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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6/26 11:07:25
Name 윤여광
Subject Fallen Road. Part 1 -1장 1화- [-마녀의 안내-]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화.
-마녀의 안내-

#.
“좀 쉬었다 가자고.”

  징징대는 건 언제나 내 쪽이 먼저다. 나보다 한참을 앞서가는 저 무식한 체력바보는 내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었는지 그 빠른 걸음을 늦출 생각을 않는다.

“아 몰라. 안 가. 혼자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그 놈 참…….”

  막무가내로 나무 그루터기에 주저앉는 나를 보고서야 발걸음을 멈춘 그는 천천히 내가 앉은 곳으로 내려왔다. 있는 힘을 다해 천천히 오르는 오르막길과는 달리 터벅터벅 거칠게 아래로 내려오는 그의 모습은 마치 얼마 걷지도 않고서 뭘 그렇게 짜증이냐며 투덜대는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얼마 걷지 않은 건 아니다. 우리는 지난 밤 마땅히 노숙할 곳을 찾지 못해 조금만 더 걸으면 마을이 나올 거라는 엉터리 지도만을 믿고 밤새 걸음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 바보 같은 믿음을 져버리지 못하고 계속 걷다 걷다 또 다시 해가 져버린 이 와중에도 길을 계속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따금씩 보이는 표지판은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 칼리스Karlis라는 산골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표시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바보 같은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밤새 재촉한 걸음에도 마을은커녕 인기척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험한 산길만이 계속됐고 참다못한 내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지금껏 계속해온 여행길 내내 그랬듯.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가 결국 잠자리가 되곤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형은 날 강제로 일으켜 세우진 않았으니까. 지도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위치한 이 산은 인케이닝Inkeining. 국경에서 대륙 중앙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작은 산이다. 일전에 단 한 번 올라본 적이 있으나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기억력을 탓하고 싶진 않다. 단지 그 때의 난 지금 이 산의 경치와 길을 기억하기엔 산을 오르느라 소진한 체력 덕에 숨을 헐떡이는 일에 더 바빴다. 그 때도 벌써 6년 전이구나.

“기다려. 땔감 좀 찾아올 테니까.”

  형은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다시 마른 작은 나무 가지들을 주우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형도 어느 정도는 지쳤는지 멀리 가지 않고 내 주변만 돌며 듬성듬성 떨어진 그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서늘하다 못해 차갑기 까지 한 숲 속 공기를 버틸 연료를 마련하는 동안 나는 짐뭉치에서 식기구를 꺼내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빵 두 조각. 그리고 조미해서 말린 소고기. 운 좋게도 발로 밟고 있었던 그럴듯한 모양새의 나뭇가지를 바닥에 밖아 냄비를 걸 수 있는 지지대로 삼는다. 마실 물과는 별개로 담아온 물통을 꺼내 냄비에 반쯤 채우고 나이프로 역시 짐뭉치에서 꺼낸 야채 몇 가지를 다듬는다. 야채와 같이 집에서 싸온 특제 양념도 같이 준비해 둔다. 이걸로 식사 준비는 끝. 걷느라 쌓인 피로에 이것저것 식사 준비로 체력을 소모하는 것은 사치다. 최대한 간결하게. 맛없고 어설프더라도 빨리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위주로 한다. 우리가 지금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은 것은 배를 채우기보단 못 다한 잠을 자려는 욕심이 더 크기 때문에.

“또 빵이냐.”

  어느 새 가슴 한 가득 나무를 끌어안고 돌아온 형이 내가 꺼내둔 빵을 보며 한 소리 한다.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10일째, 거기에 노숙 역시 6번이나 해왔으면서 또 투덜거린다. 그럴 것 같지 않게 생겨선 입이 영 까탈스러운게 아닌 사람이다. 사실 질릴 만도하다. 내가 딱히 요리 솜씨가 좋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준비해 온 여비가 넉넉해서 빵이 아닌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할 문제였지만 그래도 노숙을 준비할 때 마다 목에 잘 넘어가지도 않는 뻑뻑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가뜩이나 먹성 좋은 형에겐 고역이었을 것이다.

