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06/25 16:09:57
Name 글곰
Subject [일반] [14] 오늘도 나는 하루 더 늙었다 (수정됨)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기 전 거울을 보았다. 옆으로 누워 잔 탓인지 한쪽 뺨에 선명한 이불 주름자국이 남아 있었다. 전날의 피로를 미처 떨치지 못해 반쯤 감긴 눈으로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고, 스킨을 바른 후 거울을 보았다. 주름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20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는 이십대 초반이었다. 피부는 생고무처럼 탱탱했다. 자국이 생겨도 금방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지금보다 기억력도 훨씬 좋았다. 스타크래프트 세 종족의 모든 체력과 공격력과 방어력과 공격타입을 달달 외웠다. 하다못해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업그레이드 공식 명칭까지 외웠다. 지금은 아니다. 스타2 유령 공격력이 얼마인지, 광전사의 이동 속도가 얼마인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방금 전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교통카드를 찍었는지 아닌지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피지알은 내가 제대로 시작한 첫 커뮤니티였다. 후배가 알려준 주소로 접속해서 아이디를 만들었다. 닉네임을 만든 건 일평생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민하는 데 대략 2분쯤 걸렸고, 글 쓰는 곰이라는 뜻으로 글곰이라는 닉네임을 정했다. 그걸 지금까지 쓰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스타를 했고, 온게임넷과 MBC게임을 봤고, 피지알 게시판에 글을 쓰고, 자고 일어나 또다시 스타를 했다. 승률은 별로였지만 상관없었다. 스타를 하는 게 재미있었고 보는 건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스타를 보고 나면 다시 피지알 게시판을 보고 댓글을 달고 가끔씩은 글을 썼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내가 이십 년 가까이 피지알러 노릇을 하고 있을 줄은.

내가 20년 전에도 이랬구나.

e스포츠로서의 스타크래프트는 이제 수명을 다했고, 나는 마흔이 넘었다. 롤은 하지 않고 보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페이커 정도만 알고 있다. 대신 나는 가끔씩 소설을 쓰고, 그보다 많은 삼국지 글을 쓴다. 21세기 프로게이머 랭킹이라는 이름을 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는 이천 년 전 역사에 대해 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지난 이십 년을 되돌아보면 내게 제대로 활동한 커뮤니티는 피지알이 유일하다. 간혹 다른 곳에다 글을 쓴 일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내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의 98%는 피지알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스스로 피지알러라는 정체성을 느낀다. 그렇다 해서 피지알러 따위가 뭐 대단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 스스로는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 마치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이 말이다.

이십 년 전에 피지알을 통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 중 몇이나 되는 이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그들은, 아마도 지금의 나와 대충 동년배로 틀딱 꼰대 아재 소리를 듣고 있을 그들은, 어딘가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는 결혼도 했을 것이고, 아마도 얼마간은 자식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매우 자주 사회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족들이 잠든 한밤중이면, PC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게임을 시작할 것이다. 이십 년 전에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했던 모습이겠지만, 마흔을 훌쩍 넘은 중년인데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피로와 싸워 가면서 신나게 게임을 할 것이다. 그러다 간혹 내킬 때면 이십 년 전의 게임도 한 번씩 해 보긴 할 것이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라떼는 말야, 라는 말을 주워섬겨 가면서.  

그러다 어느 야심한 밤에, 가끔씩 감흥이 지나치게 솟아오를 때면, 그래서 옛날 생각이 물씬 피어오를 때면, 때로는 피지알 게시판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괜히 구닥다리 감성에 젖은 글도 쓸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나처럼.

20년 전의 호기롭던 청년은 이제 중년을 넘어 중늙은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몸은 늙었을지언정 마음만은 20년 전의 그때와 같다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가면서, 나는 오늘밤에도 컴퓨터를 켜고 피지알에 접속할 것이다. 자게와 겜게를 넘나들고, 유게와 스게를 섭렵하고, 질게와 추게를 왕복하면서, 그렇게 나는 오늘도 피지알러들과 하루하루 더 늙어갈 예정이다. 그렇게 20년을 살아 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예정이다.

