육하느라 조국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케이건의 죄의식을 더욱 강화했다고 여겨진다.
만일 이러한 해석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왜 케이건이 ‘여름의 죽음’과 ‘왕국의 멸망’이라는 두 비극의 선후관계를 바꾸어 진술했느냐는 점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케이건 자신이 독백한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6. 케이건의 기억 왜곡과 과거의 편향적 종합[L-1]“그 도깨비에게 괜한 말을 했군.”
이름이 뭐더라?
케이건은 도깨비와 레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
“케이건, 이 얼간이 자식아.”
“케이건, 이 멍청한 녀석아.”
“케이건······.”
내 이름이 뭐더라.
(1권 368-369쪽. 강조는 인용자.)
[L-2]도깨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비형 스라블이야.’ 기억이 마구 떠올라 케이건은 현기증을 느꼈다. ‘나늬라는 이름의 딱정벌레를 가지고 있는.’ 케이건은 비틀거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오, 이런 빌어먹을. 잊어먹지 않았던 건가?’ 케이건은 겁에 질렸다. ‘설마 다른 것들도?’
(1권 370쪽. 강조는 인용자.)
[M]전설처럼 이야기 하는 법. 자신의 살아 있는 추억을 터무니없는 옛이야기로 만드는 법. 장식을 몇 개 달고, 왜곡을 덧붙이고, 뚜렷한 기억일수록 모호하게 표현한다. 고어체를 이용할 대는 주의깊게. 그 고어체는 ‘옛날에 쓰였던 말’이 아니라 ‘옛날 이야기를 할 때 쓰이는 말’을 의미한다. 케이건은 점점 자신이 무정물로 바뀌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의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지게 된 경험의 총합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것을 왜곡한다.
(2권 508쪽. 강조는 인용자.)
[L-1]과
[L-2] 및
[M]에 따르면, 케이건은 약 1천 년에 달하는 생애를 살아왔기 때문에 모든 기억을 온전히 떠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때때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때도 있고, 일부러 잊어버릴 때도 있으며, 오래된 경험은 왜곡하여 기억하기도 한다. 특히
[M]에서 케이건이 스스로의 경험을 왜곡하고 있다는 정보가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케이건의 기억이 편향적으로 재종합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기억의 왜곡은 일종의 방어기제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까닭은 실제 사실대로 ‘여름의 죽음’ 이후에 ‘왕국의 멸망’이 일어났다고 인정할 경우 왕국의 멸망에 대한 케이건의 책임이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왕국의 멸망’이 ‘여름의 죽음’으로부터 약 250년 뒤에 발생한다면, 이것을 나가의 배신 탓으로 돌리기란 어렵다. 하지만 만일 사건의 순서를 반대로 기억한다면, ‘왕국의 멸망’은 나가들의 배신으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되므로 배신과 멸망 사이에 250년의 간극이 있다는 점은 희석된다. 그러므로 케이건의 입장에서는 ‘왕국의 멸망’ 이후에 ‘여름의 죽음’이 일어났다고 기억하는 편이 더 심적으로 편안했으리라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는 케이건의 죄책감을 일부 경감시키는 데에만 유용했을 뿐, 아라짓의 비사(秘史)를 정합성 있게 규명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케이건 드라카의 실제 행적은 케이건의 진술이 유발하는 혼동을 배격한 채로, 신뢰 가능한 자료들에 의지하여 엄밀하게 재구성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7. 케이건 드라카 행적의 재구성[D-2]에 따르면, 케이건은 434년에 아라짓 왕국의 21대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지만, 누이에게 왕위를 양도하였다.
[A]와
[B-1]에 따르면, 케이건은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나가의 제안에 따라 바라기를 훔쳐 탈주하였다.
[G]에 따르면, 케이건이 탈주하여 의탁한 곳은 키탈저였으며, 아내를 만난 곳도 그곳이었다.