  냄비를 걸어둔 밑자리를 살짝 파내 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형이 모아온 땔감을 잘 정돈해서 모아둔다. 그리고 발화를 도와줄 기름에 적신 면사포 하나를 꺼내들고 그것을 성냥으로 조심스럽게 불을 붙인다. 사실 밑바닥이 패인 것 보단 그렇지 않은 쪽이 불이 더 잘 붙지만 내가 발견한 지지대가 그럴 만큼 냄비를 높이 지지해주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땅을 좀 파낼 수밖에 없었다. 습한 땅 때문인지 불이 평소처럼 잘 붙질 않는다.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갑더라도 입으로 땔감덩이의 밑동에 바람을 불어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겨우 겨우 불이 붙고 우리는 약간의 양념과 다듬은 야채를 넣은 냄비안의 그것이 끓기만을 기다린다. 사실 스튜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얼마나 더 가야되는 걸까. 이 망할 마을…….”
“글쎄 조금 더 가야하지 않을까. 지도대로 간다면…….”
“그 망할 지도 얘긴 꺼내지도 마. 지도만 믿고 하루면 올 거리라고 방향을 이렇게 잡았다가 험한 꼴 보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그 어설픈 길드에서 파는 지도 따위 믿을게 못된다고 얘기했잖아.”
“야 너무 그러지 말아. 그래도 그 사람 덕분에 우리가 갈 길이 조금은 단축됐잖아.”
“단축은 개뿔.”

  칼리스로 향하는 이 산길에 접어들기 전. 우리는 개블리라 불리는 유명한 길드에 들러 지금 보고 있는 엉터리 지도를 샀다. 사실 국경에 가까운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살던 우리가 말로만 듣던 개블리 길드를 그렇게 쉽게 찾아낸 것이 말이 안 되긴 했지만 그 땐 대륙내 최고의 정보력을 갖춘 그 곳이라는 사실만 생각한 채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흥분해서 무작정 들어간 그 곳에서 우리는 한 장사꾼에게서-지금 생각하면 사기꾼이지만-이 지도를 샀다. 개블리 중앙 본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표기한 것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그 인간의 말장난에 귀 얇은 형과 내가 깜빡 속아 넘어간 것이다.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엉터리 지도라는 것을 안 것은 이 자리에 주저앉기 전 얼마 전의 일이지만. 사실 그것도 내 추측일 뿐이다. 걷는게 지겹다 못해 이제는 지도마저 부정하고 싶은 내 철없는 체력이 그렇게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들린 페스티Festy마을의 개블리는 가짜라는 것. 워낙 규모가 커지고 그 세력이 강대해진 길드다 보니 우후죽순으로 지방 본부가 세워졌고 그 중에선 진짜가 아닌 그 이름만을 빌려 듣도 보도 못한 사기꾼들이 몰리는 엉터리 시장 격으로 세워지는 곳도 있었다. 결국 우리가 들른 그 곳은 가짜였고 그것을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은 이성보다 앞선 흥분 가득한 소망만을 생각한 나와 형의 바보 같은 충동 때문이었다.

“마을이 있기는 할까?”

  사실 정말 걱정이 되는 것은 ‘얼마나 더 가야 마을이 나오는가‘가 아닌 ‘정말 마을이 있기는 한 것일까‘에 대한 사실이었다. 길드가 가짜라는 확신과 그 장사꾼이 결국 사기꾼이었다는 추측이 확신에 가까워지자 나는 문득 그것이 걱정이 됐다. 여태껏 올라온 이 산길을 다시 내려가라고? 차라리 내 검을 부러트려!

“이 길 따라오면서 봤던 표지판이 있잖아. 설마하니 그 인간이 이 길에 표지판까지 세워두고 가짜 지도를 팔 만큼 치밀한 인간은 아니겠지. 그 정도로 머리 좋은 인간이었으면 이렇게 엉터리 지도를 팔지도 않을 거 아냐.”
“그 정도로 머리가 좋으면 그런 엉터리 지도도 어떻게든 말을 잘해서 팔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

  형이 말없이 날 노려본다. 꼭 저런다. 자기가 되받아 칠 말이 없고 내가 받아친 대꾸가 자신의 논리의 허점을 공격하면 항상 매서운 눈에 힘 잔뜩 주곤 안광을 발사한다. 뭐 하도 많이 봐서 별로 무섭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어두운 밤에 보면 살짝 등골이 서늘하기도 하다.

