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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0/06/20 20:45:08 |
Name |
zeros |
Subject |
Mr.Waiting - 4 |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여러 가지 시련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의 그릇엔 다소 과했는지 어느 시점에서 부턴가 나는 나의 비관적인 시각을 현실적이라고 애써 정당화 하고 있었다. 그 시련 중엔 사랑의 실패 역시 크게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헤어짐이 끝이라는 의미는 아니라 생각했기에 나는 억지로 가슴에 난 구멍을 채우려 하지는 않았다. 아니, ‘채울 수 없었다.’ 라는 표현이 더 옳았다.
작년 겨울, 다시 한 번 더 거듭된 입시 공부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을 때 남 모르게 그녀를 꿈꿨었다. 나에게는 여지가 없었다. 하루 종일 생각한다는 말은 거짓말이겠지만 정말이지 하루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럴 즈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을 한 번 모아보려고 하는데 어떻겠냐고. 그 자리엔 그녀도 끼어있다며 나에게 조심스런 물음을 던졌다. 마치 내가 다시 그 생각을 하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가슴 가득한 기대감을 애써 숨기며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았지만, 내가 들은 것은 그녀의 미국 어학연수 소식이었다. 시린 가슴은 담배연기가 들어왔을 때 편했다. 그녀가 출국하는 날. 잠들 수 없었던 나는 모두가 잠든 시각 그녀에게 짧은 작별인사를 남겼고, 그 때 내게 왔던 답장을 보관하던 나는 말없는 전화가 끊겼을 때, 다시 열어보았다.
'전화를 해볼까?'
통화버튼은 누를 수가 없었다. 망설임은 확신의 부재에 힘입어 엄지손가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새벽녘 기분 좋게 취한 채 희뿌연 거리를 헤쳐 돌아온 난, 미니홈피로 그녀의 귀국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장난전화를 했고, 그 시기가 정말 우연하게 그녀의 귀국시기와 비슷하게 맞물렸던 것 일 수도 있다. 당시에도 생각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차갑게 생각하기엔 지은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너무 아련했다. 그 날 저녁께 쯤 온 친구의 문자 메시지엔 오늘 이미 내가 확인한 사실과 입대 전에 갖기로 한 자리에 그녀도 초대하는 것이 괜찮겠냐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녀를 다시 본다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아니, 두려운 일이었다. 이제 겨우 조금 나아져서, 이제야 매일 생각하지 않게 되었는데. 망설였다.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난 뚜렷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이렇게도 기다렸다는 듯 얽혀버리는 그녀와 나의 인연에 헛웃음이 나왔다.
수첩을 꺼냈다. 등에 매여진 내 몸 크기만한 군장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오므렸다. 뭐라 휘갈긴건지 잘 알아볼 수 없는 페이지들이 넘어가고 맨 뒷 커버에 자리한 지은이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서울에서 볼 수 없던 촘촘한 별빛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엔 너무 어두웠다. 그러나 애초에 빛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사진은 내 머리 속 추억을 켜는 부싯돌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
난 두려웠다. 그녀의 모습을 다시보고 또 다시 그녀의 모습을 매일 그릴까봐. 또 다시 가슴앓이가 시작될까봐 두려웠다. 약속한 날이 다가옴에 따라 설레는 마음을 추스렸다. 입대 전에 의례 하는 수많은 만남들. 그냥 그것들 중 하나일 거라고. 기대할 것 전혀 없다고.
추스림은 약속 당일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 잠시 후 친구와 함께 나타난 그녀를 맞았다. 오가는 술잔에 그 동안 서로에게 비어있었던 2년을 담아 주고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만나는 내내 나는 속 빈 강정이 되려 안간힘을 썼다. 나도 모르게 다시 시작 될 것 같아 그녀와 친구들에게 일찍 작별을 고하고 홀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의 방어전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였다. 만남 이후 그녀에게 다가서진 않았지만, 그녀의 다가섬까지 뿌리칠 순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 여부와 상관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날 가까이 하려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겐 눈부신 기쁨이었다.
"여보세요?"
"준오야. 뭐해?"
"어. 그냥. 음악 듣고 있었어."
"으응. 누구 듣는데?"
"지금은 마룬파이브. 들려?"
"응. 나도 이 노래 좋아하는데."
"그래."
"응. 근데 준오야, 너 올해 스키장 갔었어?"
"아니. 나 안간지 한 4,5년 되었을걸."
"으응. 아 나 가고 싶은데 어디 좋은데 없으려나?"
"아아.."
3일 후, 난 지인을 통해 구한 무료 티켓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자. 여기 두 장 구했어. 지연이랑 같이 간다고 했지?"
"응. 근데 너는 정말 안 갈거야?"
"어. 나는 좀 그러네."
"왜~ 같이 가지. 같이 가자!"
"음. 안되."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 이상 그녀와 함께하면 어쩔 수 없이 또 내 맘은 온통 그녀의 색깔이 되어 버릴 것이 뻔하기에. 그리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안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난 맘에도 없는 거절을 했었다. 그 때 그녀는 왜 그리도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을까. 창고 안에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있던 나의 보드와 보드가방은 오랜만에 빛을 볼 수 있었다. 난 그녀와 새벽 녘 스키장으로 향하는 셔틀 버스 정류소로 향했다. 난 어쩔 수 없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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