산다는 게 뭐 그런 거지.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피잘모모
21/06/25 16:11
수정 아이콘
저도... 글곰 님처럼 피지알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네요 :)
21/06/25 16:19
수정 아이콘
그러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피지알을 떠난 분들이 세 트럭 정도 됩니다. ㅠㅠ
저로서는 오래 계시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네요.
제리드
21/06/25 16:27
수정 아이콘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21/06/26 02:28
수정 아이콘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20대 후반이지만 요새 가끔씩 과거 10대 ~ 20대 초반에 정말 열과 성을 다해 했던, 그러나 지금은 폐쇄되어 없어진 게임 커뮤니티의 흔적을 편린으로나마 여기저기서 모아 옛 생각에 빠져들곤합니다.

의식의 흐름으로 옛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검색하다보면 라떼는 말이야~ 하며 나도모르게 10년전으로 돌아가 안달난 마음에 어디든 흔적을 남기려 두서없이 글을쓰다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와 됐다 ~ 하곤 합니다 크크

글곰님처럼 필력이 좋았다면 여기저기 글을 많아 썻을것같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2260 [일반] 몽구스 무리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했다 (번역) [14] 아난13092 21/06/26 13092 10
92259 [일반] 일본이 백신접종에 궤도에 도달한거 같습니다 [104] 여기21150 21/06/26 21150 12
92258 [일반] 우울증2 (되새김질) [10] purpleonline13297 21/06/26 13297 15
92257 [일반] 퇴직일에 지하철 출입문 사람끼는 사고 막은 이야기 [10] greatest-one14218 21/06/25 14218 21
92256 [정치] [도서] 우남 이승만의 유산은 무엇인가? [319] aurelius19332 21/06/25 19332 0
92255 [정치] 검찰 중간간부 인사 단행...'권력사건 수사팀장' 모두 교체 [70] 미뉴잇16156 21/06/25 16156 0
92254 [일반] 정시 수시에 대한 나름의 생각 [86] 이는엠씨투12247 21/06/25 12247 12
92253 [일반] 알뜰폰 요금제 추천드립니다. [17] 코지코지13342 21/06/25 13342 5
92252 [정치] 최초의 10대 대변인을 노리는 김민규 학생 말솜씨 한번 보시죠 [75] 나주꿀21469 21/06/25 21469 0
92251 [정치] (정치유머) 민주당에서 그렇게 외치는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알겠습니다. (Feat 박성민) [78] 가슴아픈사연17010 21/06/25 17010 0
92250 [일반] [14] PGR과 함께 사는 세상 [5] 제리드12314 21/06/25 12314 9
92249 [정치] 추미애 "내가 대선 출마 선언하니 윤석열 지지율 떨어져" [34] TAEYEON13035 21/06/25 13035 0
92248 [일반] [14] 오늘도 나는 하루 더 늙었다 [4] 글곰10276 21/06/25 10276 17
92247 [일반] 남성 혐오 사건에 대한 언론의 태도 [96] 맥스훼인18644 21/06/25 18644 42
92246 [정치] 민주당 경선 일정 그대로 가기로 합의, 이낙연은 반발, (+정세균은 수용) [61] 나주꿀15911 21/06/25 15911 0
92245 [정치] 아이돌-前CEO-탈북자까지… 국민의힘 ‘대변인 오디션’ 흥행 [65] 청자켓17788 21/06/25 17788 0
92244 [일반] 반값 로또 청약 원베일리 커트라인이 나왔습니다. [47] Leeka14950 21/06/25 14950 1
92243 [정치] [도서] 한겨레 기자가 출간한 한일신냉전 [59] aurelius17427 21/06/25 17427 0
92242 [일반] 사망사고후 부모님이 용서를 해주는 경우 [50] will15989 21/06/25 15989 2
92241 [정치] [외교]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 [115] aurelius16166 21/06/25 16166 0
92240 [일반] [외교] 프랑스 의회, “인도태평양 전략 청문회” [6] aurelius11882 21/06/25 11882 9
92239 [일반] [외교] 수준 높은 프랑스의 외교잡지 [22] aurelius17919 21/06/25 17919 23
92238 [일반] 출수는 두 번 할 필요가 없나니. 팔극권 이서문 이야기 [14] 라쇼17886 21/06/25 17886 1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