“그 사기꾼 이름이 뭐였지.”
“잘 기억 안나...켈....켈....켈 뭐였는데.”
“켈모리안Kelmorian!!!!"
“아 맞아!”
“잡히면 어디 한 군델 부러트려 버릴 거야.”
“하나로 되겠냐. 다시는 말장난 못 치게 입도 꿰매버려야지.”
“입에다 바느질 하는 거 보단 그냥 잘라내는게 더 간단하지 않아?”
“그런가?”

  켈모리안. 깡마른 체격에 곱상하게 길러 내린 검은 머리 그리고 처음 보면 편하고 친근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면 얍삽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사기꾼.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을 믿기 전 한 번 쯤 의심해봤어야 하는 우리의 실수도 있었지만 일단 원초적인 문제를 따지자면 그 인간이 나쁜 거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사기를 친 것은 그 놈이고 당한게 우리다. 어디서든 마주치면 응징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혹시나 모를 뒷세력이 있다면야 고려해 봐야겠지만.

“아우 맛없어.”

  스튜가 다 끓기도 전에 빵과 말리 고기를 다 집어 먹은 형이 먼저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거 안 먹을 거야?”
“맛없어 임마. 자는 동안 좀 끓고 나야 그나마 먹을 만하더라.”
“미안하네. 형편없는 요리사라.”
“알면 됐고.”

  얄밉게 되받아 치는 형을 쳐다보다 결국엔 나 역시 그 민망한 스튜를 지금 입에 넣기엔 귀찮아서였는지 그만두기로 했다. 널브러진 짐을 정리하고 제법 굵직한 나무에 기대둔 우리의 보물을 쥐어 잡는다. 검sword. 땀 냄새 가득한 가죽으로 말은 손잡이 위로 빛나는 서늘한 은빛 날. 검의 밑 둥에 새겨진 나와 형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이 어처구니없는 여행길에 오른 이유. 그리고 수단. 검신에 매달아둔 주머니에서 잘 개둔 극세사천을 꺼내어 검을 살며시 쓸어내린다. 혹여나 검신에 상처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은빛 광채를 따라 내려가는 내 손길은 마치 금궤를 닦아내는 것 마냥 조심스럽다.

“여자를 그렇게 다뤄봐라.”
“미친…….”

  멍청하게 누워있을 시간에 같이 검이나 다듬을 것이지 꼭 이상한 쪽으로 딴죽을 건 형. 울창한 숲 사이로 내려오는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검신의 아래에 새겨진 그 이름이 오늘따라 참 처량하다. 요르yorr. 그것이 처량한 이유가 맛없는 저녁 때문인지 아니면 사기꾼에게 당한 사실에 뒤늦게 분통한 것인지 나로선 딱히 뭐라고 한정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기엔 선택받지 못한 다른 한 사실이 지금 내 처지에 너무나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

“누구야!”

  멍하니 누워서 내가 다듬는 검만 쳐다보던 형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내 것의 옆에 세워 뒀던 자신의 그것을 빼들고 경계 태세를 갖춘다. 아크 댄Ark Dan. 새겨진 또 하나의 이름은 여태 보듬은 나의 그것보다도 더 선명히 그리고 푸르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금은 그 광채에 감탄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덩달아 그와 등을 맞대고 긴장 가득한 손의 떨림을 자제하며 앞을 주시했다.

“뭐야 형.”
“보였어. 네 검에 반사되던 뭔가가 움직이는 게.”
“지…….지…….짐승일수도 있잖아.”
“그러길 바래야지.”

  부디 짐승이기를. 그것도 될 수 있으면 굳이 검을 쓰지 않아도 몰아내거나 잡을 수 있는 작은 녀석으로. 내가 들고 있는 이 검은 분명 얼마든지 피를 볼 수 있는 녀석이었지만 사실 여태껏 그래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4년. 성인이 되고 나서 그 선물로 받아들인 이 녀석은 어쩌면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생물 앞에 검을 휘둘러 본 적이 없는 초짜다.

  서로 앞을 주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긴장감은 더 커져만 갔다. 떨림을 자제하기 힘들었고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혀 턱선을 따라 흘러내린다. 내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은 단 2가지. 형이 먼저 검을 내리거나. 혹은.

