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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7/24 22:06:46
Name 이븐할둔
Subject [일반] 남에게 설명해보는 건 좋은 공부가 된다. + 역사책에 대한 여러잡담 (수정됨)
중화 시리즈 3편을 쓰고 있는데 글이 턱턱 막히더군요. 분명히 중국사에 대해 읽은 책이 적지는 않은데, 왜 그런가 싶어서 생각해보니 제가 하은주 시대의 중국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더군요. 역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건 자기 지식이 아니라는 재수학원 은사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준비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부족한 점을 파악하고 보충해갈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 같습니다.

어쨌든, 중화 시리즈가 늦어지니 역사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소회를 좀 나눠보고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역사자료에는 일종의 티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이 게임 사이트이니 롤로 비유를 들자면.

0.아이언 - pseudo history 혹은 그와 가까운 무언가.
1.브실골 - 인문서적/입시 수요에 맞춰서 쓰여진 말랑말랑한 교양서.
2.플래티넘 - 역사매니아를 대상으로 하는 하드커버 양장본.
3.다이아 -학계에서 돌려보기 위해서 내놓는 논문
4.챌린저 - 과거인들이 기록한 역사적 사료.

정도로 바꿔볼 수 있겠네요. 읽지 않는 것이 나은 유사역사학 책만 뺀다면 각 자료들은 각자의 고유한 쓸모가 있습니다. 가끔 교수님들이 어떤 인문서적은 없느니만 못하다, 정확한 인식을 방해한다,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대중서도 교수님들 논문만큼 가치가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대중친화적 역사서가 판매부수가 높으니까 교수님들 연구저서보다 더 가치 있는 결과물이라는 게 말이 안되듯이요. 단지 대중강연을 한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포기해서는 안되겠지요.

일단 저희가 보는 역사적 텍스트는 다음 과정을 통해서 제작됩니다.

1. 원본 사료가 있다. 옛날부터 내려온 게 아니면 고고학자들이 새롭게 발굴/유추해야한다. (1차 장벽. 기록 안된 건 알 수가 없네요.)
2. 전업 연구자가 그 시대 사료를 읽고 연구해서 책/논문을 출판한다. (2차 장벽. 연구자가 잘못 읽었거나 자기 주관을 강하게 끼워넣을수도 있죠.)
3. 작가가 전업 연구자가 남겨둔 자료와 논문을 읽고 대중서를 써낸다. (3차 장벽. 연구자료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또 작가 주관이 들어갑니다.)
4. 역사강연/저술 요청은 받았는데 시간이 빠듯한 사람은 3번의 대중서만 빠르게 훏은 뒤, 적당히 상황 맞춰서 이야기한다. (4차 장벽...)

대충 퉁치자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생활사나 문화사 같은 건 순수한 당대 문헌기록보단 현대 고고학/역사학에 의존하는 게 낫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빼고요. 원론적으로는 티어 높은 자료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일수록 '사실로서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티어가 올라갈수록 읽기도 어렵습니다. 역사매니아를 대상으로 하는 양장본 책들은 500,600페이지도 거뜬히 넘어가는데 이런걸 보고 전문 연구가들은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대중서적인걸 감안하면 훌륭한 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교수님 저서 좀 봅시다...하면 사람 이야기는 없고 그래프, 통계, 지리적 특징이 가득 담긴 밋밋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물론 재밌게(교수치고)  잘 쓰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런 분은 드무니까요.

그냥 원본 사료 번역본을 읽으면 굉장히 낯선 시간과 공간, 관점 속에 노출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기이할 정도로 신을 숭상하고 두려워하거나 현대인으로서는 너무 오바한다 싶게 과몰입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지 싶을 때도 많거든요. 이럴 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숙지하니 도움이 되더군요.

1. 공교육은 없는 시대다. 역사기록물을 남긴 사람의 절대 다수는 지식 엘리트로 지배계층에 속한다.
2. 과학적 세계관이 소개되지 않은 시대다. 모든 자연현상의 근원에는 초월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을 떨치기 어렵다.
3. 위성 지도도 없던 시대다. 옆 대륙은 고사하고 옆 나라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힘들다.

제가 티어니 뭐니 뻘소리가 길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줄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근대인은 뉴턴 역학을 모르니 모두 신비주의적이며,  위성 지도가 없어서 길치이다. 거기에 공교육이 없으니 지식은 종교 교리에 의존한다. 대중매체가 없으니 살고 있던 마을과 가족이 공동체의 전부다.  페니실린도 없고 비료도 없는데 짐승이랑 무기는 흔해서 시체 보는 일도 아주 흔했다. 그렇지만 같은 호모 사피엔스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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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alist
21/07/24 22:33
수정 아이콘
요즘은 제가 좋아하는 시대, 국가 관련으로는 왠만해서는 본문에서의 플레 급 자료까지는 비교적 쉽게 구매처에 접근할 수 있게 되어서 그건 정말 좋더라고요. 다이아 이상부터는 유료 학술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자료가 많아서 아마추어 입장에서는 그 큰 돈 들이면서까지 접근하기는 좀 그렇지만요.
깃털달린뱀
21/07/24 23:12
수정 아이콘
저도 이븐 할둔님 글 보고 가볍게 민족과 정체성 관련 글을 써볼까 했는데 영 손이 안가네요. 이게 너무 뻔하면서도 본격적으로 들어가려면 한없이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주제다보니... 막연히 알고 있던 것을 표현을 정제하고 세련되게 구체화 하는 게 참 만만한 작업이 아니에요. 그래서 '언젠가는 쓰지 않을까?' 정도로 치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중입니다.
패마패마
21/07/25 08:04
수정 아이콘
올려주시는 글들 잘 보고 있습니다 혹시 유럽사쪽에선 읽어볼만한 책 있을까요? 방학기간동안 교양을 쌓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는게 좋을지 알고 싶습니다
이븐할둔
21/07/25 09:37
수정 아이콘
각 국가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시려면 케임브릿지 00사 시리즈를 추천드립니다. 고대그리스가 알고 싶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을 비롯한 그리스 고전들, 로마사는 깊이 있게 시작하고 싶다면 갈리아 전기/리비우스 로마사같은 당대 기록을, 가볍게 시작하고 싶다면 로마인 이야기를 추천드립니다. 근세 이후(1500이후)부턴 이제 주제 별로 고르셔야하구요,
이븐할둔
21/07/25 09:39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론 고대그리스 고전을 직접 읽으시거나 케임브릿지 시리즈를 추천드립니다. 군주론도 한번은 꼭 읽어보셨으면 하네요.
패마패마
21/07/25 12:08
수정 아이콘
추천 감사합니다 흐흐 영프독 3개 나라쪽 근세사를 더 알고 싶었는데 케임브리지 시리즈 찾아봐야겠네요
AaronJudge99
21/07/25 17:05
수정 아이콘
저는 먼나라 이웃나라를 정말 깊숙하게 보면 문제점이 산적해 있어서 까고 까고 계속 까도 문제점이 계속 나오지만 그럼에도 대중교양서로서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데, 그 이유가 이 책이 90년대의 일반 한국 사람들에게 유럽 그리고 세계를 보는 눈을 정말 많이 키워줬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저는 90년대 중반에는 그래도 좀 유럽이나 세계사에 대해 좀 알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어른들 얘기 들어보면 좀 제가 생각한거하고는 다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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