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2/10/01 00:17:55 |
Name |
네로울프 |
Subject |
[100% 진짜 잡담] 생일 |
"할매요. 저녁은 비안물 아재 집에서 먹고 올낍니더. 벌써 1시네. 갔다 오께요."
벌써 스물을 넘었나 싶던 첫손자 진성이 놈은 어느새 장가를 간다는 말이 오가더니만 요즘은 툭하면 신부될 처녀가 사는 비안물 깨로 마실을 나간다. 마루에 걸려있는 동그란 벽시계를 보며 호들갑을 떨며 나가는 진성이 덕에 점순 할매는 살픗 들었던 낮잠이 휙 달아나 버렸다. 저 놈의 시계라는 것은 동그란게 안에서 뾰족한 막대기가 아까는 아래춤에 있다 지금은 윗춤에 있는 것이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젊은 애들이 그걸 보고 아까는 몇시네, 지금은 또 몇시네 하는 걸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 점순 할매는 오롯이 보고 있으면 뭔가 좀 알 수 있을까 싶어 시계안의 막대기를 주의를 기울여 쳐다보았지만 금방 눈이 침침해지며 머리가 어지러운게 일없다 싶어 그만 포기하고 만다. 오늘은 아랫 골목에 성만이 처자가 첫 아를 낳겠다 싶다던데 어찌됐는가 모르겠네 하는 생각을 하며 점순 할매는 다시 슬며시 잠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동백에 부잣집 딸이라더만, 살림도 서툴고 글치 싶더만 인자 아도 낳고. 뭐 글체 사는 게. 하다보면 손도 늘고......' 살랑한 바람을 뒤따라 엷은 가을 햇살이 무릎 위를 기어가는 것이 입끝에 흡족한 자욱을 남기는 것을 느끼며 점순 할매는 살짝
잠고개를 넘어갔다.
"할매요! 할매요! 안계시나? 점순 할매요?"
쟁쟁거리며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점순 할매는 입맛을 다시며 잠고개를 다시 되짚어 나왔다. 살짝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평소 살갑게 구는 진하댁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얼굴에 편안한 웃음을 넘기며 점순 할매는 대답을 했다.
"와? 내 여깄다. 우얀 일이고?"
"아이고 할매요. 클났심더. 아가 숨을 안쉰다 아이가. 우짜노."
"뭔말이고? 무슨 아가 숨을 안쉬?"
"성마이 새댁 말임더. 막 아 나왔는데 글쎄 숨을 안쉰다이까네. 그래서 내가 할매 데리러 왔다 아인교. 아이고." "글나! 어여 가보자."
아랫 골목으로 길을 꺽어들며 점순 할매는 아가 나올 것 같으면 어여 안부르고 뭐했냐고 진하댁에게 타박을 넣었다. 이천리 아랫 동네 애들은 10여년 전부터 전부 점순 할매가 받아왔었다. 따로 배운 것은 없지만 오랜 세월 애가 나는 것을 여럿 보고 또 돌보다보니 이젠 노련한 산파가 된 점순 할매였다. 마당에 들어서자 새댁 친정에서 온 동기간들인 듯 한 사람들이 괜히 이리저리 부산만 떨며 어쩔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점순 할매를 보자 마치 어둔 산길에서 불빛이라도 만난 듯한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마루 넘어 방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마루 쪽으로 오르려던 점순 할매의 눈에 마당 한켠에 텃밭을 일구어 심은 배추가 제법 살이 실하게 오른 것이 들어왔다. '곱기만 한 줄 알았드만은 이제 제법 살림이 늘긴 늘었네.'하는 생각을 뒤로 하고 점순 할매는 조그만 장지문을 열어 젖혔다. 방문을 꼭꼭 닫아 놓아 훤한 대낮인데도 엷은 장지문 창호지를 힘겹게 뚫고 들어오는 빛뿐이어서 방금까지 밖에 있던 점순 할매의 눈엔 방이 어둑하게 보였다. 고르게 폈을 이부자린 듯 싶은데 진통 끝인지라 산란스럽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구겨진 곳 위에 땀을 함빡 쏟은 새댁이 누워있었다. 땀이 송글한 이마 위엔 갈래진 머리칼이 몇가닥 곁붙어 있는 것이 참 곱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점순 할매는 걱정스러운 듯이 옆으로 향한 새댁의 눈을 따라 강보에 싸인 아기로 눈길이 옮아갔다.