“검을 좀 거둬주시겠어요.”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등을 돌려 형과 같은 방향으로 칼을 치켜세웠다. 갈색 로브를 뒤집어 쓴 누군가. 내 소망대로 짐승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싸움이 벌어질만한 호전적인 어조가 아닌 조용하지만 분명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검을 거둬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검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그 차분한 상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개심 가득한 눈으로 눈앞의 그이를 주시하며 손목에 힘을 풀지 않고 있는 형 때문이었다.

“당신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그 어떤 수단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절 경계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오랜만에 산길을 따라 올라왔더니 힘이 드는데 좀 앉을 수 없을까요.”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려하고 있다 이 사람. 정체가 무엇인지. 아니 당장 로브 아래로 가려진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것 아닌가. 우리의 경계는 끝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눈앞의 그이는 그런 우리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모닥불 앞으로 주저앉아 시린 손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봐 당신!”

  호기 좋게 소리 친 것은 좋았는데 다음 말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형은 여전히 그를 주시하고는 있지만 내 다음 말이 조금은 신경 쓰이는지 이따금씩 눈동자를 나에게 돌리고 있었다. 모닥불이 고개를 돌린 그의 로브 안을 살며시 비추자 나는 다행히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이 참 선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일순간 긴장이 풀려버렸고 아까의 그 넘치는 기세에 걸맞은 말을 내뱉었어야 하는 내 입은 결국.

“그…….그 불 우리 건데…….”

에라이 인간아.

#
한 치의 떨림 없이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는 그-혹은 그녀-는 우리가 계속해서 검을 내리지 않자 할 수 없다는 듯이 로브를 어깨 뒤로 걷어 넘겼다. 검은 머리칼에 조용히 정면만을 응시하는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문 입이 차갑기 그지없는 인상을 숲 가득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실려 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의 생김새만으로 판단하건데 그가 아닌 그녀다.

“본의 아니게 위협을 느끼게 하여 미안합니다. 나는 유나 베리얼Yuna Berial. 칼리스 마을의 주민입니다.”

  여전히 차분하고 조용한 말로 자신의 소개를 마친 그녀는 살짝 웃더니 금세 입모양을 고쳐 다시 얼굴을 굳혀 버렸다. 이쯤하면 경계를 풀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아크는 말도 없이 검을 거두고 그 자리가 앉아 빤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이제 보니 그녀가 웃은 이유는 주변 신경 쓸 여력도 없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내 꼴이 우스웠던 모양인 듯하다. 검을 거두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내 아둔함의 잘못인가 아니면 함께 행동을 거두자고 배려하지 않은 그의 잘못인가. 내 마음의 무게 추는 서서히 후자로 기운다. 결론은 또 난 잘못한 것 없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나도 꽤 뻔뻔한 인간인 셈이다.

“칼리스 마을의 주민이라고 했습니까.”

  검을 거두고 서로 마주보고 앉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녹이던 손이 시렸는지 그녀는 입가에 손을 대고 살짝 입김을 불어넣는 것이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의 전부였다.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이었고 아크는 한참을 노려보다 기껏 한다는 말이 아직 경계를 완전히 푼 것이 아니라고 차라리 노골적으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것일까. 혹시 나는 느낄 수 없는 기운이라도 느끼고 있는 걸까.

“네.”

  짧은 대답.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질문.

“저도 하나 여쭤도 될까요.”
“뭡니까?”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 이곳에 사시는 분들 같지는 않습니다.”

  통성명이 오갈만한 밝고 화사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상대가 먼저 밝힌 후에 물어오는 것이니 일단은 대답해줘야겠지. 그러면서 슬쩍 쳐다본 아크의 얼굴은 여전히 상대를 잡아먹을 듯이 굳어있다. 그만 좀 했으면 좋겠는데. 상대는 연약해 보이는 여자라고. 여자.

“아 전 요르라고 합니다. 오즈에서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이 험한 길로는 무슨 일로 들어서신 건가요. 딱히 넘기 편한 산은 아닌데.”
“아아 그게 말이죠.”