[B-3]와
[C-2]에 따르면, 나가들은 바라기를 탈취하기 위해 케이건의 아내를 납치하여 케이건을 유인하였다.
[H-1]에 따르면, 케이건은 아내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30명의 나가와 싸워 이겼다.
(註: 이는 그가 화신이 되었기 때문이다.)[A]와
[D-1]에 따르면, 케이건의 탈주로 심경의 변화를 겪은 극연왕은 최소한 439년부터는 전쟁 대신 건설에 몰두하였다.
[E-1]과
[F-1]에 따르면, 극연왕이 선사한 평화기는 약 15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는 대략 439년부터 589년까지의 기간이다.
[B-4]와
[C-2]를 참고하면, 케이건은 아내의 복수를 위해 한계선 근처에서 나가를 잡아먹는 활동을 계속했다.
[J]에 따르면, 케이건은 스스로를 처벌하기 위해 극연왕의 치세 동안 누이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E-1]에 따르면, 추풍왕의 치세에 이르러 바라기의 실종은 아라짓 전사의 소멸을 야기하였다.
[F-1]과
[F-2]에 따르면, 150년의 평화기 이후 아라짓 왕국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가의 공격을 받으며 점차 몰락하였다.
[I]와
[H-3]에 따르면, 바라기의 실종은 아라짓 왕국의 몰락에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K]와
[E-2]에 따르면, 독립성이 강했던 키탈저 사냥꾼들은 권능왕 치세에야 왕국을 도우려 시도했다가 그마저도 철회하였다.
[B-4]에 따르면, 케이건은 왕국이 몰락하는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註: 이는 그가 소식을 늦게 들었기 때문이다.)[L-1]과
[L-2] 및
[M]을 참고하면, 케이건은 종종 기억을 혼동하며 기억을 왜곡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케이건은 434년에 왕위를 고사한 이후 전쟁에 회의감을 느꼈고, 이 때문에 나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바라기를 훔쳐 키탈저로 탈주하였다. 키탈저에서 여름과 결혼한 케이건은 잠시 행복한 생활을 누렸지만, 곧 나가들이 바라기를 탈취하기 위해 여름을 납치하여 케이건을 유인하였다. 나가들이 케이건의 눈앞에서 여름을 죽이자 케이건은 그 충격으로 화신이 되어 30명의 나가와 싸워 이겼으며, 이로써 바라기를 탈취하려던 나가들의 음모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케이건은 나가를 증오하게 되어 이후 한계선에서 나가를 잡아먹는 활동을 벌였다.
한편 케이건의 탈주로 심경의 변화를 겪은 극연왕은 439년 이전에 전쟁을 마무리하고, 그 뒤로는 건설 사업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케이건은 스스로를 처벌하기 위해 누이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439년부터 589년경까지 약 150년은 평화기였으며, 이 기간 동안 케이건은 무의식적으로 화신의 힘을 사용하여 노화를 지연시키며 계속 나가를 살육하였다. 이 때문에 바라기의 실종이 지속되자, 아라짓 전사의 명맥은 추풍왕 치세 이전에 끊어지고 말았다. 평화기가 끝나자 나가들은 반격을 개시하여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라짓 왕국을 점차 몰락시켰다.
왕국이 몰락하는 동안에도 케이건은 한계선에서 나가를 잡아먹는 활동을 계속했다. 키탈저는 왕국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키탈저 사냥꾼들은 권능왕 시대가 되어서야 왕국을 도우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이때도 케이건에게는 소식이 닿지 않았으며, 키탈저 사냥꾼들은 권능왕의 태도에 실망하여 조력을 취소하였다. 결국 케이건은 왕국이 멸망한 뒤에야 이 사실을 인지하고 크게 상심하여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리고 이 죄책감을 경감시키려는 그의 무의식은 기억을 왜곡하여 왕국의 멸망이 여름의 죽음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서사를 발명해냈다.
현재와 같은 환경에서는, 이 정도의 서술이 케이건 드라카의 비사(秘史)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