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by Che Guevara
저번 주 주말 거의 5년만에 모교였던 D 고등학교에 갈 일이 있었다. 졸업한지 8년이 넘어 고등학교의 위치 조차 정확히 기억 할 수 없었던 나에게 이번 방문은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여로였다.
고등학교 시절 몸담았던 교지가 창립 15주년을 맞이하면서 기념으로 다 함께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에 개인적으로는 감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문 모임이 그렇듯이 참가하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그녀'가 지금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에 관심이 가게된다. 한 마디로 잿밥에 관심이 많다고나 할까,, 나 역시도 그런 호기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 도착해서 좌우를 두리번거렸을 때는 동기들의 모습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오기로 약속했던 그 놈과 그녀는 오지 않았고, 얄미운 어떤 녀석만 내 앞에 앉아서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괜한 기대를 가졌던지라 순간 기분이 우울해지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 사귀었던 그녀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는데, 그녀는 연락은 됐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T.T)
동문 모임이 다 그렇듯이, 오가는 이야기는 뻔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떻고, 미래가 어떻고, 옛날의 누구누구가 어떻게 됐고 등등.. 체면을 벗어던지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기에 바쁘다.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지라 다음에 사석에서 제대로 만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연거푸 음료수를 입에 들이부었다. (애들이 있는 관계로 술자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이 더욱 원통한 일이었다.)
지루한 얘기 속에 나의 시선은 조금씩 젊은 사람들에게로 옮아 갔고 pgr21에서도 가끔 보이는 80년대 후반 세대들과의 감격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가장 크게 놀란 것은 86년생이 고등학생이란 것이었다. 나와는 10년이 차이나는데, 그들이 고등학생이란 것을 보고 새삼 나이가 먹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나름대로 젊은이들의 마인드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감각이 다른 걸 어쩌랴,, 학교 복도에서 남들 다보는 데에서 키스하는 것도 일상이라고 말하는 그 친구들을 보면서 다시금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픈 충동이 일기도 했다. 이것이 세대 차이인가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나는 그 공간에서는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이가 먹은 나에게도 비장의 무기는 있다.
그것은 바로 '스타크래프트'
나이와 세대를 초월하는 한국의 최고의 인기물,, 나이가 많은 나를 부담스러워 하는 친구들에게 숨통을 트이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입담거리였다.
'임요환' 선수를 좋아한다는 소녀와 박정석 선수를 좋아한다는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화제거리는 풍성해졌고, 김동수 선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에게 임 선수의 팬이라는 그녀는 작년 스카이배때의 악몽을 잊을 수 없다는 말까지 하더라.
그리고, 그 여학생의 옆에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는 고1짜리 어린 청년이 있었다.
"선배님,, 전 진짜 프로게이머가 될 거에요. 두고 보시라고요."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소개하기를 게임아이 1700을 오가는 테란 고수라고 하더라.. 손빠르기가 엄청나서 친구 중의 한명이 '마우스 오브 조루'라고 별명을 붙였다고 하는데, 조루가 무슨 뜻인지 알고나 붙였는지...
문제는 그 시점에서 그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가에 있었다.
이 친구에게 게임아이 1700으로는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은 조금 무리라는 일반론을 펴야 하는 건지,,
조금만 더 연습해서 2000점으로 올리고 프로무대에 데뷔하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명문 클랜에 들어가 실력을 닦으면 꿈이 현실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참 고민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우기 그 친구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사실처럼 믿는 것 같았다.
'선배님, 프로게이머들이 1년에 3000은 번다면서요, 그럼,, 인생 펴는 거 아니에여?"
순간 고민에 빠진다..
'무슨 인생이 돗자리냐, 펴지게... " 물론 이런 생각은 안했고,,
'플게머중 그렇게 버는 것은 정말 극소수이고, 상당 수의 게이머들은 눈물의 라면을 먹으면서 게임방을 전전하는 힘겨운 생활을 한단다." 고 말해야 할 것인지.
"임요환 선수는 1억 5천을 벌고, CF에 영화출현도 한다더라."를 말해야 하는 건지..
하여튼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는 그 친구에게 '리얼리스트'로서 현실을 알려주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큰 꿈을 꿀 수 있게 바람을 넣어야 하는 건지 고민하다가 아무런 얘기도 못해주고 헤어지고 말았다.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후배들에게 큰 소리를 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학생 시절 선배된 입장에서는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살아야 한다'고 큰 소리를 쳤었는데, 왜이리 소심해졌는지.. 변화한 내 모습에 속상하기까지 했다.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청년들이여, 자신을 갖고 꿈을 향해 전진하라!!"
다시 한번 힘차게 고함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