  나는 페스티의 사기꾼 켈모리안을 만나 흥분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엉터리 지도를 들고 그것만 철석같이 믿으며 걸어온 지난 며칠간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풀어놨다. 더불어 우리가 대 개블리 길드를 찾아 여행 중인 촌뜨기인 것도 함께 말했다.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자 그녀는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 어색하고 무거운 밤공기를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신나게 떠들던 나는 시선을 피하는 것을 느끼곤 갑자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아크를 쳐다봤다. 하던 얘기나 계속 하지 왜 날 쳐다보냐 하는 식으로 날 잠시 노려보더니 다행히 입을 연다. 다만 그의 말은 앞뒤 두서가 맞지 않고 여기 저기 긴장한 티가 역력하지만 그래도 상대를 적대하려는 의도는 느껴지지 않을 나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거기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이제 그만 좀 해도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나도 알고 싶으니 참는다.

“…….”
“불이 필요했던 거라면 바로 말을 했으면 됐을 텐데 당신은 우리를 잠시 동안이었다곤 해도 지켜봤습니다. 의도가 뭡니까.”
“당신들이 마을 사람들인 줄 알았거든요.”
약간은 이해하기 힘든 그녀의 대답. 당신 조금 전에 마을 주민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잘 이해가…….”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 없이 또 아까와 같은 알 수 없는 짧은 미소만 보인 채 금세 표정을 정비한다. 마치 그 웃음이 상대방에게 궁금증을 유발하여 미치게 만들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 과 같은 찰나의 순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몸이 따뜻해졌어요. 이젠 마을로 들어가도 되겠군요.”

  들어가?

“무슨 말입니까 들어가도 된다니요.”
“저기 우리도 마을로 안내 좀.”

  두 남자의 다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점점 더 차가워져만 가는 바람을 피하려 로브를 다시 뒤집어 올렸다. 어깨 위로 살며시 보이는 머리칼 그리고 로브 안으로 보이는 크고 검은 눈동자. 이렇게 다시 보니 그렇게 긴장할 이유도 없었던 영락없는 연약한 여성인데 나는 왜 몰랐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는 아직도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 쯤 해두지 않으면 실례다. 더구나 마을로 가는 길을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마당에 아직도 의심이라니. 경우가 옳지 않다.  애초에 우리의 질문은 2개였으나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면서 바른 길을 찾기 위해 방향을 잡는 듯 하더니 이번엔 조금 더 선명한 미소를 보인다. 아크. 봐! 보라고! 전혀 경계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예. 예. 당신은 단지 낯선 남자 둘이 앉아 있는 모닥불에 가까이 오기 힘들었을 뿐이었겠지요. 마을 주민이라고 설명해도 믿어주질 않는 저 바보가 답답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셨겠지요. 이 녀석은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우리를 마을로 인도해주시어 비록 맛없는 빵에 아직 먹지도 않은 스튜가 남아있긴 미련 따윈 남지 않았으니 하나 차가운 흙바닥이 아닌 지푸라기 가득한 창고라도 좋으니 사람 사는 마을에서 잘 수 있게 좀 해주세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나는 이제 당신을 단 한치도 경계하지…….

“나는 마녀니까요…….”

  취소. 다 취소. 검 뽑아 아크. 뭐해!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8-0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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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giloveoov
08/08/02 14:1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__)
기대가 되는군요!
08/08/02 20:21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다음 연재 기대할게요~

ps. 주..주인공으론 여자가 좋은데...쿨럭.!
08/08/02 22:34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기대가 되네요~
유신님//저도 그렇게 생각..........................-_-;
08/08/03 05:04
수정 아이콘
연재비 내러왔어요. 히히- 처음부터 다시보는군요.
08/08/03 23:01
수정 아이콘
흐흐 근성연재부탁드려요
~Checky입니다욧~
08/08/03 23:17
수정 아이콘
판타지 정말 좋아하는데 전 모니터로는 소설 정말 못읽겠어요....그래도 읽어볼라고 도전중.....
KaKaRuYo
08/08/04 22:5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이 기다려지네요 흐흐흐.
여자예비역
08/08/05 14:24
수정 아이콘
처음부터 다시본다.. 흐흐..
이헌민
08/08/06 01:51
수정 아이콘
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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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소설] 1회 :『녀소 는리달 을간시』- 토끼 굴에 떨어지다 [10] kikira9199 08/06/02 9199
23 [소설] 시작 전에 하는 이야기 - "창공의 별" [3] kikira10233 08/06/04 10233
22 [만화] 모텔 넥서스 17편 [188] 바흐35679 08/04/10 35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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