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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6/23 18:59:46
Name kikira
Subject [소설] 9회 :『녀소 는리달 을간시』, 신의 물건











※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따라서 순환론과 관련된 인명, 서적, 논문, 학파 등에 관련된
    모든 내용은 허구이며, 혹 그 관련이 의심된다면 그것은 순전한 우연임을 알려드립니다.  












아홉 번째 이야기 - 신의 물건








  내 짧은 생각으로, 율리스의 생각은 해석에 관한 극단적 상대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역시 내 우매한 소견이겠으나, 그가 야스타카를 인용한 것이 결국 자신의 이론 전개를 위한 거두절미의 또 다른 사례가 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더욱이 그가 말미에 언급한 ‘야스타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신격화될 위험이 있었다. 츠츠이 야스타카가 실제 그러하였는가와는 상관없이, 학문적 논의에서 간혹 이뤄지는 특정인에 대한 과도한 신성화는 어떤 학문을 고착화시키는 가장 흔한 이유이다. 이는 우리 세계의 여러 비슷한 사례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은 논쟁하지 않고, 논쟁은 저속하지만 그러하기에 오직 인간의 것일 수 있다.

  또한『순환론의 기원』에서 율리스는 야스타카라는 이름을 통일된 단수 명사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 그런가? 텍스트의 수용자가 복수인 것처럼, 그리고 그 해석이 역시 복수인 것처럼, 야스타카라는 이름 역시 결코 단수로 처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텍스트가 오직 하나의 수원(水源)으로 소급될 수 없음은 가츠코월드에서도, 우리 세계에서도 이미 밝혀져 있지 않은가? 율리스가 비록 학자 출신은 아니지만, 이 간단한 텍스트 미학을 몰랐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간 무시되고 잊혀진, 야스타카라는 이름을 복권하면서 그는 결국 ‘오버’하고 말았다. 아니면 그간 많이 기운 저울추를 맞추기 위해서 얼마간의 오버가 필요하리라 판단한 것일까? 어쨌든, 앞서 그는 가츠코 논의의 긴 역사를 ‘작품 수용에 대한 세속화의 과정’이라 요약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이론을 전복하고 있었다. 그가 야스타카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문체는 차라리 다카시의 그것과 닮았다.

  그 알 수 없는 자신감, 근거 없는 낙관론.


  율리스의 글을 읽으며 내가 거부감을 느낀 마지막 부분은, 결코 활자에는 쓰여 있지 않은 그의 의도이다. 그의 이론은 지금까지의 험난한 순환론 논쟁을 마무리 짓겠다는 강력한 의지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 그는 이 모든 논의의 종지부를 지을 순환론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쓰고자한다. 이것이 내가 느낀 그의 뚜렷한 의도이다. 그러하기에 율리스의 글은 내 노트의 마지막에 퍽 어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러한 생각 때문에라도 순환론 논의가 앞으로 한 세기는 족히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헤겔 이후에도 철학은 계속되었듯, 역사란 종종 애꿎은 표정을 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러한 노파심을 잠시 마취해두면 그의 이론은 꽤 근사한 것이었다. 난 지나간 수많은 것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이론도 앞으로 일정한 소임을 수행할 것이고, 훗날 여사여사한 공과를 평가받을 것이며, 자그마하나 정당한 자리에 편히 쉬게 될 것임을 미리 예감했다. 그러면서 난 노트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   *   *   *   *



  오늘처럼 싸구려 와인을 한 잔 하고나면 기분 나쁜 취기와 함께 이 노트들을 불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나, 결국 또 한 번 읽어보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한다. 노트를 다시 읽던 중, 이 소설과는 달리 기록된 부분들을 발견했다. 허나 난 둘 중 어느 것이 잘못되었는지 가리지 못한다. 어쩌면 그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맞던지 혹은 그르던지 말이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가츠코월드를 경험할 적에도 분명 어느 정도의 왜곡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인간인 이상 아무리 세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결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음은 내 기억에도, 노트에도, 소설에도 모두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땐 잠시 율리스에 기대도 될까? 가츠코월드의 모습은, 조금씩 그 시선을 달리하는 내 기억과 노트, 소설 속에서 더욱 풍요로워 질런지도 모를 일이니까.



  난 다른 노트를 찾아 아무 페이지나 뒤적여본다. 10월 30일. 이 날은 와이즈먼 교수가 자살한 날이다. 나는 아직 오직 않은 그 날에 우리 세계의 어느 늙은이가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 노트를 내려놓고 오늘 날짜의 노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2008년 9월 14일. 오늘은 형의 생일이다. 난 오늘 종로에서 차가 막히는 바람에 평소보다 2시간이나 더 걸려 집에 돌아왔다. 전날이었던가, 주5일제 시행으로 인한 공휴일 축소 계획이 발표되고, 거기엔 아나끼 교수의 서거 기념일이 끼어있었다. 이에, 우리나라의 충성스런 순환론자, 종결론자, 창조론자들은 대규모 합동항의집회를 벌였고 그 덕에 나는 형 집에서 돌아오기까지 3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야 했다.
  2008년 9월 14일. 난 평소보다 20분 빨리 집에 도착했다.

  
  


  내 방 침대에 거꾸로 누으면, 어렴풋이 창문으로 별 몇개가 보인다. 술기운 탓인지 별이 더욱 많아진 것 같다. 잠이 오려고 한다. 침대에 눕기 전, 난 순환론 논의와 대응점이 될 만한 우리 세계의 연구를 찾아보고 싶기도 했으나 굳이 그러진 않았다. 난 우리 세계에서「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대한 독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했으나, 굳이 알아보진 않았다. 물론 그건 꿈이 아니었다. 난 내가 4개월간 가츠코월드를 경험했음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바탕으로 내가 이 세계에서 해낼 수 있는 ‘차이’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노트를 완성시킨 후, 내 앞으로의 삶은 가츠코월드를 다녀오지 않은 나와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단지, 오늘처럼 취중에 노트를 들여다보는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때로 사실과 효용의 거리는 이렇게 멀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다.





   *   *   *   *   *





  해가 한가운데 걸리고 나서야, 난 겨우 잠에서 깼다.
  햇볕이 전날보다 더 사나워진 것 같다.
  공기도 더욱 후덥지근해졌다.
  난 의아함을 느끼며 TV를 켰다.
  허나 내 의아함은, TV 속 날짜를 본 뒤 가라앉았다.
  곧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점심을 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난 책을 손에 꼭 쥔 채로 오후 내내 낮잠을 잤다.
  해가 질 때쯤, 난 잠에서 깨었고 약간의 피로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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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09 09:34
수정 아이콘
그간 수고해주신 박진호님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8/07/10 11:54
수정 아이콘
이 글이 마지막이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다른 연재물도 기획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08/07/10 13:17
수정 아이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08/08/03 21:02
수정 아이콘
이제서야 읽었네요.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08/09/15 11:43
수정 아이콘
9월 14일, 다시 만난 어제의 너에게.
Auf Wiederse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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