이불 깃을 열어 젖히니 아기 몸은 마치 온통 두드려 맞아서 멍이 든 듯 온 몸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조그만 코끝에 검지 손가락을 들이 대보아도 아기는 숨쉬는 기색이 없었다. 점순 할매는 두 손의 소매를 걷고 발끝에서 부터 아기의 몸을 주물러 들어가며 뒤따라 들어온 진하댁에게 물었다.
"얼마나 됐노? "
"채 10분도 안됐을 검더."
점순 할매는 무심결 고개를 끄덕이며 아기의 손끝을 주물러 어깨위로 올라갔다. 오랜 경험 탓이었는 지 점순 할매는 별달리 마음에 조급함이 몰려오지 않았다. 손바닥에 닿는 보드라운 아기의 살갗에 문득 잔뜩 거칠어진 자신의 피부를 되느끼며 점순 할매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아기의 몸을 감싸올리며 잠시 마추친 새댁의 눈에 점순 할매는 엷게 웃음을 보태주었다.
"자 뒤집어서 발목 꼭 잡고 있어라."
옆에서 몸을 굼실대며 계속 아이고를 대뇌던 정이 헤픈 진하댁은 그 말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아기를 받아 양발목을 잡고 거꾸로 매달듯이 들어올렸다. 무릎을 세우며 자세를 잡던 점순 할매는 장짓문 사이로 몰래 스며 들어온 한줄기 이마를 스쳐가는 바람에 후덥지근 하던 방안의 기운이 몰아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점순 할매는 저 마저도 숨을 멈춘 채 잔뜩 긴장한 자세로 아기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진하댁의 모습에 잠시 웃음을 머금으며 아기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힘껏 후려쳤다. 어릴 때부터 작지만 무지 맵다는 소리를 들어오던 손이었다.
"앙........"
순간 방안의 정적과 흐릿한 어둠을 한꺼번에 걷어내며 아기의 울음 소리가 활개짓 하듯 온 방안을 가득 메웠다. 10여년을 종종 들어오는 소리였지만 아기의 첫 울음 소리엔 점순 할매도 항상 마음이 두근거리곤 했다. 이번 역시도 그랬다. 점순 할매는 왠지 얼굴에 홍조가 깃드는 듯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젠 굻은 고랑을 인 얼굴이라 남에겐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에 슬며시 입맛을 다셨다. 강보에 다시 내려진 아기는 어느새 몸 전체에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놀란 듯, 그리고 안심한 듯 묘한 표정이 새댁의 얼굴을 지나가는 것을 보며 점순 할매는 강보의 깃을 여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다시 아이고를 되뇌는 진하댁에게 땀에 절은 이부자리와 새댁의 옷을 갈아주라 당부하고 장지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그러나 문득 붙잡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진하댁에게 물었다.
"몇시고?"
점순 할매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를 본 진하댁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1시 45분이네예. 10분 지났으니까 야는 1시 35분에 태어난 거네예. 70년 음력 팔월 스물 나흗날 낮1시 35분."
제 애를 낳은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좋아하는 진하댁을 보며 점순 할매는 '니도 아직 젊네'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려 마루로 몸을 빼내었다. 마루 앞에는 새댁의 동기간들이 점순 할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드가 보소. 고추네. 아 아버지는 회사갔나?"
우르르 몰려들어가는 사람들을 뒤로 하며 점순 할매는 물이나 제대로 끓이고 있나 싶어 부엌으로 들어가다 고개를 갸웃했다.
'1시 35분에서 10분 지나면 1시 45분이라.'
이내 머리가 복잡해진 점순 할매는 아무래도 종내 시계 보는 법은 못배우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닥이 깊은 부엌에선 언제부터인지 커다란 솥이 잔뜩 김을 뿜으며 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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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께 감사하고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나를 받아주신 점순 할매(사실 이름은 모른다. 그냥 지어낸 이름이지만 하여튼 )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할매요. 덕분에 어느새 서른 셋 먹을 때까지 잘 살고 있심더. 고맙심더."
................zz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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